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순간 새로운 마음이어야 합니다
성경: 마가복음 6장 53-56절(신 64쪽)
찬송: 420(너 성결키 위해; 통212), 295장(큰 죄에 빠진 나를; 통417)
설교: 20171210.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며칠 전에 큰 화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아이가 여섯 살 때, 갑자기 몸에 이상이 와서 지역에 있는 대학병원에 갔는데 소아마비로 진단을 받았다고 합니다. 소아마비는 주로 어렸을 때 생기는 병으로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 하는 병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학교에 다니면서도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고, 그러면서 장애인으로서 많은 차별과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아이의 부모는, 아이를 치료하기 위해 중국까지 갔는데, 큰 차도를 못 보고 13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는 중에, 물리치료사가 소아마비 증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보고, 큰 병원에 가보라 권유했습니다. 더 큰 병원에 가서 전에 찍었던 MRI 필름을 보여주었더니, 약을 처방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먹었더니, 이틀만에 머리를 들 수 있게 되었고, 3,4일 지나니 아이가 자기 발로 혼자 걸어 나왔다고 합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 찾아간 병원에서는 소아마비로 진단했지만, 병원에서 잘못 진단한 것이고, 실제로는 다른 질병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원인을 알아서, 그에 맞는 약을 먹었더니, 단 며칠만에 이렇게 큰 효과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아이가 제대로 된 약을 먹어 몸이 회복되고 걷게 되었을 때, 아이 본인도 그렇고, 가족도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아이가 다시 걷게 되었을 때를 아이 아버지가 이야기하는데, 눈물 날 정도로 기뻤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한 편으로는 이렇게 며칠 걷다가 다시 못 걷게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답답하고 막막했다고 합니다. 아이도 걷게 되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기쁘지만, 다시 못 걷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되고, 그 걱정이 악몽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겁니다. 그만큼 건강을 회복하고, 걷게 된 것이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이 알려진 것은 며칠 전이지만, 이 아이가 제대로 된 약을 먹고, 몸을 회복하고 걷게 된 것은 약 5년 전의 일입니다. 5년 전부터는 움직이고, 걷는 것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지금은 대학에 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과연 13년 동안 누워 지내거나, 휠체어로 움직여야 했던 사람은 지금 어떤 마음일 것 같습니까? 다른 것은 다 놔두고, 걷는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도 걷는 것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여전할까요?
물론 당시 그 일 때문에, 그 사람은 걷는 것에 대해 더 크게 감사할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움직이고 걷는 것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당연하게 생각해서 감사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움직일 수 있는 것과 걸을 수 있는 것에 대해 크게 기뻐하지 않죠? 걷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0년 넘게 제대로 움직이지 못 하고, 걷지 못 했으니, 그때의 기억 때문에,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더 기뻐하고, 감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고 기뻐하는 크기는 당시보다는 분명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우리처럼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겠지만, 처음 걷게 되었을 때의 설렘과 감사와 기쁨 정도까지는 아닐 것입니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설렘과 감사와 기쁨은 점차 줄어들 것이고, 더 긴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어쩌면 우리들처럼, 움직이고 걷는 것에 대해 기뻐하거나 감사하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병상에 누워있고, 휠체어를 타고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소원과 기쁨이 무엇일까요? 자기 힘으로 움직이고 싶은 대로 움직이고, 가고 싶은 곳으로 걸어서 가는 것이겠죠? 그러니 오진으로 13년 동안 소아마비로 살아온 그 사람의 가장 큰 소원도 역시 자기 힘으로 움직이고, 자기 발로 직접 걸어 다니는 것이었을 것이고, 제대로 된 진단과 약을 통해 가장 큰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감사와 설렘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것이 몇 번, 몇 년 반복되고, 그래서 익숙해지면 설레는 마음도, 기쁨과 감사의 마음도 점차 사그러들게 됩니다. 나중엔 설렘과 감사의 자리에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이 자리하게 되어, 간절함도 사라지게 됩니다.
남녀가 아무리 크게 사랑해도, 결혼해서 함께 긴 시간을 보내고 나면 거의 예외 없이 권태기를 겪게 됩니다. 권태기가 되면, 사랑할 때 가졌던 간절함과 설렘도 사라지고, 봐도 그저 그렇고, 괜히 이것저것 밉고 싫은 모습만 크게 보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남녀의 만남에서만이 아니라, 일과 물건도 그렇습니다. 처음엔 간절하고, 설레고, 기쁘면서도, 그것이 반복되고 익숙해지면, 당연하게 생각하는 정도만으로도 다행일 정도로, 나중엔 오히려 귀찮아하고 싫증을 느끼기도 합니다.
기대할 때까지는 이루어지기만 하면, 물건을 받기만 하면 금세 큰 변화가 일어날 것 같고, 감사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좋은 기분과 감사는 오래 가지 않습니다. 빠르면 받는 순간부터 기대감도 사라지고, 금세 실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이전에 가지고 있던 기대감도, 감격도 모두 사라지고, 무슨 소원이 이루어졌는지, 무슨 기대를 하고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 할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 바람직한 모습이라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익숙함 때문에 나태해지고 게을러지는 것을 ‘타성’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타성, 익숙함 때문에 감사도, 감격과 설렘도 모두 사라지고, 그저 습관만 남지 않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해서, 감동과 설렘이 모두 사라져버리고, 습관과 형식만 남은 우리의 삶과 신앙생활은 절대 당연한 게 아닙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말씀드렸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숨은 기적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엔 당연한 것이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움직이고, 걷고, 먹고, 일하고, 사는 것마저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고 은혜입니다.
신앙생활 역시 내가 선택해서, 내가 하나님께 선심 쓰듯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고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것이고, 세상 속에 있는 우리를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고, 영생을 향해 나아가게 하신 선물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습관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것에 대한 감동이나 기쁨이 사라진 채 무감각해져서는 안 되고, 마음과 생각을 새롭게 하고, 감사와 감격을 되살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 앞에서는, 바람 때문에 바다에서 고생한 제자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난 직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다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밤중에 호수를 건너던 제자들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맞바람을 겪게 됩니다. 대부분이 어부 출신들로서, 호수와 바람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경험이 많았던 제자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바람이 거세고, 파도가 컸습니다. 문제는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전혀 생각하지 못 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는 큰 위기에 처한 제자들을 구해 주시려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을 유령이라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모습이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위치함으로써, 바로 이어 나오는 오늘 본문과 비교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 사람들의 모습은, 예수님 제자들의 모습과는 정반대입니다.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지도 않고, 예수님을 유령으로 생각할 만큼 예수님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던 제자들과는 달리, 본문 속에서는 사람들이 아주 적극적으로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한 밤중 호수 가운데서 제자들이 큰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예수님께서 이것을 보시다가 직접 찾아오셔서 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건너편 게네사렛이라는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게네사렛과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예수님 제자들이 호수 한가운데서 보였던 모습과 비교해 보면 어떤 것 같습니까? 뭔가 둘의 모습이 바뀐 것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처럼 행동하는데,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 예수님을 잘 모르는 게네사렛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인 것처럼, 예수님을 찾고, 도움을 구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합니다.
게네사렛에 도착해서 예수님이나 제자들이 사람들을 모이라고 광고한 것 아닙니다. 큰 기적을 행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 지역에 도착한 지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지역 사람들은, 그 배에서 내린 분이 예수님이심을 알았고, 55절에서 보면, 예수님이 그 지역 어디에 계시든지, 그 지역 전체를 뛰어다니며 병자들을 모아서 찾아왔습니다. 게네사렛 지역 사람들의 적극적이고 신실한 모습은 예수님 제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겠습니까? 예수님을 가장 잘 알아야 하고, 그래서 가장 먼저 도움을 구할 줄 알아야 하는 이들은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큰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님을 찾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마음에 크게 두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게네사렛 지역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는 데 얼마나 열정적이고 간절한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그 지역에 오시겠다고 예고하신 것도 아니고, 한밤중에 갑자기 그 지역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자 몰려들기 시작했고, 일부 사람들은 지역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혼자 움직일 수 없는 이들을 들것에 메고 왔습니다. 예수님이 읍내에 가시든지, 시골로 가시든지, 환자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예수님이 고쳐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게네사렛 지역 사람들의 이런 모습은, 예수님 제자들의 모습과 정반대입니다. 게네사렛 지역 사람들은,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행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찾지도 않고, 찾아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 합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요? 제자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잘 모르고, 게네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더 잘 알았기 때문일까요?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얼마나 많은 기적을 경험했습니까? 또 자신들이 밖으로 나가서 많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호수를 건너기 바로 전에도, 오병이어 기적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체험했습니다. 하지만 게네사렛 지역 사람들은, 예수님 가까이에 있지 못 했습니다. 잘 해야, 한두 번 기적의 자리에 있었을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문으로 들은 것이 전부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온갖 기적을 경험하고, 또 기적을 일으켰던 제자들이면서도, 기적이 가장 필요할 때 예수님을 찾지도 않고, 예수님을 생각하지도 못 하는 믿음 없는 자들처럼 된 까닭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능력과 기적에 대해 타성에 젖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 곁에서 기적을 처음 경험할 때는, 입이 딱 벌어지고, 설레고, 기쁘고,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적이 반복되고, 자주 일어나자, 제자들은 이에 대해 더 이상 크게 생각하지 않을 만큼 무감각해지고 말았습니다. 기뻐하지도 않고, 놀라지도 않고,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능력을 작고 사소한 것으로 한정시키고 맙니다. 모든 것을 행하시는 능력으로 생각하지 않고, 좋은 약을 처방해 의사처럼 병을 고치는 정도, 한 끼 배부르게 해주는 부자 정도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감동도 없고, 간절함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게네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고, 기뻐하고, 간절하게 사모하는지 모릅니다. 이들에게는, 예수님은 모든 병과 아픔과 고통을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 여겨진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행할 수 있는 기적과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잘 압니다. 그러니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이 계신 곳을 보고, 자신들만 예수님을 찾아가는 게 아니고, 기적과 치유의 능력이 필요한 사람들까지 모두 찾아서 데리고 갔던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 게네사렛 마을 사람들처럼 살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 하루는 당연한 게 아니고, 숨은 기적과 같은 날들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도저히 버틸 수 없을 만큼 힘겨운 날들, 우리 힘으로 헤어날 수 없는 일들과 어려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도, 영생을 바라볼 수 있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의 삶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살아 있는 것에도, 영생을 바라며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사는 것에도 무감각해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의 삶을 당연하게 여기며, 감사나 감격도 없고, 기쁨도 없이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많은 기적과 은혜를 수없이 겪었으면서도, 더 감사하고, 더 간절한 게 아니고, 더 무감각해지고, 주님을 잊어버린 모습이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의 모습을 돌아봐야 합니다. 매일 매순간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삶에 무감각해지지 않도록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기적과 같은 기회임을 인정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을 더욱 의지할 수 있습니다. 또 주님을 더 의지해야만, 모든 어려움과 아픔마저도 주님의 도움으로 이기고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과 모습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오길 원하십니다. 그래야 바른 신앙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바르게 응답함으로써, 행복과 기쁨 가운데 사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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