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71217)꼭 필요한 것에 힘써야 합니다(막 7장 1-13절)

청명하늘 2018. 5. 21. 01:06

꼭 필요한 것에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

 

성경: 마가복음 71-13(64)

찬송: 456(거친 세상에서; 509), 540(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219)

설교: 20171217.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두 가지 음악을 듣겠습니다.

 

(아리랑 미국 버전; 53-1:7)

먼저 들을 곡은 미국인들이 부르는 노래인데, 음이 많이 익숙하죠? . 우리나라의 전통 민요인 아리랑입니다.

 

다음 곡은 우리나라의 가수들 중에서, 노래 잘 부르기로 유명한 임재범이라는 가수의 노래입니다.

(‘고해’ )

 

이 두 곡을 들으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혹시 이런 생각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고귀한 예배 시간에 세상 노래를 트나? 그것도 예배 중에서 가장 귀한 순서인 설교 시간에, 찬송가를 듣는 것도 아니고, 세상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속된 노래를 틀었는가? 저 목사가 미친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그 동안 우리나라 신앙인들 중에서, 보수적인 경향을 지닌 이들의 대표적인 생각들이었습니다. ‘영적인 것은 선하고, 육체적인 것은 나쁘다. 교회 안에 있는 것은 거룩하고, 교회 밖 세상의 것들은 모두 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세상 잡것들이나 부를 민요를 교회에서 부른다는 것, ‘술마시고 자빠져 노는 세상 것들이 즐겨 부르는 유행가를 교회에서, 목회자가, 강단에서 부른다거나, 입 밖으로 꺼낸다는 것 자체가 불결하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을 불경스럽게 하는 큰일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흔히 세상 노래’ ‘세상 것들이라고 하는 노래를 교회 안에서 듣고 부르는 게 더러운 것인가요? 반대로, 교회 안에서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은 거룩하고 깨끗한 것인가요?

 

그러면 이건 어떤가요? 교회 안에서는 예배를 많이 드리고, 기도와 찬송도 많이 합니다. 헌금도 가장 많이 합니다. 그런데 교회 밖에 나가면, 온갖 못된 짓을 저지릅니다. 남에게 상처를 주고, 남에게 피해 끼치는 일을 합니다. 못되고 나쁜 일을 저지르면서도, 언제나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부르고, 또 성경을 줄줄이 외웁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은 과연 어떤 평을 받아야 할까요? 거룩한가요? 아니면 추한가요?

 

반대로 교회 밖에 나가서는 찬송가와 복음성가는 전혀 부르지 않고, 온갖 세상 유행가를 입에 달고 다니지만,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살아간다면, 이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까? 나쁜 사람입니까?

 

이것을 보면, 우리가 믿음의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겉모습들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어리석은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믿음이 좋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산다고 생각하는 이들 중에는, 바로 이렇게 전혀 쓸모없는 것들에 목숨을 거는 이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겉모양만 좋고 깨끗하면, 그것이 거룩하고, 믿음이 좋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는 크고 깨끗하게 지으면서도, 그 교회를 사람의 욕심과 거짓으로 채우지 않습니까? 정작 깨끗하게 해야만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으면서도,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절대시하면서 지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을지라도 속의 것들입니다. 속이 곧 본모습입니다. 겉모습은 속을 조금 드러내는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겉모습을 화려하고 예쁘게 꾸미고 가꾸어 드러내려는 것보다는, 우리의 속을 가다듬고 가꾸어, 꼭 필요한 것을 채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속은 보이지 않아서,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겉모양에만 힘쓰고 노력하다가는, 정작 필요한 것을 채우지 못 하는 빈껍데기 같은 삶이 되고 맙니다.

 

앞에서 아리랑과 고해라는 두 곡을 들려 드렸는데, 흔히 세상’, ‘세상 것들’, ‘세상 노래’, ‘대중가요을 비난하면서, 교회에서 부르는 것만을 거룩하고 좋은 것이라고 판단하는 게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나라의 아리랑은, 미국과 캐나다 등 여러 나라에서는 교회 찬송가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잠깐 드린 노래는, 미국인들이 찬송가로 부르는 내용입니다.(아리랑 53-1:26)

 

고해라는 노래도, 그냥 일반적인 대중가요처럼 보이겠지만, 본래 이 곡은 복음성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곡을 지은 사람의 이야기로도, 이 노래는 본래,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노래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야기를 노래로 부른 것이라고 합니다. 최근엔 이 곡이 여러 가지로 수정돼(버전으로) 불리지만, 본래는 중간에 이야기 식으로 나오는 부분이 성경요절입니다.(‘고해’ 3:20-3:44)

 

영어라 잘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내용을 들으면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begotten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verlasting life.”이라고 합니다. 해석하면,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그렇게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은 것 같죠? 맞습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절인 요한복음 316절 말씀입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세상 것들이라고 무시하고, 욕하고,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들, 그리고 교회 안에만 있으면 무조건 깨끗하고 거룩하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있습니다. 겉은 그대로 민요곡이고, 유행가이지만, 주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내용이 있어서 찬송가가 되고, 복음성가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디에서 누가 부르느냐 하는 겉모양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겉모양만에 치중하고, 겉모양만 그럴 듯하게 살아가는 게 아니고, 우리 속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애쓰는 것을 뜻합니다. 겉이라는 게 전혀 가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속의 가치에 비하면 그 크기는 보잘 것 없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보면, 속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과 노력이 크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겉을 포장하고, 가꾸고, 드러내기에 급급합니다. 마치 속은 드러나지 않기에, 전혀 가치가 없고, 남들에게 잘 보일 수 있는 겉이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자신이 잘 보이고, 잘 드러나고, 잘나 보이도록 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겉은 말 그대로 포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된 가치는 겉이 아니라 속사람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는, 겉모양을 가꾸고, 드러내는 것보다, 우리의 속을 가꾸고 성장시키려 노력해야 합니다. 불필요한 겉치장에만 힘쓰다 보면, 정작 중요한 속사람에 힘쓰지 못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신앙생활을 실패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논쟁을 벌입니다. 이 논쟁이 시작된 까닭은, 2절에 나온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 중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었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를 보고, 예수님께 항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씻지 않은 손을 부정한 손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씻지 않은 손이라고 하면, ‘씻지 않은 손이라고 하거나, ‘더러운 손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죠? 그런데 여기에서는 부정한 손이라고 했습니다. ‘부정하다의 반대말은 거룩하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무엇을 먹을 때는 반드시 깨끗케 하는 의식인 정결 의식을 행한 후에 먹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사람이 깨끗해진다고 믿었습니다. 누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으면, 배탈이 나거나, 병에 걸린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게 아니고,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더러워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손을 씻느냐 마느냐 하는 것을, 위생과 연관시키지 않고, 자기들만이 가지고 있는 기준인 정결의식에 맞춰 봤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손 씻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 규정이 있었습니다. 4절 말씀처럼, 잔은 어떻게 씻어야 하고, 주발은 어떻게 씻어야 하고, 놋그릇은 어떻게 씻어야 한다는 많은 규정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규정들을 지켜야만 거룩케 된다고 장로들의 가르침에서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손을 씻지 않고 무엇을 먹었다는 것은 부정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아무리 더럽고 추해도, 정결의식에 따라 손을 씻고 음식을 먹으면 그 사람은 거룩하게 됩니다. 반대로 아무리 깨끗하고, 의로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으면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 것 같습니까? 손은 안 씻어도 깨끗한 마음으로 살고, 감사할 줄 알고, 바르게 살면서 음식을 먹는 것을 칭찬하실 것 같습니까? 아니면 씻은 손으로 먹되, 온갖 더러운 일을 저지르면서 부정한 마음으로 먹는 것을 좋게 보시겠습니까?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생각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의 상태야 어쨌든 손을 씻고 먹으면 깨끗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주 부정한 사람들이요, 잘못된 사람들입니다. 부정을 밥 먹듯이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살림살이가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손을 씻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굶지 않고 먹는 것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따지러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지적에 대해 답변하십니다. 6절에서는 외식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외식이란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언뜻 들으면 하나님을 존경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말로는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인 것 같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겉모양으로만 보면, 믿음이 좋고, 하나님의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더럽고 추해서, 도저히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 이들은 외식하는 자가 되었습니까?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계명은 겉을 보기 좋고, 그럴 듯하게 바꿀 수 있을지 모르나 속은 바꾸지 못 합니다. 사람의 계명은 항상 중심에 가있고, 나의 확장인 우리가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이 이것을 우리에게 증명해 줍니다. 만일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의식을 통해 깨끗해질 수 있다면, 평생 손을 씻고 음식을 먹었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거룩하고 깨끗한 사람이 되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까? 멀리 볼 것도 없이, 오늘 본문 속에서, 손을 씻지 않는 것 때문에 항의하러 오는 모습만 봐도, 이들의 평소 모습이 어떨지 눈에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들은 여전히 추하고 더러운 눈으로 다른 이들을 보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관심을 가질 일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들은 다른 일은 모두 뒤로하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트집 잡고 비난할 일만 찾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자기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나 도끼눈을 뜨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삶은, 참 쓸 데 없는 일에 힘쓰느라, 꼭 필요한 일을 버린 삶입니다. 이들의 삶에 대해 예수님은 화가 임할 것이라 저주하셨습니다.

 

종교생활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려면, 지금 힘쓰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정말 힘쓸 것에 힘쓰고 있는지, 혹 힘쓰지 않아야 하는 것들에 시선을 고정하고 사느라, 정작 필요하고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살지 않는지 자꾸 돌아봐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겉을 꾸미는 일에 익숙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이럴 땐 어떻게 나를 포장하면 다른 사람들이 좋아할지 알게 됩니다. 저럴 땐 어떻게 말해야 성숙한 성도가 된 것처럼 보일지 느끼게 됩니다. 상황과 분위기에 맞춰 능숙하게 바꿔갈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화려하고 다양한 말로 표현된다고 하더라도, 속사람은 변하지 않은 채, 겉만 바꾸는 것은 영적으로 부정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겉포장이 벗겨지면, 하나도 변하지 않은 자신의 본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 내에서도 이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모습이 자주 보이지 않습니까? 한 주에 몇 번 예배에 나와야 믿음이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으면서도, 무슨 예배를 드리고,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참석하면, 거룩해지고, 성숙한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예배와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자기 속을 변화시키고 성숙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면서도, 예배 회수와 기도의 시간으로 기준을 삼는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정결법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은 겉만 생각하고, 속은 생각하지 않는 이런 모습들, 자기중심적이고 가식적인 모습에 대해 주님은 칭찬하신 게 아니라, “너희 전통이라고 꾸짖으실 겁니다.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예배, 하나님과 상관없는 기도라는 뜻이고, 하나님과 무관한 예배와 기도와 삶이라면, 말 그대로 시간낭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겉모양보다 꼭 필요한 속을 바꾸고, 성숙시키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겉은 아무리 포장해도 겉일 뿐입니다. 겉은 그럴 듯하고, 멋지게 변했어도, 그 속이 바뀌지 않으면 의미 없습니다. 속이 변화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날마다 우리의 삶을 씻어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꼭 필요한 것에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이 말씀에 귀 기울임으로써, 우리의 속을 참되고 거룩한 것으로 채우고, 꼭 필요한 것에 바르게 힘씀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의 복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녀들에게 주시는 복과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