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71231)주님의 현장학습(막 7장 24-30절)

청명하늘 2018. 6. 23. 00:36

주님의 현장학습

 

성경: 마가복음 724-30(65)

찬송: 458(주의 친절한 팔에; 405), 212(겸손히 주를 섬길 때; 347)

설교: 20171231. 주일낮예배

 

 

 

2017년 마지막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지난 주일에 전세계의 종교별 비율을 말씀드렸죠?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해 기독교로 보는데, 비율이 약 25%가량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종교인 비율을 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며칠 전 나온 조사를 보면, 개신교인 비율이 20.3%, 천주교인들 비율이 6.4%, 기독교인 비율이 26.7%로서, 세계 평균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개신교 비율만 보면, 조사시기와 방법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만,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한참 개신교회가 부흥하던 시기엔 적게 잡아도 25%, 많으면 30% 가까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교회만 세우면, 교인들이 채워지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유지마저 어려운 교회들이 많아졌습니다. 도심에 있는 교회들 중에서는, 운영이 힘들어서 교회 문을 닫는 경우도 많습니다. 개신교 내에서도, 25%, 30% 된다는 통계가 과장되었거나 잘못되었고, 지금은 교인 수가 많이 줄어서 위기라고 봅니다. 며칠 전 조사에 따르면, 2012년도의 개신교인의 비율은 22.5%, 2017년의 비율은 20.3%로 약 2.2% 감소했습니다. 20,30년 전까지 계산해 보면, 줄어든 비율은 훨씬 더 클 것입니다.

 

이렇게 교인 수는 많이 줄어들었는데, 교회의 중직들, 항존직들의 수는 어떨 것 같습니까? 우리 교단에서, 항존직이란 1년씩 임명을 받는 임시직분과는 달리, 한 번 직분을 받으면 70세 은퇴하기까지 계속 가지는 직분으로서 목사, 장로, 안수집사, 권사를 일컫습니다.

 

줄어든 비율이 5%, 10%라고 하면, 줄어든 교인 수로 따지면 수백 만 명이라는 뜻입니다. 인구 5천만 명일 때 기독교 인구는 25%1250만 명이었다면, 55백만 명 인구인 현재의 20%1100만 명으로서, 20,30년 만에 150만 명의 기독교 인구가 줄었습니다. 그런데 항존직의 수는 이와는 반대로 훨씬 더 많이 늘었습니다.

 

이에 대한 명확한 조사가 없어서 그렇지 비율로 따지면 몇 배로 항존직의 수가 늘었을 것 같습니다. 20,30년 전만 하더라도, 항존직 교인들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10명 중 한 정도도 안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항존직의 비율이 이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늘었습니다. 교회마다 좀 다르지만, 교인 절반 이상이 항존직분자들인 교회들도 꽤 될 것입니다. 또 어느 교회는 몇 년만 신앙생활하면 모두 항존직에 임명하기도 합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70세가 넘으면 항존직에 임명할 수 없다는 법 때문에, 항존직분을 받을 수 없는 분들에게는 명예 직분을 만들어 안수합니다. 심지어 명예 안수집사’ ‘명예 권사’ ‘명예 집사라는 직분은, 총회법에 없는 직분입니다. 총회에서 인정하지 않는 직분임에도, 교회가 만들어서 항존직을 주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직분을 주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이미 교회 일을 열심히 한 사람에게 상으로 직분을 주는 것일까요? 아니면 앞으로 열심히 일할 사람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일까요? 직분이란, 교회 일을 열심히 한 사람에게 수고의 대가와 상으로 주는 게 아니고, 앞으로 일할 사람에게 책임을 주고,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직분의 의미와 이유를 생각해 보면, 줄어드는 교인 수와는 반대로, 항존직분자들은 훨씬 더 많아지고, 일하기 어려운 70세 넘는 분들에게까지 총회법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직분을 만들어서 주는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직분에 대한 교인들의 욕심을 채워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상하리만치 직분에 대한 교인들의 욕심이 큽니다. 교회의 직분을 맡겨진 책임으로 보지 않고 계급으로 봅니다. 성도보다는 집사가 높고, 집사 위에 안수집사, 권사가 있고, 그 위에 장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하고를 떠나서, 항존직을 받고 싶고, 70이 넘어서도, ‘명예 안수집사’ ‘명예 권사라는 명예직을 받고 싶어 합니다. 항존직을 받고, 명예직이라도 직분을 받으면, 남들이 자기의 믿음과 수고를 인정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직분이 없지만, 열심히 일한 사람이 낫습니까? 아니면 직분은 항존직인 장로와 권사와 안수집사면서도, 교회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이 낫습니까? 교회의 직분은 전혀 없지만, 거룩하게 사는 사람이 좋습니까? 항존직에 있지만, 신앙과는 동떨어져서, 교회에 다니는 것을 빼고는, 신앙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는 사람이 낫습니까? 이것을 보면, 직분이나 명예 같은 겉보다는 속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고 나서의 일입니다. 당시 그 교회의 전도사로 있다가,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교회의 교인들에게는 제게 전도사라는 직분이 익숙했겠죠? 그러다 안수를 받았으니, 처음 두세 달은 저의 직분에 대해 혼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가 되었으니, 목사라고 불러야 하는데, 익숙하기로는 전도사가 익숙한 상태입니다.

 

그 즈음에, 한 젊은 집사님이 저를 부르면서 전도사님!”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실수한 것을 바로 알고, 깜짝 놀라서 목사님!”이라고 부르면서, 미안해서 어쩔 줄 모릅니다. 마치 큰 실수를 한 것처럼, 몇 번을 사과합니다. 그래서 제가 괜찮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도사면 어떻고, 목사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그 놈이 이놈이고, 이 놈이 그 놈인데...”

 

목사 안수를 받는다는 것은, 아주 높은 직위에 오르는 게 아닙니다. 전도사에서 목사로 진급한 것도 아닙니다. 직분이 바뀌었고, 할 수 있는 일의 영역이 조금 더 확장된 것입니다. 전도사로서 할 수 없는 일들 중에 몇 가지를 목사로 안수 받고 나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전도사보다는 목사를 높게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전도사든, 목사든 직분보다 그 속이 더 중요합니다. 참된 가치는 겉에 있는 이름과 장식과 직분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속사람과 바탕과 됨됨이입니다. 겉을 아무리 화려하게 장식하고 포장한다고 하더라도, 그 속이 더럽고 썩으면, 그 사람은 썩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좋은 직분과 책임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 직분에 맞는 희생과 열매가 없으면, 빈껍데기 같은 사람입니다. 종교인, 교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몰라도, 신앙인이라고 부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아무런 직분이 없더라도,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간절함과 진실이 있다면, 참된 신앙인이고,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복과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아무리 많이 해도, 교인들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전히 직분에 대한 욕심을 키워갈 것이고, ‘명예라는 빈껍데기일지언정 항존직분을 받고 싶어 할 것입니다. 교인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직분이라는 겉에 따라 상과 복을 주시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바로 이런 생각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생각이었고, 이것이 잘못되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24절부터 읽었습니다만, 71절부터 연결해 읽어야 본문의 의미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서기관들이, 예수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 먹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항의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생각에는, 손을 씻고 먹어야 종교적으로 깨끗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으니, 종교적으로 너무나 불결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이런 모습이,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처럼, 입술만 하나님을 섬기지만 마음을 멀고, 하나님을 헛되이 섬기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자기들 나름대로 만들어 놓고, 마치 목숨 걸 듯 지키며 행하고, 그것도 모자라 남들까지 그 기준에 맞추려 혈안이 되어 감시하고 비판했던 그들의 이런 모습에 대해, 사람의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사람을 살리고 복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계명이라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저주를 가져다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토록 열심히 지켰던 계명이 아무런 유익이 못 되고, 피해만 준다는 뜻이고, 그래서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지만, 제자들도 여전히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게 아니고, 사람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들이 사람들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겉보다 속이 진짜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직분과 종교행위보다는 속사람의 믿음과 가치가 진짜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지만, 예수님의 제자들마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합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현장학습을 시키시는데, 그것이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주심으로써, 제자들이 오해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24절에 보면,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겉보다 속이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셨지만, 제자들이 여전히 이해하지 못 하자, 그 즉시로 그 자리를 떠나서 두로 지방으로 가셨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 헬라인 사람이고 수로보니게 지방 출신 여인이었습니다. 두로는 우리로 생각하면, 일본이나 중국의 한 지방을 뜻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여인의 외적 조건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적인 유대인들조차 가장 무시하던 사람들이 이방인들입니다. ‘이방인이란 지역으로 보면, 이스라엘 이외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을 뜻하고, 종교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모르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유대인들이 이 사람들을 얼마나 무시했는지, 아예 개 취급했습니다.

 

이렇게 무시받는 게 당연하다 여기던 이방인 지역, 하나님을 모르는 나라에 예수님이 가셨는데, 또 그곳에서 한 여성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요라고 하는데, 여지없는 이방인이라는 뜻이고, 그래서 사람 취급할 수 없을 만큼 하찮고, 종교적으로도 불결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정결법이나 여러 종교적 형식과 절차가 중요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온 이 여인은, 종교적으로 가장 멀리 있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 여인도 이것을 잘 알았겠지만, 자기 딸이 귀신에 들려 너무 힘들어서, 수모를 각오하고 너무나 어렵게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각오를 넘어, 예수님은 최소한의 예의를 두지 않고, 거칠게 쏘아붙이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여성이니, 개나 마찬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 가치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였으면 더럽고 치사하다 욕하며 뒤돌아섰겠지만, 이 여인은 개 취급하는 예수님 앞에서,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며 자신을 철저히 낮춥니다. 자신을 개 취급하는 것도 받아들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받으려 합니다. 여인의 이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사건이, 앞의 정결논쟁 다음에 나온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 사건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이 여인의 믿음, 그리고 이 여인이 예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이지만, 이 두 사건을 이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신앙인들에게 바라시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해 주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 나름의 방법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가장 큰 관심과 중심은 언제나 밖이었습니다. 자기들 속을 가꾸고 변화시키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미는 것에만 혈안이 되었습니다. 겉이 곧 진실인 것처럼 죽을힘을 다했지만, 예수님은 이에 대해 아예 저주를 퍼부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경고와 저주로 인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삶에는 소망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딸이 귀신에 들린 수로보니게 여인은, 단지 어려움을 당한 사람만을 뜻하는 게 아니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과는 정반대의 사람을 뜻합니다. 평생 하나님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모르는 사람, 평생 종교적 업적이나 직분이나 명예가 없는 사람, 종교적으로는 불결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명예와 업적과 겉이 좋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인정하시거나 칭찬하신 게 아니고, 저주하셨고,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살아온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지금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하는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종교적 업적이나 자랑거리 하나 없으면서도,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길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겉을 치장하고, 잘 보이고, 자랑하려 하지 말고, 철저히 속을 가꾸고, 성숙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이 종교생활이 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남에게 높아 보이고, 잘나 보이기 위해 하려는 그 어떤 것도 철저히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며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길이 영생과 소망의 길이 되고, 지금 하는 모든 수고가 하나님의 복을 받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신앙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답게 속을 가꾸고, 성숙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겸손하게 성실하게 믿고 사는 자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으로 가득한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