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으로 주님과 함께하십시오
성경: 마가복음 3장 31-35절(신 58쪽)
찬송: 263장(이 세상 험하고; 통197), 204장(주의 말씀 듣고서; 통379)
설교: 20170716.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신학대학교를 다닐 때, 학생회에서 축제의 이름을 무엇으로 하면 좋을 것인지를 학생들에게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축제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을 높이고,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학생회에서 큰 종이를 붙여놓고, 그 아래에 의견을 쓰라고 했습니다. 여러 이름이 나왔는데, 다른 것은 대부분 기억이 안 나고, 한 동기가 기록한 이름이 지금까지 기억에 남습니다. 기억에 남는 것도, 이름이 좋았던 까닭보다는, 그 이름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축제의 이름을 묻는 곳에다, 동기 하나가 ‘도림제’라고 썼습니다. ‘도가 임하는 축제’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습니다. ‘도림제’라고 하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과 느낌이 나는가요? ‘도’라고 하면, 가장 쉽게 생각나는 것은 ‘도사’ ‘도술’ 또 “도를 아십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니고,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배워서 교인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신학대학교에서 축제의 이름을 ‘도림제’라고 적었으니, 어떻게 도교나 도사들을 떠올리게 되는 말을 신학대학교 축제 이름으로 낼 수 있느냐는 반대 의견이 줄줄이 달렸습니다.
그러자 이 이름을 제안했던 동기가 거기다 덧붙여 설명했습니다. ‘도림’에서 ‘도’라는 것은, ‘도사’나 ‘도술’ ‘도교’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율법이나 계명을 지키는 것, 또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는 말씀에서, ‘길’을 한자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도’고, ‘전도’할 때도 역시 ‘길을 전한다’ ‘도를 전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도림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들이 많습니다.
동기의 설명을 듣고 보니, 이해도 되고, 수긍이 되었습니다. 또 그 이야기를 듣고 성경을 살펴보니, ‘도’라는 말이 꽤 많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편 67편 2절에서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라고 했고, 사도행전 18장 26절에서는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고 하고,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정해진 날에, 정해진 장소에 모여, 기도와 찬양과 예배를 드리는 것들이, 종교생활이 되지 않고, 신앙생활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도를 알고, 도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깨달아야 하고, 주님의 것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오늘 말씀은, 지난 주일낮예배 시간의 본문과 이어질 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역시 같은 흐름 속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지난 주 말씀을 되짚어 보면, ‘무리’라고 불리는 보통 사람들, 예수님의 친척들,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은, 각자 나름의 생각과 방법으로 나아왔습니다. 무리들은 간절함과 예수님의 능력을 알고 찾아왔고, 친척은 사랑과 열정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고, 서기관들은 열정과 지식을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지 못 했습니다. 세 부류 모두 뭔가 부족하거나 잘못된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찾고 만날 수 없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이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이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열정이 대단한 것도 아니었고, 지식이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더 큰 것도 아니었지만, 그 부르심에 바른 길과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시고, 제자로,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그 부르심에 합당한 일들을 해낼 수 있도록, 함께해 주시고, 힘과 능력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신앙생활한다는 것, 주님을 찾고 만나는 과정에서는, 속도와 열정과 지식보다는, 예수님을 향한 바른 방향이 먼저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방향이 잘못된 속도는 맹신이나 미신으로 흐르게 되고, 방향이 잘못된 지식은 하나님을 맞서는 어리석은 결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을 향한 바른 방향과 더불어 한 가지를 더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행함입니다. 만일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없이,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30절에서 모두 끝났으면, 읽는 사람들이 오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는지, 반대로 부족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온 사람들을 보면서, 다른 것 전혀 없이 그냥 방향만 제대로 잡으면 믿음이 완성된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늘 본문에서,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신앙이란 바른 방향 외에 더 필요한 것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가족들이 찾아왔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서 찾아온 사람들은, 예수님과 가까운 친족들이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친어머니인 마리아, 그리고 친동생들이 예수님을 직접 찾아온 것입니다. 이 때의 모습을 누가복음 8장 21절에서는 “예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의 광경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건물 안에서 여러 가지에 대해 말씀하시고 가르치시자, 이 말씀을 더 가까운 곳에서 잘 듣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에 둘러앉았습니다. 예수님 주위에 앉은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왔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고, 이 광경을 본 몇 사람들이 예수님께, 밖에 어머니와 동생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지금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한 동생들이 예수님이 계신 그곳으로 무엇을 말하려 왔는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이 광경을 기록한 세 곳 모두 목적이나 내용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광경에서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어머니와 동생들의 방문을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머니인 마리아나, 육신의 동생들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더 가깝고 귀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은 왜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예수님의 응답을 받지 못 하고, 예수님 가까운 곳에 있는 이들보다 더 못한 사람들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열정과 간절함이 다른 사람들보다 적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예수님에 대해 잘 모르거나, 잘못 알기 때문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로 따지면, 가족들보다 더 큰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당시 사람들 중에, 예수님을 위해 희생하고 죽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들이 없었겠지만,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한 동생들은,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예수님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죽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그 누구보다도 컸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열정과 간절함도, 다른 그 누구보다도 큰 사람들이 가족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의 상황만이 아니라, 몇 개월 만에 말하기 시작했는지, 언제 걸음마를 뗐는지, 어떤 친구와 가깝게 지내고,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가족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즉, 어머니와 동생들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도 있었고, 간절함도 있었고, 예수님에 대한 지식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이들보다 못하다는 말씀을 듣는 까닭은, 예수님의 가족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주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빼곡히 둘러싸고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예수님의 가족들이 찾아와서 밖에서 예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만일 친밀도 즉, 관계의 가까운 순서대로 한다면, 이 둘의 순서는 바뀌어야 합니다. 사람들 관계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는 부모와 자녀, 혹은 가족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그 다음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부모와 자식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가족을 위해 자기가 손해 보는 것 어려운 일 아닙니다. 그러나 가족이 아님에도 자기를 희생하는 것은 극히 드뭅니다. 그만큼 사랑과 중요성으로 따지면, 가족은 다른 그 어떤 관계보다 가깝고 소중해서, 자기를 희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가족과 다른 사람들의 자리가 바뀌어 있습니다. 당연히 가장 가까이에 있어야 하는 예수님의 가족들은, 사람들 저 너머에 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 없어서, 다른 사람들이 전해 주어야 할 만큼 멀리에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의 가족이 가까이 할 수 없었다는 것만을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과는 너무 멀리 살았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쪽에서 사시고, 다른 가족들은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았다는 게 아니라, 예수님과 상관없이 살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평생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십자가까지 지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삶 전체를 통해,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친가족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대로 사는 것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은 게 아니고, 그저 특이한 아들로만 여겼습니다. 또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는 믿지 않았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확인한 후에야 뒤늦게 다른 제자들과 함께 믿음을 가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비롯한 예수님의 동생들이 찾아왔지만, 예수님이 그 만남을 거부하신 것을 통해, 신앙생활이란 주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과 지식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님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도 배워야 하고, 예수님을 알고 사랑해야 주님을 만날 수 있지만, 그 위에 행함이 없다면 종교생활에 그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계산으로는 주님을 만날 만한 사람 같고, 그럴 자격을 갖춘 것처럼 여겨진다 하더라도, 주님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거나 버릴 수 있는 게 아니고, 이것이 없으면, 신앙이라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도 필요하지만, 듣고 배운 것을 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 자기의 신앙을 자랑하며 이야기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예배와 기도회에 열심히 참여한다는 것, 종일 기독교 방송만 틀어놓고, 설교와 찬송을 듣는다는 것, 그리고 성경공부를 열심히 한다거나, 성경을 손으로 직접 베껴 보았다는 것입니다.
저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그런 것으로 자랑하는 분들 중 다수는 그것이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 같고, 그래서 그런지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크게 고민하거나 노력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란 말씀을 듣고 배우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런 것도 필요하지만, 그러나 주님이 인정하시는 신앙생활이 되고,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보고 듣고 배운 말씀을 행해야 합니다.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대로 살고, 말씀을 통해 배운 것을 실천하는 것은 어렵다 보니, 듣고 보고 배우고 읽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신앙생활이라 하지 않고 종교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종교생활은 신앙생활에 비해 훨씬 쉽고 편합니다.
시간과 건강이 되는 사람이, 매일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 어렵지 않습니다. 종일 설교 방송을 틀어놓고 듣는 게 뭐 어렵습니까? 틀어놓기만 하고, 다른 일, 다른 생각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뭐가 어렵겠습니까? 잘될 거라고, 복 받는다는 이야기 나오면, 내게 한 이야기라고 믿으며 아멘으로 듣고, 싫은 소리도 별로 안 하겠지만, 불편한 설교를 하면 남의 이야기로 흘러 보내면 그만입니다. 이렇게 듣기만 즐겨하고, 그것으로 끝나버리는 이들을 가리켜 ‘귀만 살쪘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귀만 살찌는 사람이 아니라, 듣고 마음에 새긴 것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논어에서 공자 선생이 ‘아침에 도를 들어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세상의 이치와 진리에 대한 열망이라고 볼 수 있지만, 좋은 것을 듣고, 배우는 것에서 끝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렇게 듣고 배우고 아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것은, 도교에서 말하는 ‘좋은 소리’의 ‘도’에 그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런 도를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 삶에 적용되고, 실천되는 말씀과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이런 말씀이어야만,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있고, 천국과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이렇게 우리 생활에서 실천되고, 보고 듣고 배운 대로 살아야 비로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들이 실천되어야만, 하나님의 자녀요, 주님의 형제자매요, 천국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가족으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주님을 향한 열정과 사랑과 지식과 더불어, 이것을 지켜 행하는 믿음과 담대함으로 나아오라 말씀하십니다.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지만, 그래야만 주님의 말씀이 듣기 좋은 소리와 깨달음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에게 능력이 되고, 힘이 되고, 영생으로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내 욕심대로 행하지 말고, 바르게 듣고, 바르게 보고, 바르게 배운 것을 지켜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약속하신 복을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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