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안에서, 주님의 눈으로
성경: 마가복음 3장 13-19절(신 57쪽)
찬송: 435장(나의 영원하신 기업; 통492), 292장(주 없이 살 수 없네; 통415)
설교: 20170702.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이번 문재인 정권은, 이전의 다른 정권과는 다르게 시작되었습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약 80일 이후에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이때에 대통령 인수위원회를 만들어서 대통령이 취임해서 먼저 할 일, 또 함께 일할 사람들을 준비하고 뽑습니다. 하지만 이번 대통령은 당선된 다음 날부터 임기를 시작해서 인수위원회를 구성할 시간이 없었고, 지금까지도 장관 임명이 덜 되었습니다. 임명이 안 된 부처의 후보자들에 대한 인사 청문회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정부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인사청문회를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시던가요? 먼저는 참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청문회를 한두 시간하고 끝나는 것도 아니고, 아침에 시작해서 새벽까지 하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며칠 계속됩니다. 편하게 앉아서 3일을 보내도 힘든 일인데, 어떻게 해서든지 트집을 잡으려 혈안이 된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아주 하찮은 일들은 물론 몇 십 년 전에 있었던 개인적인 일도 모두 들추어냅니다. 웬만한 성격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큰소리를 내거나 싸우고 그만둘 법한 상황임에도, 그 긴 시간 비난과 조롱을 견뎌내는 것이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그런 과정에서 좋은 인물 찾기가 너무 힘들다는 생각도 듭니다. 정부의 장관이나, 주요 기관 수장의 후보로 오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입니다. 후보자로 오른 사람들 대부분이 공부도 많이 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능력을 인정받은 것은 물론, 큰 흠과 결점이 없다고 판단된 사람들입니다. 법적으로도 큰 문제가 없어야 하고, 도덕적으로도 기본적인 검증을 거친 후에야 후보자에 올랐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의 지난날들을 파헤치면, 흠과 문제가 전혀 없는 사람을 찾기 힘듭니다. 그 동안 이들이 성공하고, 높임을 받은 까닭은, 삶의 과정에서 불법과 편법을 행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법의 테두리를 잘 피하거나, 잘 숨겨왔기 때문이라 생각될 정도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까다롭고 힘든 인사청문회를 거치는 걸까요? 좋은 일꾼을 뽑아야, 일을 잘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절차가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후보자들에 대한 검증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지난 대통령처럼,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사명을 잊어버리고, 자신과 자기 사람들만을 위하느라 나라와 국민을 희생시킬 수 있습니다. 좋은 사람을 뽑지 못 하면, 대통령과 정부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일해서,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혼란과 손해를 더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장관이나 일꾼이 된다 하더라도 그 임기는, 대통령의 임기인 5년 이상이 못 됩니다. 3일만에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경우도 있었고, 가장 길어도 5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대 5년에 불과한 임기임에도, 나라와 국민들을 이롭게 하고, 잘되게 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절차를 통해서라도,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임기가 몇 개월에서 몇 년에 불과함에도 자리에 맞는 좋은 일꾼을 뽑는 것이 중요하다면, 평생 더 나아가서는 영원한 시간을 좌우할 수 있는 일꾼이라면 어떨까요? 어느 자리에 누구를 두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더 크게 달라지게 됩니다. 몇 개월 임기라고 하면, 좋은 일꾼이라고 해서 해낼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고, 나쁜 일꾼이라고 해도, 역시 만들어 내는 손해가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임기가 길어질수록, 어떤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있느냐에 따라, 그 차이는 더 커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만들고 세우는 과정에서 들여야 하는 노력과 수고는 훨씬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시간의 길이와 양으로 비교하면, 몇 개월, 몇 년 일하는 세상의 일꾼이나, 정부 장관들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영생을 위한 일꾼이라고 하면, 세상의 일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능력이 뛰어나야 할 뿐만 아니라, 흠이나 잘못이 없는 사람이어야 하는 게 우리의 계산이고, 우리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것을 보면, 이같은 우리의 계산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은 많은 제자들을 두셨지만, 매일 함께 생활하시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우신 제자는 열두 명입니다. 예수님의 직계 제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열두 명의 제자 중에서, 나중에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가 빠지고, 그 자리를 맛디아가 들어가고, 또 예수님을 직접 만나거나 함께하지는 못 했지만,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열심히 감당한 바울을 포함해서 이들을 ‘사도’라고 부릅니다.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배시간마다 이용하고, 또 우리 신앙에서 기준이 되는 사도신경이 바로 이들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이들이 주님과 함께하면서 듣고, 보고, 배웠던 것들을 기억해서 다음 제자들에게 이어주기도 했고, 직접 성경으로 기록했습니다. 사도들이 없었거나, 성경과 신앙을 전해주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지금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듣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만큼 기독교 신앙과 역사에서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과정과, 제자들의 모습들을 보면, 사도들이 갖는 중요성에 비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13절에서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산이란 사람을 만나고, 가르치고 함께하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방식대로라면, 능력 있고, 똑똑한 일꾼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산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 사람의 계산과 생각을 가르치는 산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산 아래에서 능력 있고, 똑똑한 사람들 중에서 제자들을 부르신 게 아니라, 산 위에서 부르셨습니다. 세상적인 능력이나 조건을 보고 뽑으신 게 아니라, 인간의 능력과 조건에서 물러나시고, 철저히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맞추어 뽑으셨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의 면면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도 아까울 정도로 부족해 보입니다. 차라리 좀 더 나은 사람들, 재능이 더 많은 사람들을 제자들로 뽑으셨으면, 예수님의 제자, 하나님의 일꾼들이라는 이름에 어울릴 것 같습니다.
17절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형제인데, 이 둘에게는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주어졌습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들 중에서도, 심한 사람들에게 ‘성격이 불같다’라고 하는데, 야고보와 요한은 그 정도를 넘어서, 천둥소리 같았다는 뜻입니다. 이들의 성격이 얼마나 급하고 사나웠는지가 누가복음 9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가지만, 그곳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54절)라고 말해서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55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불로 태워죽이겠다는 것을 내뱉을 만큼, 자기 입과 성격을 제어하지 못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베드로가 아닌 다른 시몬에 대해서는 ‘가나나인’이라고 소개되었습니다. 이것은 가나안이나, 가나 출신 시몬이라는 뜻이 아니라, ‘열심’ ‘열정’을 뜻하는 ‘카나’에서 나온 말로서, ‘셀롯당’에 소속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6장 15절에서, 제자들의 이름을 기록할 때, 표준새번역에서는 ‘열혈당원’이라고 풀이했습니다.
열혈당원이란, 주일오후예배 시간에도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을 벌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강점기를 겪을 때, 무기와 힘으로 독립하려 애쓰는 무장독립군처럼, 품에 넣어가지고 다닐 수 있는 ‘시카’라는 칼을 가지고 다니면서, 로마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암살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의 직업은 세리였고, 세리들은 로마를 위해 일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미움을 받은 직업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름 아래 모인 사람들이지만, 한 사람은 로마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런 사람을 죽이러 다니는 사람입니다.
또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나서기를 좋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속에 있는 생각을 거르지 않고, 나오는 대로 내뱉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 중에서 우두머리 노릇하기를 즐겨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도마는 3년 6개월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끝까지 믿지 못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조차도, 그것을 믿지 못 했습니다. 또 가룟 유다는 3년 6개월 예수님을 따라다닌 후, 결국 스승인 예수님을 팔기로 결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외의 다른 제자들도 역시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보기에도 하나같이 부족하고, 문제 많고, 성격 모난 사람들이 만나 3년 6개월을 함께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뿌리부터 얽히고설킨 갈등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갈등과 다툼이 심해지고, 그래서 이들이 가는 곳마다 미움과 분열과 문제가 커지지 않을 것 같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생각과 계산과는 정반대로, 미움과 갈등이라는 폭탄을 안고 사는 제자들이 모여서 함께했더니, 오히려 모나고 부족했던 제자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해지고 채워졌습니다.
성격이 천둥처럼 급하고 모났던 요한은 이후에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참을성 많고, 성숙해졌습니다. 요한복음을 비롯해, 요한일서 3장 16절의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는 말씀처럼, 형제와 이웃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릴 만큼 성숙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내 없는 사랑이 없는 것을 생각해 보면, 천둥처럼 급했던 요한의 성격이 주님 안에서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형제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릴 만큼 참고 성숙해졌습니다.
로마를 위해 일하는 마태는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마태복음을 기록했고, 나서기를 좋아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던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며, 죽음마저도 겸손하게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합심을 통해, 지금 우리는 무엇을 고백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고, 말씀을 읽고 듣고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머물렀더니, 부족한 것이 채워지고, 원수 같은 사람들도 서로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없었으면, 서로 자기 것을 내세우고 고집하느라 싸우고, 그러다가 모두가 함께 다치고 망하고 말지 않았겠습니까? 로마를 위해 일하는 마태와, 로마를 극히 싫어하는 시몬이, 예수님의 안에서가 아닌 세상에서 서로 만났으면 둘 중 하나는 분명 죽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의 생각과 판단으로는 극히 부족해 보이지만, 그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예수님 안에 있었기 때문에, 사도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오고, 제자로서 성숙해지고 온전해지는 이 과정들을 보면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다른 교인들을 봐야 하는지, 각자 자신은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 각자는 자신이 주님 안에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저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이 신앙을 가졌다는 것을 보장하지 못 합니다. 예배하고, 기도도 하고, 찬양도 하고, 모임도 많이 가질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안에 주님을 향한 마음도 없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지켜 행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는 이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로서 3년 6개월 동안 매일을 함께 먹고, 자고, 기적을 눈으로 확인했고,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들을 매일같이 들었으며, 재정까지 담당할 정도로 예수님의 신뢰를 받았지만, 자기의 욕심을 위해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가 이것을 증명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겉모양과 말로만 주님 안에 머무르고 있지 않는지, 중심이 주님의 말씀에 따르려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 앞에 섰을 때, 복과 상급이 아닌, 저주와 벌이 있게 됩니다. 주님 안에 있지 못 하면, 주님으로부터 아무것도 약속받지 못 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하는 교인들을 볼 때는, 반드시 주님의 눈과 마음으로 봐야 합니다. 우리 눈과 계산으로 보면, 함께 예배하는 모두도 역시 부족하고 흠이 많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행동하나?’ 하는 모습들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말하나?’ 할 법한 일들도 행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역시 하나님이 부르시고, 주님의 일을 함께 하도록 하시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비록 우리의 눈과 계산으로는 부족하고, 문제 많고, 흠이 많을지 몰라도, 주님 안에서 참고 기다리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 안에서 기다리고, 훈련을 받자,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로워지고, 성숙해진 것처럼, 우리 곁에 있는 이들도 역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하고 성숙해지고,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잘 감당하는 사람들로 바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 다르고, 여러 가지 부족하고 문제 많은 우리를 부르시고, 주님의 사람으로 거룩해지고 성숙해지기를 참고 기다리십니다. 우리를 부르심에 대해 감사하고, 겸손하되, 우리의 이웃에 대해서는 주님의 눈과 마음으로 보고 인내함으로써, 주님의 사람으로 온전해지고 칭찬을 받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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