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70514)주님은 불치병 같은 우리의 문제도 해결해 주십니다(막 1장 40-45절)

청명하늘 2018. 3. 12. 23:24

주님은 불치병 같은 우리의 문제도 해결해 주십니다

 

성경: 마가복음 140-45(54)

찬송: 419(주 날개 밑; 478), 301(지금까지 지내온 것; 460)

설교: 20170514.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과학이 정말 빠르게 바뀌고 발전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빠른 발달 때문에, 세상은 더 편해지고, 더 빨라지게 되었고, 10,20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들을 보고, 듣고, 누리게 되었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지금처럼 각자가 자기 전화를 들고 다닐 수 있다고 생각했겠습니까? 또 이 전화기가 컴퓨터가 되고, 계산기도 되고, TV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상상조차 못 했던 일들이 너무나 익숙해지고, 당연하게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더불어 발전하는 것 중 하나는 의술입니다. 사실 과학이 최종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인간이 오래 살고, 질병과 고통은 없애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동안의 이 수고와 노력들이 헛되지 않아 사람의 질병을 고치고, 낫게 하는 데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100살을 사는 것이 이상할 것 없는 때가 되었고, 신체 중 일부가 고장나면, 다른 사람의 신체를 가져다 쓸 수도 있습니다. 의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보여주는 모습들을 잠깐 보겠습니다.

 

태어나 처음 보는 여성

태어나 처음 소리를 듣는 여성

태어날 때부터 전혀 듣지 못 한 사람이, 이렇게 들을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장님(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기계와 기술의 도움으로 볼 수 있을 거라 기대라도 했겠습니까? 그만큼 인간의 기술과 능력은 많이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한 기술이지만, 그럼에도 인간이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온갖 질병에 시달리고 있고, 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잘 모르실 수 있지만, 미국의 스티브 잡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컴퓨터를 통해 전세계에서 몇 번째 손가락 안에 포함될 만큼 엄청난 부자였지만, 췌장암에 걸려서 56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 삼성 이건희 회장도 돈에 관한 한 걱정 없는 사람이지만, 몇 년째 뇌사, 즉 숨은 쉬는데,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과학과 기술이 발달했지만, 여전히 고칠 수 없는 질병과 고통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병들을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질병이라고 해서 불치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엔 대부분의 질병에 대해서 불치병이라고 하지 않고, ‘고치기 어려운 질병이라는 뜻으로 난치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고치거나 나을 수 있는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다는 뜻이고, 환자들에게 작은 희망이라 주고, 기적 같은 가능성을 바라고 붙인 이름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나병환자, 옛날에는 경멸적인 태도를 담아 문둥병자라고 부르던 한 사람이 예수님으로부터 치유 받습니다. 레위기 13, 14장에서는, 나병의 증상, 나병으로 규정하는 과정, 그리고 나병이 나았을 때 이것을 인정받는 규례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서 말씀하는 나병이 오늘날의 나병과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나병은, 아주 심각한 피부질환 등을 포함하고, 그 중 하나가 요즘 우리가 알고 있는 나병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나병에 해당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상관없이, 당시에 누구든지 나병환자라고 판정되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즘이야 나병도 치료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나병은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불치병입니다.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몸이 죽어서 더 이상 고통과 질병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죽어서야 비로소 나병으로부터 오는 고통이 끝날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거나, 고통이 끝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마저 가질 수 없는, 말 그대로 소망이 끊긴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병에 걸리면,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나병에 걸렸다고 판정되고 나면, 사람과 사람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사람이면서도 사람처럼 인정받지 못 합니다. 차라리 짐승들은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병환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집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람들과 이야기도 할 수 없습니다. 길을 가다 사람들을 만나면, 자기가 자기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면서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말 그대로 나는 더러운 사람이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으로 하면, 신앙인들은 사용하지 않는 말이지만 나는 부정탄 사람이다혹은 나는 저주받은 사람이다.”는 뜻입니다. “나는 더럽고 부정하고 저주 받은 사람이고, 내게 가까이 오는 사람도 함께 더러워지고 저주받게 되니 내게 가까이 오지 말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남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단지 나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으로 인정을 받지 못 합니다. 다른 사람 가까이 다가서면 무시와 저주를 담은 돌멩이가 날아옵니다. 다른 사람이 모르고 가까이 다가오면, 자기가 먼저, 자기 입으로 나는 더러운 사람이다라고 외쳐야 했으니, 나병에 걸린 사람의 삶이 얼마나 처참하고 괴롭겠습니까?

 

사람에게 소망을 걸 수 없을 때, 흔히 신앙의 힘을 빌려 이겨내려 노력할 수 있지만, 신앙의 힘마저 도움이 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신앙의 중심지로 여겨졌던 예루살렘 도시에서는 살 수도 없습니다. 요즘 교회와 비슷한 역할을 했던 회당에는 오갈 수 있었지만, 그것도 제한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없고, 칸막이로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곳에만 들어갈 수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나병환자들을 산송장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나병은 그 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이 사람의 가정이나 마을에 너무 심한 고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렇게 사람에게서도, 신앙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 하고, 절망 가운데서 죽음만을 기다리는 산송장처럼 살던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도움의 손길을 청합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자세한 내용이 나오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면 자기를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족으로부터도 버림을 받고, 그 누구로부터도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어서, 마지막 소망으로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예수님 한 분만을 소망으로 삼고, 마지막으로 의지할 분으로 여기며 나아오는 나병환자의 이 용기와 결단을 예수님은 믿음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41절에 보면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겠습니까? 이 사람의 질병이 너무 심해서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나병을 곧 고쳐주시고 이것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이 질병 때문에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신 게 아닙니다. 다만 이 모든 고통이 시작되게 만든 인간의 죄, 죄 때문에 곳곳에서 상처나고, 무너지고 파괴된 나병환자의 삶, 그리고 이 환자에게 강요된 비참한 삶이 너무 불쌍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환자의 삶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 하는 율법의 규범과, 종교 지도자들의 무능함과 교만이 한탄스러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율법의 규례를 넘어서 버림받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인데, 율법이라는 장벽 속에서 이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 하고 있습니다. 도움을 못 주는 정도가 아니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훨씬 더 많은 짐과 고통을 주었습니다. 율법에서 정한 것을 지키라고 강요할 뿐만 아니라, 율법에서 이야기하지 않음에도, 나병환자가 해야 할 일,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일일이 나열하고, 그것을 지키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질병 때문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럽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인데, 지킬 수 없는 어려운 일들까지 더불어 강요했으니, 나병환자들이 겪게 될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만져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이 나병환자의 병을 고치시는데, 말씀으로만 명령하시고 고치신 게 아닙니다.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라는 말씀처럼,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이것은 나병환자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율법에서는 본래 부정한 몸을 만지는 자는 함께 부정하게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나병환자는 부정한 사람인데, 이 사람을 만지는 사람마저 부정하게 됩니다. 나병환자들은 그 누구보다 이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조차 부끄럽고 조심스럽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으로부터 돌멩이로 맞지 않고, 무시를 받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자기가 부정한 사람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 멀리 떨어져서 말씀만으로 낫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나병환자를 더럽다고 거리를 두고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손을 내밀어 그 부정한 몸에 대시고 깨끗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자 부정한 몸에 닿은 예수님의 몸이 부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더럽고 무서운 병, 나을 수 없어 평생 절망 가운데 살게 했던 그 절망과 저주의 족쇄가 풀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각자 살아온 길이와 과정과 방법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는 모두가 같습니다. 각자가 지고 가야 하는 아픔과 어려운 문제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이 거대하지 않고, 너무 복잡하지 않고, 너무 힘겹지 않다면, 자기의 힘으로 풀어갈 수도 있습니다.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이 안 된다면, 가족이나 이웃이나, 나를 알고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혼자 살지 않고, 마을을 이루고, 나라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논밭의 풀을 매고, 약을 하는 일은 혼자서도 해낼 수 있습니다. 건물 하나를 짓는 일은 혼자서 하기엔 너무 힘들지만, 몇 사람이 힘을 모으면 완성시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는 이렇게 작고 쉽고, 노력한 만큼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일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힘으로 풀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치병처럼 도저히 해결할 수 없고, 풀릴 가능성이 전혀 없는 문제들이 참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밤은 깊고, 개 짖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밤이지만, 마음속은 폭풍우가 몰아치고 요동쳐서, 잠들지 못 하고, 날이 밝을 때까지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이며 내 삶을 계산해 보고, 미래를 그려도 보지만,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것 때문에 더 아파하고, 한숨으로 가득 채울 때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각자 자신에 대해서는 전문가요 박사입니다. 세상에서 그 누가 나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겠습니까? 부모가 나에 대해 나보다 잘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하더라도, 나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나를 사랑하고, 혹은 반대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 누구도 나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자신에 대해서는 박사고 전문가입니다.

 

그럼에도 나 자신이 아무리 계산하고, 노력하고, 고민해 봐도 도저히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는 문제들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나에 대해서는 전문가이니, 전문가처럼 나의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 합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는 박사니, 분명하고 좋은 해결책을 마련하고 싶은데, 시작조차 못 합니다. 내 삶에 대해 전문가인 내가 이리 생각하고, 저리 고민해 봐도, 여기가 꼬이고, 저기가 틀어져버려서, 어떻게 어디서부터 손을 쓰고 노력해 봐야 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습니다.

 

문제를 풀고, 어려움에서 벗어나려 노력한 만큼, 뭔가 가능성과 실마리라도 보여야 하고, 작은 진척이라도 보여야, 그나마 힘들고 어려운 이 삶에서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을 텐데, 이 문제가 저리 얽히고, 이 아픔이 저리 설키고, 그 위에 슬픔마저 억눌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병환자처럼,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야만, 비로소 그로 인한 고통과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희망을 걸 수 없어서, 모든 계산과 노력과 소망을 모두 내려놓고, 절망과 자포자기의 길을 걷기도 합니다. 자기 삶에 대해 더럽다. 저주받았다고 밝혀야 했던 나병환자들처럼, 우리 삶을 저주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약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 누구에게도 내밀 수 없었던 도움의 손길을 받아주실 주님이 계십니다. 나병 같은 우리의 죄까지도 깨끗하게 하시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 누구도 해결해줄 수 없고, 관심조차 없던 우리의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시는 주님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내미는 죄와 절망의 손길을 더럽다고 피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숱한 어려움과 절망 속에서도 잘 버티고 견뎌냈다며 대견해 하십니다. 우리가 처한 여러 가지 아픔들, 고통들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모두가 겪는 문제라고 외면하시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들어오셔서 손을 대심으로써 간섭하시고, 그래서 우리를 절망의 장벽 속에 가두었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랍비들처럼 해결할 수 없고, 행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조항들을 조건으로 내밀어서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라던 것 이상으로 문제와 아픔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에 보이는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의 고통이 평생 해결되지 않는 고통으로만 끝나는 비극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없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게 되고, 아픔이 평안으로 바뀌게 됩니다.

 

나병으로 고통과 절망 속에 자포자기의 삶을 살던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나병으로 문드러지고 터지고 짓눌린 그 몸에 손을 대시고, 고치신 주님이 우리의 처지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한숨과 아픔으로 짓눌리고 무너진 우리에게 손을 대시고 고쳐주십니다. 오직 주님이 우리의 처지를 아시고, 함께하시고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몸과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고, 어려움이 해결됨으로써, 새 힘을 얻고,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