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80624)타인의 신앙을 방해하지 않도록(막 11장 11-18절)

청명하늘 2018. 9. 3. 20:07

타인의 신앙을 방해하지 않도록

 

성경: 마가복음 1111-18(73)

찬송: 314(내 구주 예수를; 511), 352(십자가 군병들아; 390)

설교: 20180624. 주일낮예배

 

 

 

덥고 바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안 좋은 기억입니다만, 교회에서 작년에 두 명의 교인에 대해, 예배와 교회 출석을 금하는 조치를 내렸습니다. 이것을 교회 행정 용어로 치리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 교회에서 치리라는 제도가 이름만 있을 뿐, 실제로 처리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나라에 교회와 교단이 워낙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옛날 기독교 국가처럼, 온 국민이 기독교만을 신앙으로 가질 때라면, 치리와 출교는 사회적 사형선고라 불릴 만큼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고, 기독교에도 또 많은 교단과 교회들이 있습니다.

 

한 종교만 있거나, 천주교처럼 교단이 하나만 있으면, 치리와 권징을 받은 사람들이 갈 데가 마땅치 않습니다. 어떤 죄와 잘못을 저질렀고, 그래서 어떤 치리를 받았는지를 모두가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교단이 많아져서 치리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에서 치리를 받았다 하더라도, 합동이나 기장 등 다른 교단으로 가면, 어떤 치리를 받았다 말하기도 어렵고, 어떻게 해달라고 말하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잘못을 저지른 교인에 대해 치리와 권징하기 쉽지 않은 또 다른 까닭은, 교회가 워낙 많아지고, 그래서 교회 운영이 어려운 현실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한 교인이 떠나면,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게 되고, 그러면 그 교인이 교회에서 차지하던 부분이 어려움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교인 수가 많고, 교회 형편이 넉넉하면, 일부 교인들이 떠나도 교회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은 교회들에게는 한두 교인이 큰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에, 갈등과 다툼 속에서도 끌어안고 계속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대곡교회에서, 두 명에게 교회와 예배에 대한 금지한 것은 아주 드물고 특이한 일입니다. 대곡교회는 교인 수가 많은 것도 아니고, 재정이 넉넉한 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이전 목회자로 있었던 사람들이었으니, 아주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만큼 특이하고 어렵게 치리하고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는데, 그 일에 대해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잘 한 것 같습니까? 아니면 용서하고, 참아서 함께 신앙생활하는 게 좋았던 것 같아 아쉬워하거나 후회하십니까?

 

저는 대곡교회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라, 여러분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어렵지만, 당시 대곡교회는 교회라고 불리기 어려울 만큼, 형편이 어렵고,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한 명이 아쉽고 어려우니, 그대로 안고 가야 하느냐, 아니면 기약이 없지만, 썩은 부분은 살이 될 수 없기에, 아픔을 감수하고 잘라내느냐 하는 것으로 오래 고민했습니다. 더불어서, 혹시 새 목회자가 이전의 목회자 사이의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이나 갈등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을 가장 염려했습니다.

 

우리가 속한 교단에서는, 권징과 치리에 해당하는 것들을 헌법으로 정해 놨습니다. 15가지 조항인데, 그 중에 몇 가지를 보면, ‘예배를 방해한 행위’ ‘이단적 행위와 이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행위’ ‘치리회 석상, 교회의 제직회 또는 공동의회의 석상에서 폭언, 협박, 폭행, 상해, 재물손괴 행위등입니다. 이 외에도, 여러분은 자세히 모르시거나, 기억하지 못 하시는 일들이 워낙 많았습니다.

 

이렇게 교회에서 일으킨 말썽과 잘못은 분명하고, 권징 사항들임에도 불구하고, 권징 때문에 오히려 교회에 더 큰 어려움을 안겨주는 것이 아닌지 하는 점들을, 오래 동안, 신중하게, 수많은 상황까지 계산하며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대곡교회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 있는 교회 출입과 예배 금하도록 결정했습니다.

 

작고 어려운 교회, 나아질 가능성이 별로 없는 교회임에도, 그렇게 아픈 결단을 내린 까닭이 있습니다. 권징의 조항에 해당되는 것이야 워낙 많고 분명하지만, 이보다 더 큰 기준이 있었고, 그리고 다른 것보다 이것 때문에 결정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교인들의 신앙을 방해하고, 흔들리게 하고, 무너뜨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성품, 성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을 것 같습니까? 또 작년과 같은 상황이었으면,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고, 어떻게 행하셨을 것 같습니까?

 

성경에는 예수님의 성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말과 행동에서 그 속의 것들이 드러나기 마련인 것처럼,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 등을 통해서 예수님이 평소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셨는지,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누가복음 734절 말씀에서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자기 민족을 배신하고, 자기 욕심을 위해 로마 정부의 하수인으로 일하는 매국노로 여겨졌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민족 사람들에게는 미움을 받고, 로마 사람들로부터는 무시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죄인의 친구라는 말은, 사람을 해치거나, 법을 어기거나, 남의 것을 도둑질 했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다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평소 소외되고 미움받는 사람들까지도 가까이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라는 누가복음 627절 말씀, 그리고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마태복음 544절 말씀에서는, 다른 사람도 아닌 원수까지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큰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이해도 안 되고, 따르기 너무 힘든 말씀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사신 것을 보면, 예수님은 그렇게 원수마저 사랑하시는 분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의 크기와 깊음과 너비가 대단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는 마태복음 1129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평소 거친 말씀이나 행동이 없이, 모든 사람에게 부드럽고 온유하게 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범위도 우리의 한계를 넘어 원수에게까지 확장시키신 분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성품과 말씀들만으로 판단한다면, 예수님은 분노나 거친 말과는 거리가 먼 분인 것 같습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고, 어떤 일을 겪으시더라도, 절대 화를 내시거나 거친 행동을 벌이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거친 말씀이나 폭력을 행하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온유하시고, 원수까지 사랑하실 만큼 사랑의 폭을 넓히셨던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보이신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생각한 모습처럼 보입니까? 아니면 예상하지 못 할 만큼 전혀 다른 모습입니까?

 

본문에서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그곳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셨습니다. 돈을 바꿔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상을 뒤엎으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보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성전에서 제물로 팔리고 있던 양이나 소를 내쫓으셨습니다. 힘없고 소외된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모자라, 원수까지도 사랑하시고, 우리들에게 원수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모습을 생각해 보면, 성전에서 보이신 예수님의 행동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생명의 말씀을 주시고, 하늘의 것을 위해, 이 땅에서 욕심과 욕망의 그릇들 줄이고, 그 자리를 먼저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라 말씀하셨고, 우리의 이웃과 교인들에게 함부로 말하는 자마다 지옥불에 던져진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입니다. 마태복음 521, 22절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라가라는 것은, ‘속이 빈’ ‘쓸모없는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쓸모없다” “네까짓 게 뭔대?” “미련한 것이...” 등의 말이, 살인죄처럼 무서운 죄이고, 이런 죄를 저지르면 엄청난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남에게 함부로 말하고, 대하는 것이 너무 큰 죄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직접 말씀하신 예수님이 남을 욕하신 일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234절에서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고 하셨고, 마태복음 2333절에서도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또 누가복음 1332절에서는, 헤롯 왕의 교활하고 거만한 모습을 보시고 여우라고 욕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이런 모습들은 우리의 생각과는 너무 다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온유하시고, 말씀도 조용히 하시고, 누군가를 욕하시거나 경멸하시지 않을 것 같고, 언제나 화평만을 위해 사실 것 같은데, 심지어 성전 안에서 상을 뒤엎고, 채찍을 휘둘러 짐승들을 내쫓으시고, 독사와 여우라며 욕하시는 것이 모두 예수님이 보인 모습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이렇게 폭력적으로 행동하시고, 저주의 말씀을 하실 때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대로 살지 못 하고,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지 못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의 언행과 가르침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나쁜 영향을 주고, 믿음을 방해했다는 것입니다.

 

언행이 안 좋은 사람들은, 그들의 잘못에 대한 보응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주신다는 복을 못 받고, 오히려 벌만 받을 것이고, 그렇게 끝까지 고집하다가는 영생도 받지 못 합니다. 본인들의 말과 행동에 따른 대가를 자신들이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행동과 말로 다른 사람에게까지 나쁜 영향을 끼치고, 그래서 다른 사람의 신앙까지 방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남의 신앙을 방해하고, 나쁜 영향을 끼치는 자들에 대해서는 용서하고 받아들이시지 않습니다. 그것이 연약한 인간이기에 보일 수 있는 수준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이는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시고, 빼앗고 생명까지 해치는 강도라 하시고, 교활하고 난폭한 여우라고 하십니다.

 

부드럽고 좋은 말로 독사를 타이른다고 해서, 독사가 유익한 짐승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여우에게 잘 대해주고, 참고 기다린다고 해서, 그 교활함과 사악함이 바뀌지 않습니다. 강도가 손에 들린 칼을 내려놓지 않는 이상 참고 인내해 봤자, 그 피해만 더 커지게 됩니다. 강도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 하고, 독사와 여우가 바뀔 가능성이 없다면, 남은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지 못 하도록, 하나님의 자녀들을 병들게 하지 못 하도록 해야 합니다. 먼저는 악한 자들 권해야 합니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고, 바뀌지 않으면,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얼씬거리지 못 하도록 철저히 차단시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무섭게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그곳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밖으로 내쫓으시고, 그들의 상을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17절에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하셨습니다. 거룩한 성전, 모든 사람이 기도하는 성전에 예수님이 들어가셔서, 거룩한 곳을 어지럽히고, 소란스럽게 하고, 혼란케 하신 까닭은, 성전 안에 있는 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기도와 예배를 방해하고,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성전은, 교회처럼 원하는 사람이 아무나 들어와서 예배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교회로 예를 들면, 본당 안에는 유대인들 남성만 들어올 수 있었고, 교회 식당에서는 유대인 여성이 들어올 수 있었고, 외국인이거나 소외된 사람들은 교회 마당 부근까지만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전을 바꾸고, 제물을 파는 장사는 바로 외국인이나 소외된 사람들이 제사하는 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제물로 사용된 비둘기나 양, 염소, 소 등이 시도때도 없이 울어대고, 장사하는 사람들의 소란한 소리 때문에, 힘없는 사람들이 집중해 기도하거나 예배할 수 없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남의 예배와 은혜를 방해하지 않는지 지극히 조심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주님의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이들의 신앙까지 해치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 과정이 잠시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예수님처럼 과감하고 고치고 잘라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더불어 우리가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에 방해거리가 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만큼, 우리 이웃에게도 사랑을 베푸십니다. 아니 우리보다 신앙이 약한 사람을 더 많이 돌보고 계십니다. 이것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에서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의 예배와 신앙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누구 때문에 교회 못 나가겠다고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어리석은 고집만 부려,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기 싫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차별해서 상처를 받고 교회 나오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이 성전 장사꾼이 자기 욕심을 부리다가 이방인들의 신앙생활을 방해한 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런 모습을 철저히 버려야 하고, 남의 신앙을 병들게 하고, 잘못 인도하는 자들을 과감히 잘라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복으로 가득한 삶을 살 수 있고, 소망이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과 명령에 따라 행하며, 주님이 대곡교회를 세우신 목적처럼, 모든 사람이 기도하고 예배할 수 있는 집, 교회에 나아온 사람마다주님을 만나는 통로로 만듦으로써, 주님의 은혜와 복을 풍성히 누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