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80211)십자가의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막 8장 27-38절)

청명하늘 2018. 6. 24. 21:53

십자가의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성경: 마가복음 827-38(68)

찬송: 90(주 예수 내가 알기 전; 98), 445(태산을 넘어; 502)

설교: 20180211.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영어 중에 인스턴트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각적인’ ‘아주 짧은 동안이라는 뜻인데, 이 말 하나보다는 뒤에 식품이나 제품이라는 말이 붙어, ‘인스턴트 식품’ ‘인스턴트 제품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익숙합니다. 라면, 믹스 커피, 햄버거, 피자, 즉석 카레, 즉석 짜장, 컵밥 등이 대표적인 인스턴트 식품입니다.

 

이런 인스턴트 음식의 특징은, 그 무엇보다도 빠르게, 또 간단하게 먹고 마실 수 있다는 점입니다. 커피도 지금 우리가 마시는 방법이 워낙 익숙해서, 커피 마시는 방법이 본래 그런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커피콩을 볶아 갈고, 거름종이에다 놓고, 뜨거운 물을 부어 밑으로 빠지는 것을 마시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커피에 설탕과 크림이 섞여 있는 인스턴트 커피가 나와서, 끓는 물만 부으면 당장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카레나 짜장도 재료를 준비해서 만들려면 한참 걸리죠? 그런데 이미 완성되어 봉지로 나온 것은, 물이나 전자레인지로 데우면 단 몇 분만에 먹을 수 있습니다. 라면이나 컵라면도 거의 완성되어 있어서, 물을 넣고 끓이거나, 끓는 물을 부으면 몇 분만에 먹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스턴트 식품은 거의 완성되어 있어서, 간단하게 준비하고 쉽게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스턴트 음식이 생긴 까닭이기도 합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인스턴트 음식은 입맛에 꼭 맞고, 아주 맛있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떤 음식을 더 좋아하는가요? 대부분 밥과 국보다는, 햄버거나 수프를 좋아합니다. 국수보다는 간단한 라면이나 컵라면을 좋아합니다. 빵이나 떡보다는 햄버거나 피자를 더 좋아합니다. 어른들은 그 동안 먹어온 음식에 익숙해져서, 일반 음식을 더 좋아합니다만, 다른 음식에 길들여지지 않은 아이들은, 거의 틀림없이 인스턴트 음식을 좋아합니다.

 

언젠가 믹스커피를 줄이려고, 그냥 커피에 설탕만 넣고 한두 달 마셨습니다. 그러다 커피가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남아 있는 믹스 커피를 마시게 되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커피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인스턴트 음식은 한번 맛보면 잊는 게 쉽지 않을 만큼 참 맛있습니다.

 

인스턴트 식품이 가진 이런 여러 좋은 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스턴트 음식을 그리 좋은 음식으로 여기지 않죠? 사랑하는 자녀나 손자손녀들에게, 매일 피자와 햄버거, 라면을 먹이고 싶습니까? 아니면 다른 것을 먹이고 싶습니까? 인스턴트 음식이 맛있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가끔 줄 수는 있지만, 매일 그것만 먹이고 싶지는 않죠? 인스턴트 음식 속에는 좋은 영양분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좋은 음식이란, 빨리 먹을 수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맛만 좋으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준비하는 시간도 너무 길어서는 안 된다는 점도 중요하고, 맛도 좋아야 한다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이것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중요한 점은, 음식 속에 충분한 열량과 영양분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스턴트 음식은 빨리 준비할 수 있고, 맛도 좋고, 먹으면 힘이 날 수 있는 열량도 충분하지만, 그 속에는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주고, 유지해줄 수 있는 영양분은 너무 적습니다. 우리의 몸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이 있어야 하고, 비타민, 무기질, 식이섬유, 칼슘, 미네랄 등이 골고루 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스턴트 음식에는 대부분 지방과 탄수화물이 많고, 단백질은 아주 적게 들어 있고, 나머지 영양분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그래서 인스턴트 음식을 먹으면, 몸에 힘이 나긴 하지만, 몸에 꼭 필요한 중요한 다른 영양분이 없어서, 몸을 건강하고 튼튼하게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인스턴트 음식을 많이 오래 먹으면 몸은 살이 찌고 커지지만, 점차 몸에 여러 문제와 질병이 생기게 됩니다.

 

반대로 몸이 약해지거나, 병이 생겼을 때, 몸을 회복하고 튼튼하도록 약이나 보양식으로 먹는 음식은 대부분, 준비하는 데 시간은 오래 걸리고, 또 맛은 없습니다. 건강을 위해 먹는 음식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홍삼즙은 몸에 좋다고 하지만, 비싸게 준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달이는 데도 한참을 걸리는데, 그럼에도 먹기 힘들 만큼 쓰고 맛이 없습니다. 삼계탕도 그렇죠? 들어가는 수고와 노력에 비하면, 맛은 형편없습니다. 그럼에도 쉽고, 간단하고, 맛만 있는 인스턴트 음식만 먹으면, 몸이 약해지고, 병이 들기 때문에, 시간과 수고와 대가가 많이 들어가는 보양식이나 좋은 영양분이 많이 있는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인스턴트 음식과 닮은 게 있고, 보양식과 닮은 것이 있습니다. 복과 고난입니다. 복은 인스턴트 음식과 닮았고, 고난은 보양식과 많이 닮았습니다. 복이라는 말은 언제나 사람들의 입맛을 즐겁게 합니다. 신앙인들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복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어서 그렇고, 바라는 복의 종류가 조금 다를 뿐이지, 복을 바라는 마음은 비슷합니다. 모두 좋아합니다.

 

복에 대한 간절함이 얼마나 큰지, 구원과 영생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겠다고 다짐한 신앙인들에게도 가장 큰 시험과 장애가 될 정도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시험과 장애가 되는 복이란, 하나님이 약속하시거나, 주시는 복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내고, 복으로 포장한 욕심을 뜻합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갖는 복에 대한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교회에서는 복을 강조합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복만 강조합니다. 그것도 지금 이 땅에서 얻고 누릴 수 있는 복에 한정됩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도 이 영향력이 대단합니다. 몇 년 전에, 목회자 세미나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고 합니다. 최근 우리나라 교회의 성장이 멈추거나 퇴보하는 까닭 중 하나가, 교회가 자꾸 십자가와 고난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교인들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삶에서 겪게 되는 아픔과 어려움이 너무 많아 지치고 낙망이 되어, 교회에서라도 위로와 힘을 얻기를 바란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복과 은혜에 대한 말씀으로 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게 아니라, 자꾸 십자가와 고난 이야기로 교인들을 더 힘들게 해서, 실망해 떠나게 된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아프고 지친 교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도 교회의 사명 중 하나입니다. 설교에서도 복과 은혜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복과 은혜에 대한 설교는 인스턴트 음식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이것만큼 쉽게 만들어지고, 또 그러면서도 우리의 마음을 즐겁고 들뜨게 만드는 것도 없습니다만,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우리의 영혼이 건강할 수 없습니다.

 

인스턴트 식품처럼, 영혼의 입맛을 쉽게 빨리 즐겁게 하지만, 영적으로 비만해지게 하고, 성인병처럼 영혼을 갉아먹게 만듦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와 고난이 없이 오직 복과 은혜만을 말하고자 하는 욕망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설교를 듣는 이들은 고난과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거북스러워하고, 복 받는다는 이야기에만 마음을 열고 들으려 하고, 그만큼 설교자는 교인들의 귀를 즐겁게 할 수 있는 복에 대한 설교를 하고자 하는 유혹이 너무 큽니다.

 

지금 주일낮예배 시간에는 계속해서 마가복음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는 주일낮예배 설교 준비가 끝나면, 본문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바로 그 다음 주일 설교의 주제를 정하고 준비를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을 어떤 주제로 할 것인가를 놓고, 5일가량 계속 갈등하며 고민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 주제는 분명합니다.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자신이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갈 것을 밝히시면서, 제자들에게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주제가 이처럼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며칠간 계속 고민한 까닭은, 이 말씀이 우리의 입맛에 쓰고 거북스럽기 때문입니다. 저는 설교에서도 인공조미료 같은 것을 최대한 자제하려 노력합니다. 저의 설교 형태는, 음식으로 따지면, 딱딱하고 맛이 없습니다. 그런데 또 본문의 주제대로 고난을 각오하고, 십자가를 지며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게, 너무 큰 부담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본문을 그냥 넘어가거나, 아니면 다른 주제로 말씀드릴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설교자는, 설교를 듣는 이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나, 설교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을 전해야 한다는 기본과 원칙을 다시 떠올리며 반성했습니다. 수천 년 전의 이야기를, 지금의 교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로 쉽게 풀이할 수도 있고, 잘 이해하도록 예를 들어 설명할 수는 있지만, 성경 속의 주제와 목적마저 피하거나 바꿔서는 안 됩니다. 이 과정은 설교를 전하는 이나, 듣는 이들에게나 딱딱하고 맛없는 음식처럼 자극적이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입안을 즐겁게 하고, 입맛을 자극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스턴트 음식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 교회에서만이라도, 한 주에 단 한두 시간만이라도, 귀에 거슬리더라도, 부담이 되더라도, 우리의 영혼을 건강해 줄 수 있는 보양식, 보약과 같은 말씀, 곧 고난과 십자가의 말씀을 전하고, 들어야 합니다. 이 과정이 힘들고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듣기 편하고, 마음을 기쁘게 만드는 것만 골라 전하고 듣게 되면, 우리는 어느새 영적 성인병에 걸리고 맙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복과 은혜에 대한 말씀이 많습니다만, 더불어 반드시 나오는 게 율법과 계명입니다. 복을 받고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과 계명대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영생과 구원에 대한 말씀과 약속이 많습니다만, 이와 더불어 반드시 나오는 게 고난과 십자가입니다. 구원과 영생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여러 마을을 다니시던 중에,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아주 위대한 선지자들 중 한 사람으로 여긴다고 답하자,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제자들의 생각을 물으셨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나서서, “주는 그리스도십니다며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아주 짧게 나왔지만,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마태복음 16, 누가복음 9장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세 곳 모두에서 두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베드로가 주님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고백하자, 예수님은 자신이 곧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다는 것을 밝히신다는 점입니다. 다른 한 가지 공통점은, 제자들에게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명령하셨다는 점입니다.

 

공관복음서에서 제자의 신앙고백, 예수님의 고난 예언, 그리고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 이 세 가지가 반복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할 만한 수준이 되어야만, 예수님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신다는 것이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만한 사람이 되면 가장 먼저 주시는 명령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영생과 구원의 길을 가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기로 각오하는 것이고, 주님이 말씀하신 생명의 길이 비록 험난하고 어려워도 그 길을 향해 계속 가겠다 다짐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 주시고픈 것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왜 가장 먼저 고난과 십자가를 말씀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인간의 영생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실 정도로 사람을 사랑합니다. 이런 예수님이,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알고 믿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35,36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는 말씀처럼, 자기의 길과 판단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라 사는 길이 결국 구원과 영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사는 제자들, 하나님의 자녀들마저도 고난을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베드로처럼 반응합니다. 예수님께서 영광과 권력의 구세주로 오시지 않고, 고난과 십자가의 구주로 오셨음을 말씀하자, 베드로는 32절에서 예수님께 항변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에서는, “항변하매라고 점잖게 표현했지만, 원어로 보면, 예수님을 꾸짖었다는 표현입니다. 이런 베드로를 33절에서 예수님이 꾸짖으셨는데, 이 때 사용된 말과 베드로가 예수님께 항변했다는 표현이 같습니다. 이때의 상황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치 싸울 듯이 거칠게 반항했다는 것이고, 이런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사탄을 꾸짖는 것처럼 엄하게 대하셨다는 뜻입니다.

 

고난과 십자가의 길에 대해 베드로가 보인 반응처럼, 우리 역시 주님께 거칠게 따지며, 왜 이런 어려움과 아픔을 주시느냐며 항변하며, 원망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우리에게 거칠고 힘들고 아픈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게 우리의 영혼을 튼튼히 하고, 험한 세상을 이기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 결국은 성공과 생명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쓰고, 거북스럽고, 거친 과정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길이 힘들다고 외면하고, 우리를 편하게 하고, 즐겁게 하는 복과 은혜의 길만 찾으면, 주님의 좋은 제자가 될 수 없고, 결국은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 영생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실패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난과 십자가마저 각오하며, 주님을 따르고자 애쓰면, 영원한 생명의 길에 다다를 수 있고, 주님의 뜻대로 십자가의 길을 따르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기쁘게 여기시고, 반드시 도우시고, 승리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을 기억하고, 주님의 힘을 의지하며 십자가의 길을 감으로써, 주님이 약속하신 생명을 얻고, 이 땅의 삶 가운데서도 주님의 도우심으로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