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보다 주님과의 만남이 더 중요합니다
성경: 마가복음 8장 11-13절(신 67쪽)
찬송: 486장(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통474), 446장(주 음성 외에는; 통500)
설교: 20180121.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사진을 잠깐 보겠습니다. 이 방송을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만, 찾아보니 KBS2채널에서 지금도 방송되고 있는 [VJ특공대]라는 프로그램에서, 2015년 11월에 방영한 내용을 요약해서 사진으로 모아놓은 것입니다.
‘마른 하늘에 내리는 비’ 사진 ‘뭔가 편안하고 안정감을 주는 느낌’까지
여러분도 보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내용을 요약하면, 강원도 양양군에 있는 동해사라는 곳에 마른하늘에도 그 나무 밑으로 빗방울이 떨어진다는 겁니다. 비 오는 날 나무 아래에 빗방울이 떨어진다면 전혀 이상할 것 없겠죠? 그런데 다른 곳은 다 맑은데, 유독 한 나무 아래에는 빗방울이 꽤 떨어진다는 겁니다. 신기하고도 이상하죠? 그래서 사람들이 신기하고 또 그 나무에 뭔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곳 밑으로 가서, 그 빗방울을 맞았습니다. 사진으로 본 것처럼, 얼굴에 바르면 피부가 좋아지고, 몸에 맞으면 건강해지고, 또 마음까지 편안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빗방울이 무엇인가 하고 조사해 봤습니다. 그랬더니 일반적인 물이 아니라, 특정한 액체라고 해서, 다시 그 나무 밑으로 가서 자세하게 살펴봤더니, 그것은 다름 아닌, 아주 작은 벌레의 오줌이었습니다. 벌레가 워낙 작아서, 벌레가 싸는 오줌인 줄 모르고, 나무에서 비가 온다고 생각했는데,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벌레들이 오줌을 싸니, 그것이 마치 빗방울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마른 하늘에 내리는 비’ 사진 ‘뭔가 편안하고 안정감을 주는 느낌’ 이후
이것을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사실 이 방송 내용은 처음이 아닙니다. 방송사들의 장난질인데, 정확한 시기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약 10여 년 전에도 똑같은 내용이 방송되었습니다. 사진에서 봤던 곳인지 잘 모르겠지만, 내용은 똑같았습니다. 다만 당시에 그 내용을 방송했던 곳은 KBS가 아니라, SBS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이었고, 또 같은 방송사 다른 프로그램에서 얼마 후에 또 같은 내용을 방송했습니다. 그때는 음력으로 몇 월 며칠이 되면, 비가 온다는 내용까지 덧붙여져 방송되었는데, 그때도 조사해 보니 결국 작은 벌레들의 오줌이라는 결론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어떻습니까? 방송사들의 장난질이 심하다는 생각도 들고, 앞에서 봤던 사진만을 보면, 기적에 대한 인간의 어리석음과 더불어 간절함이 얼마나 큰지도 알 수 있습니다.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저런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맑은 날 나무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면, 좀 더 가까이 가서 자세하게 살펴보면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최소한의 노력은 기울이지 않고, 그저 신기한 일, 기적이 일어났다고 그대로 믿고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맹목적으로 기적을 찾고 믿으니 얼마나 추해집니까? 세상에 벌레의 오줌을 맞았습니다. 벌레의 오줌이 사람의 것보다 좋은 게 뭐겠습니까? 사람의 오줌처럼 냄새나고 지저분합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일부로 찾아가서 몸에 맞고, 또 그것을 약보다 더 귀한 것이라 여기며 먹기까지 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먹으면 몸이 건강해지고, 마음이 평안해진다고까지 말합니다. 그것을 몸과 얼굴에 맞고, 또 먹는 사람들이 벌레의 오줌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오히려 더럽고 지저분하다고 근처에도 가지 않고, 그 자리를 피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신기하고 놀라운 기적에 대한 인간의 관심과 집착은 맹목적이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합니다. 그것이 실제 도움을 주느냐, 꼭 필요하느냐 하는 것과는 별개로, 뭔가 신기하고, 놀랍고, 보통 일어나지 않는 일들을 찾고 구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모습에서 기독교인들은 자유로울까요? 신앙인들은 이렇게 이상한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적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만들어낸 어리석은 생각인지 구분해 낼까요? 기독교인들도 역시 이런 어리석음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30,40년 전 우리나라 기도원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때, 그곳에서 나오는 생수를 능력있는 사람들이 안수하고 기도했기 때문에, 마시면 병이 낫고, 몸이 좋아진다고 돈을 주고 판매했고, 돈 주고 물을 판다는 것을 생각조차 못 했던 당시였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쾌 큰돈을 주고 사다 마셨습니다. 나중에 한 방송사에서 나와서 조사해 봤더니, 마실 수 없는 물이었습니다.
지금도 교인들 중에는, 목사의 기도를 받고, 그곳에서 예배를 함께 드리면 복을 받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그런 기적은 없습니다. 기적은 오직 하나님만이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올 우리 교회 표어처럼, 오직 하나님만이 복을 주십니다. 그럼에도 맹목적으로 목사라는 사람을 찾고, 기적을 행한다는 사람을 찾고, 기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을 찾는 것도, 벌레의 오줌을 먹으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병을 낫게 하고, 마음까지 평안하게 한다고 여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어리석음입니다.
우리가 찾고 구해야 하는 것은, 이상하고, 놀랍고, 신기한 기적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찾아 나아가야 하는 것은, 보고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표적이 아니라, 주님의 곁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가장 크고 놀랍고 신기한 기적과 표적을 체험하는 게 아니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적과 표적을 많이 보이시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것 계산하지 않고, 아주 단순하게 교회의 가장 큰 사명 중 하나인,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으로만 따져보더라도, 기적과 이적만큼 좋은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교회만 나오면, 병이 낫고, 문제들마다 모두 해결된다면, 사람들이 몰려들겠죠? 병원에서 낫지 못 하는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와서 교회는 빈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가 그런 곳이 된다면, 전재산을 들여서라도 교회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예수님은 어떠신 것 같습니까? 기적과 표적을 행하는 것에 대해 나쁘게 여기시지는 않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은 아닙니다. 우리의 계산으로는, 할 수만 있으면, 아무 때나, 어디서나, 무엇이든지 기적을 행하시는 게 무조건 좋은 것 같은데, 주님은 우리의 판단과는 달리 행하셨습니다. 기대보다 적게 행하셨고, 행하신 후에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신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실 수 있음에도, 오히려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 대표적인 경우가, 예수님이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실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사탄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는데, 돌로 떡덩이가 되게 하는 것과, 6층 높이인 20m 정도 되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예수님께 기적을 행하시라는 요구입니다.
우리의 계산으로는, 사탄의 요구대로 예수님이 돌덩이를 떡덩이로 만드시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시는 기적을 행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떡 다섯 조각,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을 먹이시고, 떡 일곱 조각, 물고기 일곱 마리로 수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께 돌로 떡 만드시는 것이 뭐가 어렵겠습니까? 물 위를 걸으시고, 파도마저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께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시는 것은 너무나 쉽고 간단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사탄을 이기고, 또 그것을 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일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사탄이 요구하는 단 한 가지도 받아들이지 않으셨고,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실 수 있음에도, 기적을 행하라는 사탄의 모든 요구를 거부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사탄이 사악한 마음,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의도로 기적을 요구했기 때문이고, 기적을 통해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명령을 지켜 행함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사탄의 요구대로 기적을 행하셨으면, 십자가와 고난의 그리스도는 없어지고, 영광과 왕관의 능력자만 있게 됩니다. 죄와 죽음으로 향하는 우리들을 구원하지 못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표적을 보여 달라는 바리새인들의 요청에, 예수님은 깊이 탄식하시고,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곳을 떠나버리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탄식하식하시면서 바리새인들이 있는 자리를 떠나 외면하시겠습니까? 표적을 보여 달라는 이들의 요구가 불순한 동기에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싶은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메시아인가 확인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시험’이라는 말이,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와 같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에게 할 수 있는 시험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자격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확인되면,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는 말씀처럼, 사탄과 귀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을 실패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온 바리새인들의 의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자격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실패한 메시아로 유혹하기 위해, 자기들처럼 형식과 겉모양만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요구처럼, 예수님께서 기적을 보여 주시고, 부인할 수 없는 표적을 보여 주셔도 이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서 인정하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놀라운 기적들, 표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이전에 한 번도 만나지도 못 했던 사람들도,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을 보면, 그 누구도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자임을 부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 곁에 가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설교하시는 현장에 있었고, 병자를 고치는 회당에 있었고,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바리새인들에게는 예수님의 능력도, 표적도, 말씀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기에는 이들은 출발점부터 악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많은 시간을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또 예수님의 곁에 있었지만 그 이유가 다릅니다. 예수님을 감시하기 위해서였고, 예수님을 시험에 빠지도록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러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실패하길 바라는 악한 마음으로 가까이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지켜보고, 시험하기 위한 그 어떤 요구에도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이적이 필요할 때 믿음으로 구하는 것에는 응답하시지만, 예수님을 구원자로서 인정하지 않고, 잘못된 목적으로 구하는 이들에게는 그 어떤 이적이나 능력도 행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12절에서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면서 다른 곳으로 가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사용된 표현으로 보면, ‘만약 이 세대에게 표적이 주어진다면 내게 저주가 임할 것이다’라는 강한 부정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수많은 사람들은 표적과 이적이 부족해서 믿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기적을 볼 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오병이어, 칠병이어 기적을 통해서도 수만 명이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과 마음이 없어서, 주님의 능력을 체험했음에도,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멀어졌고, 예수님은 아무 표적도 행하시지 않겠다고 하시며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이 이적과 표적보다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기를 요구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기적은, 신기하고 놀랍고 이상한 일을 보고 체험하는 게 아니고, 주님을 만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음을 인정하는 것보다 더 크고 신비하고 놀라운 표적은 없습니다.
기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보면 얼마나 많은 기적들, 이적들이 행해졌습니까? 홍해가 갈라졌고, 광야에서 메추라기와 만나가 주어졌고, 여리고성이 무너졌고, 예수님의 오병이어 이적이 행해졌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과의 바른 만남을 가진 이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계속 말씀하심에도,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려는 일은 뒷전으로 하고, 여전히 더 큰 기적이 있는가 하며 살피는 데 온 정신을 팔고 있지 않습니까?
이 시간에 우리는 주님을 보러 모였습니까? 만나러 모였습니까? 아니면 바리새인들 같은 불순한 동기에서 기적을 요구하지는 않겠지만, 때로는 기적을 놓고 흥정하지 않습니까? 이런 기적이 주어지면 더 열심히 믿겠다고, 더 이상 염려하지 않고 평안하게 살겠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나에게 큰 기적을 행할 능력이 주어지면 주님의 모든 말씀을 확신하며 살겠다며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구경하거나,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우리를 향해 베푸신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만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받아, 주님을 찾아와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 삶을 돌아보며, 주님이 약속하신 것을 진실로 믿고, 바른 믿음으로 주님을 따름으로써, 주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고,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자리에 이르는 신앙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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