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80114)우리의 사소한 것마저도 주님의 관심사입니다(막 8장 1-10절)

청명하늘 2018. 6. 23. 00:53

우리의 사소한 것마저도 주님의 관심사입니다

 

성경: 마가복음 81-10(66)

찬송: 539(너 예수께 조용히; 483), 405(주의 친절한 팔에; 458)

설교: 20180114.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격언처럼 사용되는 것들 중에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어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이 말에서는 배부른 돼지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비교되고 있습니다. 돼지는 우리가 잘 아는 짐승입니다만, ‘배부른 돼지란 물질에 대한 욕심을 앞세우느라, 정신의 자유를 생각하지 않는 삶을 의미합니다.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로서, ‘배고픈 소크라테스란 정신의 자유를 최고로 생각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어라는 말은, 먹고사는 것만을 위해 사느라, 정신의 가치를 잊고 사는 것은 수준이 낮은 것이니 그렇게 살지 말고, 다른 것보다 정신적 가치와 자유를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살라는 뜻입니다. 좀 더 쉬운 말로 하면, 돈 많이 벌어서 배불리 먹고, 편하게 살려 하는 것은 배부른 돼지같은 것이고, 가난하고 배고프지만, 삶의 의미를 고민하며, 삶의 가치를 찾으려 애쓰며 살려는 것이 배고픈 소크라테스같은 삶이라는 뜻이고, 많이 갖고, 배불리 먹는 것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좀 가난하고 부족하더라도 삶의 참된 가치와 의미를 찾아 애쓰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정신적인 가치가, 물질의 가치와 육체적인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인데 이 말에 동의가 되십니까? 물론 정신적인 가치도 무척 중요합니다. 정신적 자유와 가치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많이 갖고 배부른 것만을 생각하며 살면, 그것은 짐승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짐승들은 배부르고 편하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이것이 짐승들의 최고의 목표이자, 최고의 기쁨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와는 다릅니다. 또 달라야 합니다. 그래야 짐승 같은 삶을 살지 않고, ‘사람 같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짐승과의 차이를 만드는 인간의 삶이란 바로 정신적인 가치를 찾고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단지 배불리 먹고, 편하게 사는 것에 머물지 말고, 이보다 더 높고 귀한 삶의 가치를 생각하며, 그것을 존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만큼 인간에게 정신, 그리고 정신적 가치는 중요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어쩌면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정신적 가치와 의미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러나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 물질의 문제가 무가치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돼라는 격언에서는 정신적 가치가 물질의 가치와 중요성보다 더 귀하고 높은 수준이라고 말하지만, 이 두 가지 모두 높고 낮음이 없이 함께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존과 정신적 가치가 함께 있어야 행복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습니다.

 

생존에 대한 집착과 물질에 대한 욕심만 있고, 정신적 가치와 의미를 생각하지 못 하면,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이지만, 반대로 정신적 가치를 알고, 이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물질이 없다면 그 삶도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먹고 살만한 상황이 안 되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같은 삶이란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한 삶이란, 정신적 문제와 더불어 먹고사는 문제까지도 모두 채워져 있어야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 부자로 사는 사람이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고 비극적인 삶을 사는 경우가 있죠? 우리나라에서 부자 순위로 몇 번째 안에 드는 사람들 중에도, 삶을 불행스러워하다가 비극적으로 삶을 끝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많은 이들이 오직 잘 먹고 잘 사는 문제만을 위해 사는데, 이것으로는 행복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적인 자유와 행복과 만족이 우리 삶에도 모두 필요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먹고 사는 생계 방법과 물질이 부족한 사람도 역시 정신적인 자유와 만족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만일 이 땅에 그 누구와도 인간관계를 맺지 않고, 혼자만 살아간다면, 정신적인 자유와 만족으로도 살 수 있을지 모릅니다. 먹고 사는 것이 부족해도, 부족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만족하며 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리고 더불어서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배우자가 있고, 자녀가 있고, 부모가 있고, 형제자매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데도, 자기 혼자 정신적인 자유와 행복이 최고라고 하면서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자기 혼자 굶주린 것은 어떻게 해서든 참을 수 있고, 다른 이유를 대며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린 자녀나 자손들, 사랑하는 사람이 며칠째 못 먹어서 고통을 당함에도, 자기는 정신적인 만족이 최고라거나,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더 낫기에, 그래도 행복하다며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굶주리지 않고 배부르고 즐겁게 사는 것도 중요하고, 정신적인 자유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이 둘은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한 쪽이 부족하면, 우리 삶의 절반 가까이를 잃어버린 것이고, 그래서 만족이나 행복으로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습니다. 이를 신앙으로 고백하기도 하며, 기도할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 나라와 구원과 영생을 생각하며 신앙생활하다 보면, 자칫 예수님을 정신적인 문제, 영적인 문제만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 높은 하늘에만 계시고, 예수님은 아주 먼 옛날,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계셨고, 좋은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구체적인 현장, 지금 이 순간, 나의 집과 일터와 논밭에서 하나 하나 간섭하시고, 나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시고, 우리의 사소한 문제까지도 관심을 가지시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구원과 영생을 향해 가는 것에도 물론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만,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제대로 먹고사는지, 지금 무엇으로 고민하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지까지 모두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 아버지로만 계신 게 아니고, 지금 이 땅에서의 아버지로서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사랑으로 우리의 일을 대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631, 32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이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말고, 마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한 것처럼, 오직 정신적인 행복과 만족, 영적인 것들만을 위해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장 기본이 되는 생계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서 아시고, 우리를 위해 준비해 주시기 때문에, 지금 상황이 어렵다며 염려해서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우리의 삶의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간섭하시고, 해결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기적을 행하셨다고 해서 오병이어의 이적으로 부르는 사건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마가복음 6장에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을 다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7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로 사천 명 정도를 먹이셨다고 해서 칠병이어라고 부릅니다. 오병이어 이적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두 이적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오병이어 이적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남자 장년 수만 해도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성인들이 모였다면, 그 중에는 분명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식과 지혜가 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돈 많은 사람, 권력 있는 사람들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다양한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많은 이들을 목자 없는 양같아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것은 영적, 정신적으로 길을 잃어버린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사랑을 잘 보여주십니다. 많은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지식과 지혜와 힘을 모으면 뭐든지 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많은 이들이 모였음에도,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어디를 향해 살아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이들을 외면하시지 않고, 불쌍히 여기시고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시고, 먹여주심으로써, 인생길에서 어디를 향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갈 바 모르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친히 목자가 되심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의 주제는, 오병이어 이적을 행하신 때와는 다릅니다. 영적이고 정신적인 문제를 도우시는 예수님을 보여주시는 게 오병이어 기적이었다면, 오늘 본문인 칠병이어 사건은, 우리 생계와 관련된 것입니다. , 우리가 먹고사는 것,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고, 행하시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2절에서 보면 큰 무리가 먹을 것이 없는 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수준이 높은 거라 말하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와 어려움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불쌍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불쌍히 여기다는 말은 함께 고통을 당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굶주림의 문제,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사소한 문제까지 관심을 기울이신다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다른 세상에서 사는 분, 우리의 현실과는 먼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분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관심을 갖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신다고 하니 큰 위로와 힘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큰 어려움 때문에 한숨을 쉴 때, 예수님께서도 함께 한숨을 쉬시고, 우리가 슬퍼하면 예수님께서 위로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함께 슬퍼하십니다. 우리가 눈물 흘리면 힘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함께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쌍히 여기신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을 오병이어 사건과 비교해 보면, 이렇게 볼 수 있지만, 더불어서 오늘 본문 앞인 마가복음 7장과 연결해서 볼 수도 있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서는, 예수님은 신앙생활에서 겉보다 속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속에는 관심이 없고, 겉만 꾸미고, 다른 이들까지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꾸짖으시고 다투셨습니다.

 

그러나 속이 중요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겉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게 아니고, 속은 없고 겉만 가꾸려는 게 거짓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진실과 간절함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오면 어떤 복을 받는지를 말씀해 주셨고, 오늘 말씀도 그것을 다시 확인시켜 주시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3일 동안 계속 예수님과 함께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주 먼 곳에서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어디에서 찾아왔든, 3일 동안 예수님과 함께할 사람이라면, 이들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마음이 겉모양만을 치장하고 가꾸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직접 행동으로 옮겼던 것입니다. 겉만 생각하고, 겉이 곧 진실이라고 생각한 사람이었다면, 아무것도 없는 빈들에서 3일을 예수님과 함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3일 동안 함께한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속을 채우고, 겉으로는 주님 가까운 곳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이처럼 겉포장으로 남을 속이려는 마음이 아니라,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온 이들에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진실한 마음과 겉마저도 주님 가까이 머무는 자들의 문제에 주님이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기적을 행하셔서라도 그런 자녀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들의 먹고사는 문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사소한 문제까지도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들, 고민들, 아픔 등이 참 많습니다. 특히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라 더욱 힘듭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관심을 가지시고,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한 방법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여기에는 영혼 구원의 문제뿐만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문제, 먹고 사는 문제 등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너무 사소하고, 개인적인 것까지 아뢰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못 한 적이 있습니까? 신앙생활은 오직 영혼과 구원과 영생만의 문제라고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영혼의 문제와 영생만이 아니라,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들까지 관심을 가지고 해결해 주십니다. 특히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온 자녀들에게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와 아픔과 고민에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특히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고, 주님 곁에 머무르면, 우리의 작은 것까지 함께하시고,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해결해주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기억하고, 더욱 주님 앞에 우리의 모든 문제를 맡기고 의지함으로써, 영혼의 복만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과정에서도,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 속에 날마다 복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