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80617)구원을 위해 오신 주님으로 믿어야 합니다(막 11장 1-10절)

청명하늘 2018. 9. 3. 19:59

구원을 위해 오신 주님으로 믿어야 합니다

 

성경: 마가복음 111-10(73)

찬송: 428(내 영혼에 햇빛; 488), 452(내 모든 소원; 505)

설교: 20180617.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매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에 대해 설명하거나 말할 때, “매력 있다혹은 매력 없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매력에 대해 국어사전에서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설명처럼, 누구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어서, 주위에 몰리고 함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없어서, 가까운 곳에서 겪고 알아가면서, 오히려 가까이했던 사람들마저도 멀어지고 떨어지기도 합니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인 매력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 자체입니다. 여기에는 됨됨이, 인격, 성격, 성향 등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매력의 다른 한 가지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재산과 권력과 외모, 유명세 등이 포함됩니다.

 

사람 됨됨이가 됐다. 사람이 괜찮다는 것은, 사람 자체를 좋아하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인품이나 성격이나 철학 등이 좋으면, 그 주위에는 사람들이 모이고, 함께하고,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와는 달리, 어떤 사람이 가진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고 함께할 수도 있습니다. 권력이 큰 사람들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권력자가 비록 잘못된 생각을 품고 있어도, 사람들이 따릅니다. 권력에서 나오고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정권만 보더라도, 너무나 터무니없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최고 권력자로 있었음에도, 그 밑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줄을 섰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 주위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돈을 가진 사람이, 비록 됨됨이가 좋지 못 하고, 그만한 그릇이 되지 못 한다고 하더라도, 그 주위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마련입니다. 부정하고 못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가진 돈으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근 우리나라 최대 항공사 일가족의 일명 갑질이 뉴스에 오르고, 조사를 받고 있을 정도로 잘못 살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그 주위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는 조건,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두 종류로 나눈다면, 이 두 가지 중에, 어떤 이유로 따르는 것이 더 가치가 있겠습니까? 사람 자체를 보고 따르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사람이 가진 조건 때문에 따르는 것이 더 좋은 것이겠습니까? 사람 자체가 좋아 따르는 것이 어렵지만 훨씬 더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조건에 따라 좋아하고 따른다는 것은, 조건이 변하면 언제든지 돌아서거나 떠나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들 주위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러나 권력이라는 조건 때문에 따른다면, 그 권력이 사라지면 뒤돌아서고 떠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기에서 얻을 것을 바라며 모여드는 이들이 많겠지만, 그러나 그 돈이 사라지면, 그래서 더 이상 얻어먹을 것이 없게 되면 모두 떠나고 말 것입니다. 돈이 사라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더 많은 돈을 가진 사람, 자신에게 더 많은 돈을 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금세 뒤돌아서고 말 것입니다.

 

우리말 속담 중에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넘쳐도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에 비하면 개의 가치는 비교가 안 됩니다. 게다가 정승이라고 하면, 요즘으로 보면 국무총리, 부총리 등을 일컫습니다. 왕 다음의 최고 권력자입니다. 그런데 정승이 죽으면 사람들이 찾아가지 않으면서도, 왜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상한다는 말이 있고, 또 이 말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겠습니까? 정승이 죽으면, 정승이 가지고 있던 최고의 권력이 없어진 것입니다. 더 이상 정승의 권력으로부터 얻어먹을 것이 없습니다. 정승의 권력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이에 반해 개는, 사람들의 문상을 받을 정도의 가치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정승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정승에게 잘 보이려고 죽은 개를 문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속담의 상황을 예로 든다면, 정승이 죽어도 찾아오는 사람이라면, 죽은 정승도 괜찮은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고, 더불어 찾아오는 사람도 역시 그 됨됨이도 칭찬을 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정승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까이하고 찾아왔다가도, 정승이 죽어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며 찾아오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됨됨이가 못되고 부족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종려주일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 있었던 일입니다. ‘종려주일이란 시기로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내신 마지막 주일입니다. 지금 우리로 생각하면, 이번 주 금요일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데, 바로 오늘이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시기입니다. 그리고 종려주일이라고 이름이 붙은 까닭은, 예수님이 당시 서울이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를 흔들며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종려나무는 지금 우리도 볼 수 있는 것인데, 야자나무로 이해하면 쉽습니다. 본당 앞 화분에도 두 그루 있고, 교회 뒤편에 큰 나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번영과 아름다움과 승리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이 당시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승리하고 번성하기를 바라며 환영하는 마음으로 흔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의 모습은, ‘종려주일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참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그것도 단지 따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셔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자기들을 구원해 달라는 뜻으로,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호산나라고 외치며 따랐고, 거기다 어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예수님이 타신 나귀 앞에 놓기도 했고, 이것이 없는 사람은 자기들이 입은 옷가지를 그 앞에 깔았습니다. 철저히 자기들을 낮추고, 예수님을 높이는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이후에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통해 사형선고를 받아 예루살렘에서 나가실 때는 어떻습니까? 몇 여인들은, 고통받는 예수님의 모습이 안타까워서 따랐습니다. 마태복음 27장과 마가복음 15장에서는, 죽음의 길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을 따르며 슬퍼한 여인들의 이름을 기록했습니다. 바꿔 보면,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의 자리까지 따르는 사람들은, 이름을 따로 기록할 만큼 극히 소수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한 제자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 20명만 되었어도, 그렇게 이름을 따로 기록하지 않았을 것임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가신 마지막 고난과 십자가의 길이 괴로울 뿐만 아니라, 얼마나 외롭고 허무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 앞에 나아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자기 옷을 예수님이 타신 나귀 앞에 깔았던 그 사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마태복음 21장에 따르면, 예루살렘 성에 소동이 일어난 것처럼 들뜨고, 환호하고, 예수님을 환영했던 그 사람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환영하며, 예수님 앞에서 나뭇가지와 옷을 흔들고 깔았던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의 마지막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는, 예수님의 아픔과 고통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도 아니었고, 그 상황이 슬퍼서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앞장서서 외치는 사람들로 있었던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본문의 시기와 예수님이 죽으시는 날은 불과 5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온 성이 떠나갈 듯 흥분해 예수님을 환영하며 큰 소리로 외쳤던 사람들이, 다섯 달도 아니고, 50일도 아니고, 5일만에 이렇게 변해버린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까지는, 예수님이 능력이 있는 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이고,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언덕을 향해 가실 때는,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할 능력마저 없어서 죽어가는 위선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까지는,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실 거라 여겼습니다. 자기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내쫓으시고, 자기들의 여러 아픔과 어려움을 해결해 주실 만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권력자들에 붙들리시고, 온갖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거기에서 별다른 능력을 드러내시지 않고, 침묵하시며 모든 것을 그대로 받으시는 것을 보면서,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더 이상 자신들의 삶에 도움이 안 된다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렇게 해달라고 누가 부탁한 것도 아님에도,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보며, 자기들이 먼저 모이고, 자기들 스스로 나뭇가지를 들고 흔들고, 옷가지를 그 앞에 깔았던 사람들이 무엇을 목적으로 주님을 따랐는지 확인이 됩니다. 주님이 좋아서, 혹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인 영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가지신 다른 조건들을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병을 고쳐줄 만한 치유자, 그 어떤 귀신마저도 쫓아내실 만한 권위자, 필요하면 기적을 통해서도 먹을 것을 베풀어 주시는 능력자로서만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가지신 것, 주님이 베풀어 주시는 것들만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상황과 조건이 바뀌면 언제든지 돌아서고, 떠나고, 심지어는 돌을 던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절하며, 환영하던 사람들이 이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병 고쳐주심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의 병을 고쳐주지 않을 것처럼 판단되거나, 혹은 자신의 병을 빨리 고쳐줄 수 있는 다른 유능한 의사를 만나면 주님을 떠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나의 가난과 배고픔을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이를 해결해 주시지 않거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자기를 배불리 먹여주고, 넉넉하게 만들어 준다고 하면, 언제든지 주님을 향해 돌을 던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이 덤으로 주시는 것들에만 매달리면,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언제든지 변질과 변절될 가능이 아주 높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이 가진 다른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해 변하지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귀의 주인입니다. 나귀의 주인이 정확히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사람이 예수님이 가진 다른 조건과 상황에 따라 변질되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만일 나귀의 주인이, 조건을 위해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었다면, 나귀를 가져가는 사람이 누군지, 어떤 일에 이용할 것인지, 언제 돌려줄 것인지를 약속되지 않았음에도, 무작정 나귀를 내줄 수 있겠습니까?

 

나귀의 주인은,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예수님이 성에 들어오시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았고, 그 자리에 나아가 나뭇가지와 옷가지를 흔들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인다는 한 마디에 나귀를 내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을 믿었고,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다른 조건들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으로 믿고 만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나귀 주인처럼, 예수님이 오심,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예수님만을 바라고, 이것 하나만으로 만족합니까? 아니면, 뜨겁고 열심히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덤으로 주실 수 있는 것들만을 바라며 나아온 수많은 군중들처럼 믿습니까? 자신이 어떤 것을 위해, 무엇을 향해 나아왔는지 구분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 중, 하나님께서 하나씩 빼앗아 가신다면, 어디까지, 무엇까지 참고 인내하며 믿음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가진 건강을 빼앗아 가셔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지금 갖고 있는 재산을 빼앗아 가신다 하더라도,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주님을 붙잡고 믿으며 살 수 있습니까? 지금보다 더 잘되고, 성공하게 된다는 보장이 없어도, 여전히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만을 믿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질병을 고쳐주신다고 할 때만 믿는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 때문에 믿는다면, 주님이 우리의 삶을 잘되고 성공하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할 때만 믿는다면, 그것은 주님을 믿는 게 아니라, 주님이 주신 선물만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쁜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고, 이런 믿음도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이 우리의 소원과 기도에 응답해 주실 때는 잘 따르면서도, 더 이상 얻어먹을 것이 없으면, 믿음의 걸음을 머뭇거리거나 뒤돌아서버린다면, 우리의 모습이 오늘 본문에 나온 수많은 군중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주님을 믿는 게 아니라, 주님이 가지신 것을 믿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아프고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까닭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병을 고쳐주시고, 돈을 벌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역 중에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와 신앙인으로 살고 있는 게 아니고, 구경꾼 혹은, 예수님의 사역과 역사를 즐기고 있는 관람객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일 예수님만을 바라며 따르지 않고, 부수적인 것들만을 위해 따른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취미생활에 그치고 맙니다. 취미생활처럼 주님을 따르거나,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로, 주님의 제자로 살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가장 목표이자 목적입니다. 이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과 말씀을 되새기고, 주님을 구세주로,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는 구원자로 믿고 따름으로써,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생과 더불어 이 땅에서의 복도 함께 누리며 살아나아가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