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70709)열정보다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막 3장 13-30절)

청명하늘 2018. 4. 24. 14:35

열정보다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성경: 마가복음 313-30(57)

찬송: 288(예수를 나의 구주; 204), 321(날 대속하신 예수께; 351)

설교: 20170709.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며칠 전 국제 뉴스에, 케냐라는 나라에서 완공을 며칠 앞두고 있던 다리 하나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나라마다 크고 작은 사고들이 많은데, 이렇게 국제적인 관심사가 되어,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까닭이 무엇일까요? 이렇게 다른 나라의 사고가 널리 알려지는 까닭은 크게 두 가지 경우입니다. 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등 인명 사고가 크게 날 때거나, 들어간 비용이 클 때입니다.

 

그런데 이번 사고로 몇 명이 다치거나 실종되거나 죽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고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까닭은 한 가지죠? 큰 공사였다는 뜻입니다. 이 다리 공사는 1200만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는 약 136억 원가량의 공사였습니다. 케냐는 경제적 수준이 아주 낮습니다. 우리나라의 20분의 1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렇게 가난한 나라에서 136억 원이라면, 우리나라에서 갖는 가치보다는 훨씬 더 큽니다. 전후 사정을 보니, 현재 대통령이 재선을 앞두고, 표를 많이 얻기 위해서 무리가 될 만큼의 비용을 들여서 이 공사를 중국의 한 업체에 맡겨 진행했다가, 완공을 며칠 앞두고 다리가 무너져서, 이 사업을 추진한 대통령도, 이 사업을 진행한 중국 업체도 크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을 보면서, 속도보다는 방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방향이 잘못된 속도는 실패하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표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급하게 서둘렀던 대통령에게는 원하던 표가 아니라, 비난과 조롱이 주어졌습니다. 자기들의 능력을 자랑하려고 서두르면서, 마땅히 넣어야 하는 자재를 넣지 않고, 마땅히 기다려야 하는 시간들을 빼놓고 공사한 중국 업체 역시, 그 동안 기울였던 모든 수고와 노력이 헛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주님을 찾고 만나는 거라는 것도 가장 분명한 표현들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찾고 만나야 하는 신앙생활에서도, 방향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에서 방향을 잘못 잡으면, 그것이 아무리 크고 빠르고 엄청난 성과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미신이나 광신으로 흐르게 되고, 하나님의 것들로 채우지 못 하면, 부실공사처럼 하나님이 버리실 것이고, 그래서 부도난 기업처럼 실패하고 망하고 맙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을 찾고 만나려 하면서도, 방향이 잘못 잡은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20절부터 세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먼저는 20절에서 무리라고 표현된 사람들이고, 두 번째는 21절에서 예수님의 친족들이고, 세 번째는 22절에서 서기관들입니다. 이 세 부류의 사람은 각자 나름의 이유와 목적을 위해 예수님을 향해 나아왔습니다.

 

무리로 표현된 사람들은, ‘대중’ ‘군중이라는 말로도 표현됩니다. 이 사람들은 특별할 것도 없고, 이름을 기록할 만한 것도 없는 그야말로 가장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일상에서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또 어떤 까닭으로 주님을 찾고 나아오는지에 대해, 오늘 본문 앞 7-11절에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들은 유대와 당시 수도인 예루살렘에서만이 아니라, 이웃 민족인 두로와 시돈이라는 곳으로부터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주로 이스라엘 땅에서 활동하셨는데, 이웃 나라인 두로와 시돈이라는 지역까지 그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주님을 만나기 위해 예수님이 계시는 곳까지 먼 걸음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 거리가 약 40km에서 60km가량 됩니다. 여기에서 광주까지의 거리와 비슷합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걸어다녀야 했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오는 데만 꼬박 하루 이틀 걸리는, 쉽게 걸음 할 수 없는 거리였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그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까닭은, 그들 각자가 지고 있는 문제와 아픔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오가는 데만 3,4일 걸리는 걸음을 해서라도, 그 짐들을 벗을 수 있기를 바랄 만큼 간절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온갖 질병으로, 어떤 사람은 더러운 귀신에 들려 그 고통이 너무나 컸습니다. 이들에게는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예수님의 능력만이 마지막 소망이었고 기대였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찾아오고, 또 예수님의 도움을 구했는지, 20절에서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는 간절함이 있었지만,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자기들의 소원과 바람만 이루어 주시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자기들이 그토록 바라던 소원들이 이루어지면, 이들은 언제든지 자기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속에는, ‘이제는 좀 살만 하겠구나하는 것만 남고, 예수님이 왜 자기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셨는지,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무엇을 생각하며 살라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금세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이들의 모습은,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생활 하는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하는 시간만 되면 교회를 향해 나아옵니다. 주일 하루 예배하는 것으로도 부족하다고, 수요일에도 예배하고, 그것도 부족하다며 금요일, 토요일, 새벽마다 모임과 예배를 만들어 모이기를 힘씁니다. 이것은 시돈과 두로에서 예수님을 만나러 온 이들의 모습과 비슷해 보입니다. 지금은 며칠을 걸려 먼 길을 오가야 하는 수고는 없지만, 분주한 상황에서도 교회로 나아옵니다.

 

바쁘고 하고 싶은 일 많은 가운데에서도 예배하러 나아온 것만으로도 잘한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주님의 칭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것만으로는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정도는, 그저 성경 속에서 무리라고 기록된 바처럼,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생활을 하는 교인에 그칠 수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외면받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칭찬도 못 받습니다. 이렇게 다가온 많은 무리를 향해 주님이 칭찬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처지와 아픔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기도 하고, 배고픈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시기도 하고, 아픈 자들을 고치기도 하셨고, 귀신 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내쫓으셨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찾아온 이들을 칭찬하시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만나러 오는 두 번째 부류는, 예수님의 친족들입니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에 대해 잘 알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세상을 구하러 오신 분으로 아는 게 아니라, 가까운 친척 가정에서 태어난 친척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어릴 때의 모습을 보면서, 이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에서 훌륭하고 이름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기대와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몰고 다니면서 병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내느라 밥도 못 먹고 손해나는 일만 하고 있으니, 미친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붙잡아 가려고 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있었으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 보는 게 아니라, 자기들이 아는 친척이자, 바보 같은 생각으로 고생을 사서 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잡으러 찾아온 친족의 모습은, 예수님을 오직 훌륭한 인물로만 여기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계 4대 성인중에 예수님을 포함시키며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훌륭한 사람으로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좋은 말씀도 주시고, 또 말씀하신 대로 사신 분이지만, 그러나 좋은 가르침을 주시고, 선하게 살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뒤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어머니와 누이들과 동생들마저 외면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형제, 자매,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고, 존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만이 인정받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세 번째 사람들은 서기관들입니다. ‘서기관을 영어 성경에서는 율법 선생들’ ‘율법 교사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서기관들은 성경과 율법과 관련한 여러 일을 했지만, 대표적으로는 율법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본문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을 그냥 서기관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예루살렘에서 내려온이라는 말로 덧붙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고, 유일한 성전이 있었으며, 율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가장 좋은 전문가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율법을 공부한 사람들이라고 하면, 율법을 가장 잘 배우고, 잘 아는 것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이들이 그 누구보다도 율법과 성경에 대해 전문가이고 박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 누구보다 예수님을 괴롭혔습니다. 심지어 귀신의 힘으로 병을 고치시고, 귀신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신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이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성령을 모독했기 때문에 그 죄를 용서 받을 수 없다고 저주하셨습니다.

 

이렇게 성경에 대한 지식을 내세워 주님을 찾아온 이들은, 성경 지식이 곧 믿음이고 구원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성경에 대한 지식이 믿음이고, 신앙생활의 전부입니다. 성경에 대해 더 많이 아는 것이 큰 믿음이니, 계속 성경을 붙잡고 공부합니다. 성경책이 곧 구원의 도구이니, 성경책 자체를 하나님처럼 섬기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관심합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여러 성경공부법이 생겼습니다. 자기들이 가르치는 방식으로 성경을 배우는 것이 정답이고 성경을 가장 잘 아는 방식이라고 자랑합니다. 가르침을 잘 따라 배우며, 정해진 과정을 잘 마치고 성경 지식이 쌓이면 믿음이 커지고, 진리에 가까워진 것처럼 포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성경 지식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성경을 많이 알고 읽는 것과 같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성경과 율법에 대해 전문가고 박사들이었던 율법학자들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율법학자들은 그 누구보다도 성경을 잘 알고, 전문가다운 지식을 쌓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아보지 못 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귀신들의 우두머리인 바알세불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저주의 말씀만 들었습니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 모두 각자의 목적과 방법으로 주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그것도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나아왔고, 다른 사람들보다 매우 빨리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들이 되지 못 했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온 것까지는 그 누구보다 빨랐지만, 그 누구도 주님의 칭찬과 인정을 받지 못 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단순한 열심과 열정과 지식으로 나아오는 자들을 찾으시는 게 아니고, 부르신 방향에 맞게 나아오는 자들을 찾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자들을 부르시는 게 아니고, 그 걸음걸이가 너무 더디어서, 사람들 보기에도 답답한 한이 있더라도, 그럼에도 주위의 유혹과 흐름에 휩싸이지 않고, 묵묵히 주님의 것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찾아온 세 부류의 사람들을 따로 기록하지 않고, 20, 21, 22절에 이어서 기록함으로써, 주님을 찾아오는 열정과 속도는 대단했지만, 그 방향이 잘못된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어떤지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또한, 열정적으로 주님을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칭찬과 인정을 못 받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엄청난 저주를 받은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 그래서 우리의 모습이어야 하는 경우를, 본문 13절부터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준비나 바람마저 없었지만,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이들을 부르시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올 만한 이들이었기에, 우리 보기엔 모자라 보이고, 어리석어 보임에도, 그들을 직접 부르시고, ‘보내실 만한 자들이라며 사도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이들에 대해서 13절에서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라고 말씀하시고, 14절과 15절에서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과 부르심에 순종하는 자들을 원하시고, 다른 것 하나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바른 방향과 방법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들을 주님이 찾아오시며, 그들에게 주님의 일을 맡기시고, 더불어 그 일들을 해낼 만한 능력을 덧입혀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요, 주님의 일꾼이요, 주님이 주인 되시는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어떻게 신앙생활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단순한 간절함이나 열심이나, 단순한 성경지식으로, 더 빨리, 더 멀리 가는 게 먼저가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신 바를 지켜 행하려는 믿음, 주님이 주시는 것을 의지해 살려는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남보다, 다른 교회보다 더 많이, 더 크게 이루겠다는 생각만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을 생각지 않고 나아가는 것은, 속도만을 생각하다 무너질 건물을 지어가는 것과 같고, 무너질 건물을 지을 바에야, 차라리 공사를 안 하는 게 훨씬 유익합니다.

 

더딘 한이 있더라도, 가장 안전한 건물을 지으려는 자세로, 오직 우리 삶과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따라 나아가면, 하나님은 우리를 칭찬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진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더욱 큰 은혜와 복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제자를 부르시는 과정에서 말씀하시는 바를 바르게 깨닫고, 조금 느리고 부족하다 하더라도, 주님의 부르심에 바르게 순종하고, 주님을 향한 바른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주님의 인정을 받고, 부르심과 함께 주시는 능력을 받아, 더욱 복되고 은혜로운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