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한 것들을 버려야 거룩해집니다
성경: 마가복음 3장 1-6절(신 56쪽)
찬송: 210장(시온 성과 같은 교회; 통245), 538장(죄짐을 지고서 곤하거든; 통327)
설교: 20170618. 주일낮예배
무더워지고, 비가 오지 않아 어려움이 많은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옛날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을 보면, 큰 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죽이는 벌을 내리는 경우가 많죠? 요즘은 아무리 큰 죄를 저질러도 사형을 시키지 않는 나라가 많고, 혹시 사형시키는 경우에도 최대한 고통 적도록 가장 빠른 방법을 이용합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사형수에 대한 인권에 대한 관심은 없고, 고통을 주고 죽이는 것에 목적을 두었기 때문에 잔인하고 무서운 방법들을 이용했습니다.
큰 죄인을 사형시키기 위해 많이 이용하는 방법이 사약을 먹이는 거죠? 드라마에서는 대접에 시커먼 사약이 있고, 죄인이 이것을 마시고 나면, 피를 토하며 괴로워하다가 죽는 장면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물론 우리가 TV를 통해 보는 것은 사람들이 연기한 거라, 색과 모양만 그렇지 사실은 아무리 먹어도 사람이 위험해지지는 않겠죠? 하지만 이런 장면을 보면서 간혹 이런 생각해 보셨어요? ‘요즘처럼 과학이나 약에 대한 지식이 발달한 때도 아닌데, 어떻게 저런 약을 만들었을까? 사약은 어떻게 만들까?’
그런데 언젠가 한 친구가 사약에 대해 재밌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죄인을 죽이기 위해 먹인 사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몸에 해로운 약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람의 몸에 좋은 성분들인데 좋아도 너무 좋아 사람이 못 버틸 정도라, 그것을 마신 사람이 못 버티고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해되세요? 몸에 좋다는 것은, 그것을 먹으면 병이 낫고 몸이 건강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분이 좋긴 한데 그것을 먹으면 아프거나 죽는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말이죠?
그래서 자료를 찾아봤더니, 사약의 재료는 국가기밀이라 기록이 안 남아 있고, 다만 부자(附子), 비상(砒霜), 천남성(天南星) 등의 몇 가지 약재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잘 아시는 것들이죠? 주로 한방에서 약을 지을 때 많이 사용되던 것이죠?
부자라는 약초는, 한기를 제거해 통증을 멈추게 하고, 충격이나 허탈로 위험한 상태일 때 사용하면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비상은 옛날에는 학질이라 불렸던 말라리아 전염병을 고칠 수 있고, 제대로 된 뜻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풍담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천남성이라는 약재는, 간질, 경련, 관절염, 구토 등에 많이 쓰인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병으로 겪는 질병을 낫게 하고, 회복시켜 주는 좋은 약재들이지만, 그럼에도 이것들이 사람을 죽이는 약물로도 사용된 까닭이 무엇일까요? 친구의 말처럼, 몸에 웬만큼 좋아야 하는데, 그 정도를 넘어서 그럴까요? 그렇지 않죠? 이 약재들이 모두 독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독성들을 제거하고 사용하면, 그것이 병 때문에 겪는 고통을 없애주고, 사람을 살리는 약이 되지만, 이 독성들에 대해 잘 모르거나, 제대로 제거하지 않고 넘어가면, 이것들은 질병을 잡는 약이 되지 못 하고, 사람을 잡는 사약이 되고 맙니다. 건강하게 하는 약이 아니라, 사람에게 피해와 고통을 가져다주는 독약이 되고 맙니다.
이것을 통해, 같은 시기에, 같은 땅에서 나고 자란 재료를 이용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만들고 이용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위해 어떻게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결과를 만들어 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모습이 오늘 본문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지난 주일 설교의 본문인, 오늘 본문 앞 마가복음 2장 23-28절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란 단지 하루를 쉬는 날이 아니라, 인간이 지은 죄 때문에 멀어진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회복의 길인 것을 기억하고, 이것을 훈련하는 날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사건도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밀밭에서 제자들이 밀이삭을 베어 먹는 것으로 바리새인들이 비난한 까닭은 그날이 바로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었고, 오늘 본문에서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 하고, 죽이려 하는 까닭도 역시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시고 도우신 것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는, 가장 거룩하고 깨끗한 여건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먼저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때는 한 주 중에서 안식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창조하신 후 일곱째 날을 안식하시며, 우리들도 이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날을 특별히 선택하시고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다른 평일보다는 분명 거룩한 날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이삭을 베어먹는 것으로 비난하고, 예수님이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신 것을 비난하고, 이 일을 계기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한 까닭도,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니라, 거룩한 안식일을 어겼다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오늘 본문의 사건이 있던 곳은 회당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어디를 가든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흔히 ‘성전’으로 부르곤 하지만, 이스라엘에 성전은 전국에 오직 예루살렘에만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 한 곳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매주 제사하러 갈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곳곳에 회당이라는 곳을 만들었습니다. 요즘으로 보면, 마을 회관이자 교회 역할을 하던 곳입니다. 회의도 하고, 공부도 가르치고, 성전이 너무 멀어서, 가지 못 하는 사람들이,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곳이니 거룩한 곳입니다.
이렇게 거룩한 날, 거룩한 곳에, 거룩하다고 남과 비교하며 자랑하던 사람들, 자기보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 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던 바리새인들이 등장합니다. 장소도 그렇고, 있어야 하는 사람도, 시간도 가장 거룩한 모습을 기대할 수 있는 여건들이 모두 마련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거룩한 여건들이 마련되었지만, 그 속에서 일어난 일들은 어떻습니까? 거룩합니까? 하나님의 그 거룩하심을 닮아, 그 곳 그 자리를 통해, 사랑과 섬김과 기쁨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구별하시고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날, 하나님의 복이 내리고 있습니까?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죽음을 향해 가는 이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순종을 통해 실천되고 있습니까?
좋은 여건들이 모두 준비되었음에도, 그 날에 그 자리에서 그들을 통해 나오는 것은 전혀 거룩하지 않습니다. 거룩하지 못 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모습들만 가득합니다. 인간의 교만이 만들어 내는 거짓과 시기와 무지가 거룩한 날 거룩한 곳을 미움과 시기와 죄가 가득한 곳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잘못 만드셔서 그렇습니까? 그 곳에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 했기 때문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는 변하지 않고 거룩한 것입니다. 때와 장소는 거룩했지만, 그곳에 있던 바리새인들이 거룩하지 못 합니다. 이들이 자기들 속에 있는 교만과 시기라는 독을 제거하지 않고, 그 자리에 나아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댑니다. 나는 잘해 보려고 노력했는데, 상황이 안 좋아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기에는 너무나 환경이 너무 좋지 못 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의 숨은 의미는, 상황과 여건이 좀 더 좋아지면 내가 더 거룩해지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변해서, 다르게 말하고 행동하면, 나도 그렇게 하지 않고, 깨끗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과 인내심을 가지고 대하겠다고 뜻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핑계처럼, 모든 것이 좋은 때에 있었던 본문의 사건을 보면, 가장 큰 문제는 여건이나 상황이 아니라, 우리 속에 독성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 가득한 독을 제대로 모르고, 모르니 그 독성을 품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2절에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6절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일 것으로 보입니다. 안식일에 바리새인들이 어떤 마음으로 회당을 향해 가고 있었는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키기 위해서는, 밀이삭마저 베지 말아야 한다는 안식일에, 예배와 말씀이 행해지는 회당에 가면서 이들의 마음가짐이 어땠습니까? 안식일에 회당을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처럼 거룩해 보입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처럼 겸손하고 온유합니까? 전혀 그렇지 못 합니다.
이들이 회당을 향해 재촉하고 있는 발걸음은 누군가를 올무와 함정으로 몰아넣어 죽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 속에 숨겨진 속마음은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돕고, 격려하는 마음이 아니라, 치명적인 독을 잔뜩 품고 사냥감을 향해 소리 없이 움직이는 독사처럼 보입니다.
이들은 인간의 모든 문제와 아픔을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 회당, 병자라는 시간과 장소, 대상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모든 여건을 마련한 후에 이들이 원한 것은, 예수님이 그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해치고자 하는 이들의 생각이 어느 정도까지 악해졌는지 6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헤롯당과 함께 예수님을 죽이자는 모의를 했다고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대로 따르고, 구별되기를 바라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헤롯당이라는 한 파당과 함께 계획을 짰습니다. 성경 역사를 보면, 바리새인과 헤롯당 사람들은 절대 함께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모인 헤롯당을 가장 싫어했습니다. 세상적인 권력과 이익을 위해 사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자기들도 병들고 신앙을 지킬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정치를 멀리하고, 심지어는 먹고 사는 것까지 달리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평소 원수처럼 지내던 이들이 손을 잡았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음모를 위해 자기들의 신앙도, 가치도, 자존심도 모두 버리고, 헤롯당과 함께 모의한 것입니다.
2장 마지막 부분에서, 당시 시간으로 따지면 몇 시간 전에 안식일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으로 들어가시면서, 사람들이 변화되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들었어도, 악했던 이들은 여전히 악했으며, 안식일을 사람을 죽이는 일에, 짐을 지우는 날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죽일 음모가 꾸며진다는 것을 아셨음에도, 자신을 향해 맹수의 이빨을 드러내고, 독사의 혀로 무장한 이들이 두 눈 시퍼렇게 노려보고 있는 그 자리를 피하지 않고, 다시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에, 주님께서 주인이 되신 회당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다시 알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거룩한 날, 거룩한 곳을 향한 마음으로 나아왔습니까? 우리는 사람을 살리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그 마음을 담고 이 자리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으로 예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로 힘써 지키고 있습니까?
우리는 시간을 정하고 교회에 모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보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생각으로 교회에 나오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배하러 나와야 하는 곳에 예배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그곳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겸손한 마음이 없으면, 생명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알면서도, 죽이기로 모의한 바리새인들의 그 자리처럼, 주님을 부정하는 자리, 주님의 것에 맹수의 이빨을 드러내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 아픔과 상처가 있는 이들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간구하는 자리가 되지 못 하면, 이 예배처, 기도처가 사람을 더욱 미워하게 만들고, 더욱 멀어지게 만드는, 미움이 시작되는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에 대해서는 귀를 막음으로써 주님의 뜻대로 살려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원하는 대로 주님을 움직이려 하는 지독한 마음을 갖게 되면, 거룩해야 하는 곳이 우리의 악한 본성에 따라 가장 추하고, 살기 가득한 곳이 될 수 있습니다.
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생각과 행동이 더럽고 추한 사람들을 보시고 탄식하시고, 노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노하신 것은, 예배처가 화려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예배를 많이 드리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거룩한 날, 거룩한 곳에, 그에 어울리는 마음으로 나아와야 함에도, 미움과 교만과 시기라는 독을 제대로 제거하지 않고 나아왔기 때문입니다. 그 독 가득한 마음으로 나아와서, 거룩한 날, 하나님의 거룩한 자리를 죽음과 타락의 자리로 변질시켰기 때문입니다.
바쁜 일상을 멈추고 주님의 자리에 나아온 우리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나아왔습니까? 거룩한 날, 거룩한 자리에, 그에 합당한 거룩하고 깨끗한 마음,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왔습니까? 거룩한 주일, 거룩한 교회는 변함없이 거룩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의 마음가짐에 따라, 이 날이 주님의 복을 받는 날이 될 수 있고, 반대로 주님이 외면하시고 떠나시는 자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사람을 살리는 날, 이웃을 세우는 날이 될 수 있고, 우리의 독으로 남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거룩한 날, 거룩한 자리는 변하지 않지만, 우리 마음에 따라 모든 것이 함께 거룩할 수도 속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독을 알고 철저히 제거해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께 나아와 예배하는 자리에서,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나쁜 것들을 제거하고, 겸손히 주님과 이웃을 섬기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써, 우리의 삶과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전해지고, 함께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채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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