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모습이 어울릴 때입니다
성경: 마가복음 2장 18-22절(신 56쪽)
찬송: 405장(주의 친절한 팔에; 통458), 285장(주의 말씀 받은 그날; 통209)
설교: 20170604.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사자성어 중에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자대로 해석하면, ‘배에 표시하고 검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중국의 초나라 시대에 어떤 사람이 아주 귀한 칼을 품고 배를 타고 양자강을 건넙니다. 한참 배를 가다 그만 품고 있던 귀한 칼을 강물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칼은 무거우니 당연히 물속으로 가라앉겠죠. 깜짝 놀란 이 사람이, 얼른 다른 칼을 꺼내서 보검이 떨어진 배의 자리에다 표시를 합니다. 곁에 있는 사람이 뭐 하느냐고 묻자, “이곳이 칼을 떨어뜨린 곳입니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항에 도착하자, 칼을 떨어뜨린 곳이라고 배에 표시해 둔 자리 밑으로 들어가 보검을 찾으려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모든 사람들이 이 사람의 행동들을 비웃었습니다. 이것을 ‘각주구검’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왜 강물에 빠진 칼을 찾기 위해 배에 표시를 하고, 항구에 도착해 칼을 찾으려는 사람을 비웃었겠습니까? 이 사람이 칼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귀하게 여기는 칼은 사실 배에 빠진 게 아니라, 바다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강물에 빠진 칼을 찾으려면, 배에 표시할 게 아니라 강의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배는 물 위에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물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거나, 노를 저어 다른 곳으로 가게 됩니다. 배는 움직이고, 칼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물에 빠진 칼을 찾기 위해서는 배의 자리에 표시할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칼이 빠진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 귀한 모자가 차 밖으로 날아갔습니다. 이 모자를 찾기 위해서는, 차에다 표시할 게 아니라, 그곳이 어디인지를 기억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배에 표시해 칼을 찾는다’는 뜻의 ‘각주구검’이라는 말은, 시대나 상황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낡고 보수적인 사고방식만을 정답으로 생각하고 고집하며 사는, 완고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뜻합니다.
지난달에 우리나라의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대선이 있었죠? 대선만이 아니라, 크고 작은 선거만 있으면, 국민들이 많이 나뉩니다. 요즘엔 그나마 조금씩 옅어지는 것 같습니다만, 가장 먼저는 지역에 따라 지지하는 당과 후보가 다릅니다. 지역에 따라 진보적인 후보와 당을 지지하기도 하고, 바른 보수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보수적인 후보와 당을 지지하는 지역도 있습니다.
지역으로 진보와 보수를 지지하는 지역을 나눌 수도 있지만, 세대에 따라 나뉘기도 합니다. 젊은 세대는 변하고 발전하는 것을 원하고, 나이든 세대는 옛것에 대한 추억과 더불어 안정을 추구한다고 합니다. 또 나이가 들어가면서 성향이 바뀌기도 합니다. 자꾸 변화를 추구하던 사람도 나이가 많아지고, 생활이 안정되면, 변하고 바꾸는 것보다는, 있는 대로 지켜가기를 바라는 성향으로 바뀌게 됩니다.
신앙생활에도 자칫 예전의 것이 무조건 옳고 좋다며, 옛것만을 고집하는 각주구검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상황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었으니, 그에 따라 바꿀 것을 바꾸고, 지키고 간직해야 하는 것이라면, 어려움을 감수하고서라도 지켜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지혜롭게 하지 못 하고, 꼭 지켜야 하는 것은 어렵다며 피하거나 버려 버리고, 버리거나 바꿔야 하는 것을 보물이라도 되는 양 끝까지 고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 지혜롭게 한다는 것은, 무조건 옛것이 옳다며 지켜 나아가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새것이 좋다며 옛것을 모두 바꿔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먼저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지혜롭게 분별한 것을 지키거나 바꿔 갈 만한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지킬 것과 바꿀 것을 분별하지 못 하고, 바꿀 것이 정답인 것처럼 여기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하고, 이것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등장합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전국민이 금식해야 하는 날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민족 전체가 금식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전국민이 금식해야 하는 날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요한이라는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데, ‘요한’이라고만 말하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이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주었다고 해서 흔히 ‘세례 요한’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친척이기도 하고,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는데,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못 하자, 여러 가지 쓴소리를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이런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을 받아들여 제자가 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 하는 사람들을 보고 실망해서, 자기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신앙생활하겠다고 따로 무리를 짓고 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전국민이 금식한 게 아니고,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했다는 것은, 요한의 가르침을 옳다고 생각한 사람들, 그리고 평소 다른 사람들보다 철저한 경건생활을 통해 구별된 생활을 하겠다는 다짐하는 바리새인들이, 자기들 나름대로의 가르침과 전통에 따라 금식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만 놓고 보면, 훌륭하고 칭찬을 받을 만해 보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아시는 예수님으로부터도 마땅히 칭찬을 받을 만한 일처럼 보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도 역시, 예수님이 이것을 인정하시고 칭찬해 주시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좀 더 나은 신앙처럼 보이고, 좀 더 거룩해 보이는 금식의 문제를, 예수님께서는 경건의 문제가 아니라, 새것과 옛것이라는 관점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는다고 항의하는 세례 요한의 제자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 게 경건한 신앙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라 여기고, 매주 두세 끼를 금식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경건한 신앙의 모습이 되지 못 한다고 답하셨습니다.
금식이란 단순히 한 끼 식사를 굶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억제함으로써, 마음의 밭을 갈아엎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농사를 지으니 잘 아시죠? 작물을 심을 시기만 되면, 무작정 씨앗을 논밭에 뿌리거나, 작물을 옮겨 심는 것 아니죠? 씨앗을 뿌리거나 작물을 옮겨 심기 전에 반드시 거치는 과정이 있습니다. 논밭의 땅을 갈아엎는 것입니다. 요즘이야 기계로 하니, 그 수고와 어려움이 덜하긴 하지만, 직접 괭이나 삽, 아니면 소로 이 작업을 할 때는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비용과 시간이 많이 필요한 과정입니다. 힘들고 귀찮고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이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농작물이 잘 자라고, 좋은 것들을 수확할 수 있습니다.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쟁기질이 논밭을 갈아엎는 것처럼, 금식은 단단해지고 굳어버린 마음의 밭을 갈아엎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칠고 험한 세상에서 살다보면, 우리도 세상을 닮아갑니다. 삶과 생각이 굳어집니다. 메마르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땅에 씨앗이 싹을 틔우지 못 하고, 작물이 제대로 성장을 못 하는 것처럼, 세상을 닮아 마음과 생각이 굳어진 영혼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늘의 것이 좋은 열매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향하고, 세상을 닮아가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 굳어 있는 것을 새롭게 한다는 것이 바로 금식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새로운 마음, 새로운 모습을 원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목숨을 걸 듯 하나님께 간절하게 매달림으로써, 거짓과 미움으로 굳어진 마음을 뒤집어 갈아엎는 것, 이것이 바로 금식의 참된 의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이렇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간절함과 열심이라는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것을 좋은 것으로 유지하지 못 하고, 오히려 옛것을 지키는 전통의 하나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고, 판단하는 심판의 도구로 변질시키고 말았습니다. 금식을 단지 끼니를 거르는 것으로만 보는 옛 생각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마음을 갈아엎는 새로운 금식으로 성숙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전에 사용하지 않던 것, 전에 경험하지 않았던 것을 새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새것에는 옛것에 비해 여러 가지 불편함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일단 옛것에는 있는 익숙함이, 새것에는 없습니다. 새 신발을 사면, 멋져 보이지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새 신발을 신으면 자기의 발과 모양이 달라서 피곤하고 많이 아픕니다. 새 신발을 신고 몇 시간 걸으면 거의 틀림없이 물집이 생기고, 상처가 생깁니다. 이처럼 새것은 낯설고 편하지도 않습니다. 새것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다시 시간과 노력이 투자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옛것, 내가 익숙해진 것이 옳다는 생각에 빠짐으로써, 새것에 대해 편견을 갖게 됩니다. 옛것을 통해 새것을 보게 되니, 새것은 뭔가 잘못된 것 같고, 부족해 보이고, 나에게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옛것이라는 전통과 익숙함 때문에, 새것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옛것이라는 좋은 전통이 오히려 장애가 되어, 그 너머에 있는 새것을 보지 못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질서를 주신 예수님이 오셨지만, 옛것에 빠진 이들은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도, 사랑도, 치유하시는 능력도 알아보지 못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회당이나 길거리 등 사람들 앞에서 행하신 경우가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보고,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에도 옛것에 빠진 이들은 유독 예수님의 능력만 알아보지 못 합니다. 옛 전통이라는 규율에 빠진 바리새인들도, 율법에 빠진 서기관들도, 제도와 권력에 빠진 제사장들도 그랬고,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금식하는 요한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새 것을 볼 수 없도록 가리는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모든 것을 해석함으로써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살았습니다. 자기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이 다 정죄의 대상이 됩니다. 옛것을 지키고 있는 자기들을 긴장하게 하고, 수고하게 하고, 힘들게 하는 새로운 모든 것은 잘못되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새로운 시대에는 삶의 방식과 생각하는 방식이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함을 담아 기도하는 금식도 중요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함께 먹고 기뻐하는 잔치가 한참일 때, 자기는 금식하고 있어서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말해, 잔치를 망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옷에 구멍이 나면 다른 천을 대서 구멍을 메워야 하지만, 헤져서 버릴 옷가지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새 옷이나 새 천에서 잘라 메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때가 적절하지 못 하면, 남의 잔치를 망칠 수 있고, 방법이 잘못되면 좋은 것을 버리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람이며, 예수님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먼저 하늘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먼저 찾는 사람으로 살라 하십니다. 또 사랑과 용서, 포용, 생명을 위해 살라 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님의 제자로 신앙생활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 시대에 맞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정답으로 삼고 예수님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특징과 모습이 나타나야 하고, 예수님의 성품이 우리의 삶 곳곳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고 말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시간보다는, 세상 속에서, 세상의 방식에 따라 살아가는 시간이 비교가 안 될 만큼 깁니다. 그만큼 우리는 세상과 닮아있고, 우리의 걸음은 세상을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는 예수님이 주시는 새 질서대로 이것을 뒤집고, 하늘의 것과 영생을 향한 걸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더불어 예수님이 사랑과 진실과 용서라는 새 질서를 주신 것처럼, 우리의 삶의 자취가 주님의 것과 닮아 가야 합니다. 기도와 예배와 봉사도 복된 일이지만, 그것이 남의 신앙까지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은 예수님의 시대에 맞지 않습니다. 나의 작은 죄와 실수까지 찾아 회개하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은 어울리는 것이나, 이를 이용해 남의 작은 것까지 용서하지 못 하는 것은 예수님의 때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어떤 죄도 용서하시는 잔치 마당에서, 남의 사사로운 죄를 들추고 다투고 미워하는 것 또한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며, 예수님의 잔치를 망치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온갖 상처로, 슬픔과 고통으로 곧 쓰러질 사람에게, 단단하고, 융통성도, 아량도, 포용도 전혀 없는 내 기준을 들이대는 것은 자신도 힘들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날을, 그리고 이에 어울리는 새로운 생각, 새로운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때에 맞지 않는 일들이 많습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자칫 옛것에 익숙해지고, 옛것만 옳다고 완고한 신앙으로 잘못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 하는 극히 이기주의적인 태도, 내가 무조건 옳다고 말하는 교만, 모든 잘못은 무조건 남의 것이라고 말하는 미움, 누구를 대할 때마다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거친 마음, 이런 모든 것들은 예수님의 시대에,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에 따라, 내 이웃을 용서하고, 화합하고, 함께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자녀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것인지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혹시 누군가에 대한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면, 다시 돌아보고, 예수님의 시대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화해와 사랑, 포용의 새 시대를 삶으로써, 매일 주님의 은혜와 복으로 채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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