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70528)건강한 신앙인은 교만하지 않습니다(막 2장 13-17절)

청명하늘 2018. 4. 1. 23:45

건강한 신앙인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성경: 마가복음 213-17(55)

찬송: 216(성자의 귀한 몸; 356), 218(네 맘과 정성을; 369)

설교: 20170528. 주일낮예배

 

 

 

바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지난 23일엔 이전 대통령들과 관련된 일들이 있었습니다. 먼저는 직전 대통령이었던 사람이 범죄자로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아직까지는 범죄가 확정되지 않았습니다만, 여러 혐의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또 이날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식이 있던 날이기도 합니다. 2003년에 우리나라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2008년까지 일했습니다. 그리고 2009년 안타깝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23일이 8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두 가지 사건이 한 날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녁이 되자 다른 일이 더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유력 정치인 중 한 사람인 김무성 씨가 보인 모습입니다.

사실 이 일은 국가나 역사에 있어 크게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범죄는 더더욱 아닙니다. 끌고 다니는 것을 캐리어라고 하는데, 그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했다거나, 혹은 그 안에 무기나 마약 등을 몰래 들여온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일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또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만이 아니라, 이 모습이 인터넷에 올라가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도 아주 크게 화젯거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범죄도 아니고, 불법도 아닌데도, 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면서 화도 내고, 손가락질을 하겠습니까? 그 짧은 순간이지만, 그 속에서 나오는 그 사람의 평소 삶과 태도 때문입니다.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라는 게 있습니다. 아무리 가까워도 해서는 안 되는 말, 안 되는 행동이 있습니다. 비록 그 사람의 수행원, 좀 쉬운 말로 하면 비서나 부하 직원이라 하더라도, 짐을 줄 때는, 자기의 짐을 맡아 주는 거니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마치 하인이나 노예를 부리듯, 그렇게 함부로 짐을 던지 듯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정치인입니다. 정치인은 다른 사람들이 곁에서 지켜본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압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기는 지위와 권력을 가졌다고 그렇게 함부로 행동했다면, 다른 사람이 없을 때는 어떻게 행동했을지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 사람은, 긴 시간 동안 여당의 대표적인 지도자이자, 한 때는 여러 대선 후보들 중에서 지지도 1위를 할 정도로 유력한 정치인입니다. 평소에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믿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할 정도라면, 만약 이 사람이 대통령이라는 막대한 권력과 지위에 앉게 되었다면 어떻게 행동했겠습니까? 모든 국민을 자기 아랫사람으로 보고, 함부로 행동하고, 함부로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마 직전 대통령과 크게 다르지 않는 모습으로 정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이란 백성을 다스리는 자리가 아닙니다. 자기 자리가 먼저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왕이 통치하는 방법입니다. 민주주의에서 국민에 의해 뽑히는 대통령은, 국민을 통치하는 게 아니라, 이끄는 것입니다.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국민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의 지위를 믿고 그렇게 거만하게 행동한 사람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지 못 한 것이 감사할 일이지만, 정치에 임하는 사람이 교만하고, 거만하면 어떤 위험을 가져다 주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온다는 것은, 자기의 능력과 자기의 지위와 자기의 경력과 업적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겸손히 서는 것을 말합니다. 바꿔 말하면, 교회는 자기가 이뤄 놓은 업적을 자랑하는 자리가 되어서도 안 되고, 자기의 지식이나, 재산이나, 지위를 자랑하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이 어떤 사람을 만나시는지, 어떤 사람들에게서 등을 돌리시고 외면하시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읽은 본문 바로 앞에서는,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는데, 이것은 단순히 육체의 질병을 고치셨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겪는 모든 질병과 괴로움과 슬픔은 첫 번째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와 욕심 때문에 생겼습니다. 사람으로서는 고칠 수 없는 불치병처럼,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주님께서 외면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로 나아오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불치병으로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치유해 주시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인기와 관심을 목적으로 오셨다면, 이렇게 찾아오는 사람들을 반갑게 맞아하시고, 더 큰 기적을 행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관심과 인기를 목적으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몰려들자, 언제나 그러셨던 것처럼 한적한 바다, 사람들이 없는 곳, 그래서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바다를 향해 가시다, 세관, 요즘으로 보면 세무서 앞에 앉아 있던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 사람의 또 다른 이름은 마태고, 우리가 가진 신약성경 가장 먼저 나오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지금 본문의 사건들이 일어난 지역은 가버나움이라는 곳인데, 이곳에는 세무서가 있었습니다. 이 도시는 다른 나라와의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세관은 바로 이런 무역상품에 대해 세금을 거둬들였습니다. 레위는 이 세관에서 일하는 세리였습니다. 관할 구역에서 세금을 거둬들이는 권한은 로마인들에게 있었고, 이들을 세리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세리라고 불렀는데, 이들 중에는 유대인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 강점되었을 때, 경찰서가 있으면, 소장은 일본 사람이고, 그 밑에 순경 중에는 조선 사람들이 있었고, 세무서가 있으면, 서장은 일본인이 맡고, 세무원 중에는 조선 사람이 있던 것과 같습니다.

 

이 때문에 세리들은 유대인들로부터 가장 미움을 받는 직업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가장 무시하고 미워하는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세리들에 대한 미움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가장 미워하고 천시했던 사람들에는, 어느 시대나 그런 것처럼, 몸을 파는 여성이 여기에 포함되고, 남의 물건을 훔치는 도둑, 그리고 사람을 죽인 살인자였습니다. 그런데 멀쩡한 직업임에도, 세리들이 그렇게 미움과 무시를 받은 까닭이 있습니다.

 

먼저 세리들은,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 나라를 빼앗겼을 때, 경찰들은 정상적인 직업이었지만, 결국 일본의 앞잡이 노릇한다고 여겨져 국민들로부터 크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라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데, 세리들이 정부를 위해 일하고 있으니, 유대인들은 세리들이 민족을 배신하고,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고 여겨 미워했습니다.

 

그렇게 로마의 앞잡이 노릇하는 것만으로도 미워하는데, 세리들은 욕먹을 짓을 더 했습니다. 정해진 세금보다 많이 거둬서 그것을 자기 주머니에 넣은 것입니다. 대곡 마을을 예로 들면, 내야 할 세금이 각자 정해져 있죠? 만일 한 사람이 1년에 내야 하는 세금이 백만 원이면, 세금을 거두는 사람들은 정해진 대로 백만 원만 거둬 가면 됩니다. 하지만 세리들은 주민들에게 이백만 원씩 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백만 원은 정부에 내고, 나머지 백만 원을 자기가 챙겼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미움을 받았을 것인가 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민족과 신앙을 저버린 반역자들로 낙인이 찍혔고, 창기, 죄인들과 같은 가장 악하고 천한 부류로 취급당했고, 심지어는 그 가족들까지도 함께 멸시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갖지 못 하는 권위와 능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도우시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게 하셨던 예수님은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15절 말씀에서처럼, 세리와 죄인들과 자리를 함께 하셨고, 함께 음식을 드셨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전도하려 작정할 때나, 평가할 때 저 사람은 꼭 믿어야 하는 사람인데...”라거나 반대로, “믿는 사람이 저런 직업을 가지면 안 되는데라는 말을 간혹 합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겠습니까? 혹시 저 사람은 선하고 깨끗하게 살고 있으니,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으로 하지 않습니까? 반대로는 저 사람은 신앙인으로서 내세우기 꺼리는 일을 하고 있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있으니까, 저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으로 한 것은 아닙니까?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관에는 항상 조건이 붙습니다. 그것도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판단이며 편견입니다. 하나님의 의도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전적으로 자신의 편견으로 남을 쉽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래서 안 돼!’ ‘저 사람은 저래서 안 돼!’라는 식의 판단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 앞에 큰 교만이요, 죄가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 판단이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이란 율법을 연구하던 사람들인데, 이들 중 일부는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습니다. 자기 민족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앙을 포기하고, 세상과 어울리면서 세상 사람처럼 살 때도, 이들은 미련하리만치 순결한 신앙을 고집했습니다. 좀 더 편하고 부하게 살고자 하나님과 율법을 버린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며, 오직 말씀에 따라, 말씀대로만 살겠다고 목숨을 걸고 다짐하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쉽고 편한 길 놔두고, 바른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이 모습은 칭찬을 받아 마땅합니다.

 

문제는 이들이 점차 변질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든 사람을 자기들의 가치관, 자기들의 생각, 자기들의 입장에서 판단했습니다. 이들의 시작은 하나님의 가치관,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자고 한 것임에도, 나중엔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의 것을 넣어서, 자기들의 눈으로 보고, 자기들의 머리로 계산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의 눈으로 남을 판단하고 있음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예수님과 어울리고 식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표현입니다.

 

본문 15,16절에서 세리와 죄인들이나 죄인 및 세리들이라는 표현이 3번 나오고 있습니다. ‘세리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세관에서 세금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민족의 반역자, 사기꾼 등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죄인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들이라고 하면, 죄를 지어서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벌금형에 처해지거나 처벌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죄인들이란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글자대로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매주 금식하는 날을 정해놓고 빠짐없이 지켰고, 안식일에는 아무일도 하지 않고, 십일조를 하면 1원도 안 틀리고 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율법에 대해 관심도 없고, 안식일이 뭔지, 금식이 뭔지에 신경조차 쓰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런 사람을 무시하는 의미를 담아서 땅의 백성이라고 하거나 죄인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도 아니고, 사회가 정한 법을 어기고, 남에게 피해를 끼쳤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바리새인들, 율법주의자들은 폐쇄적이고, 가식적으로 살았습니다.

 

요즘으로 생각하면,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금식, 헌금, 헌신, 기도를 철저히 하는 사람들이, 교회도 안 나오고, 신앙생활에 관심도 없는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17절에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모습으로 생각하면, 헌금 잘 하고, 기도 많이 하고, 교회의 전통을 잘 지키는 등의 종교생활을 잘 하는 사람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삶의 여러 가지 질고와 고통으로 인해 낙망해 있는 사람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받은 여러 가지 상처로 어깨가 내려가 있는 이들,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인정하며, 주님의 도움을 바라는 이들을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만의 철저한 편견과 오만으로 채워져서, 자신들만이 의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메시아이신 예수님으로부터는 외면당하고 말았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중한 병에 걸렸음에도, 자기들이 마치 의사라도 되는 양 착각 속에 멸망의 길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훌륭한 의사로서, “너희는 죽을 병에 걸렸다. 치료를 받아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심에도, 그들은 내 몸은 내가 더 잘 안다는 식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온전한 구원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스스로를 최고라고 생각하는 자들의 것이 아니라, 자기의 무가치함과 무능함을 스스로 인정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자들의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잃어버린 자들, 방황하는 자들, 가난한 자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자들, 주리고 목마른 자들을 부르셔서 하늘의 복된 소식을 전해 주시고 그들을 위로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에는 자기중심적인 편견이나 오해가 없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을 기준으로 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생각 자체가 이미 병에 걸렸음을 알려주는 증상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우리의 기준을 내세우고, 그들의 신앙과 믿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하며,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면, 우리는 많은 생명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고, 또 함께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주시는 삶속에서, 교만과 남을 정죄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겸손과 온유로, 주님의 능력을 의지함으로써 행복한 삶을 누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