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권위를 분별해야 합니다
성경: 마가복음 11장 27-33절(신 75쪽)
찬송: 358장(주의 진리 위해; 통400), 449장(예수 따라가며; 통377)
설교: 20180708.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신학대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들 중에 ‘목회 실습’이라는 과정이 있습니다. 지금도 같은 이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과목에서는, 목회 현장에 있는 여러 목사님들이 와서, 학생들이 나중에 목회 현장에 나가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가르칩니다. 이 과목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주제들 중 하나는, 담임 목사와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기억으로는,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무조건 담임목사 편에 서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부교역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나중에 담임목사가 되면, 자기가 생각하는 목회를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부교역자로 있으면, 이런 문제가 가장 어렵고 힘들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목사 안수를 받고, 한 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게 되었는데, 몇 개월만에 사임하고 싶었고, 실제로 1년여 만에 사임의사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비록 여러 가지 문제로 2년만에 사임하게 되었지만, 그만큼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마음으로는 언제든지 떠날 준비와 바람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목사로서 사역이 어려움이 많겠지만, 가장 큰 어려움은 담임목사, 그리고 설교 문제였습니다. 교회에서 예배와 설교에 관한 권리는 담임 목사가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을 때니, 담임 목사가 언제 무슨 예배에서 설교하라고 지정해 줬습니다. 이것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설교를 시킬 때마다 주제까지 정해 줬습니다. 그것도 주제는 언제나 비슷했습니다. 충성, 헌신, 순종, 질서 등입니다. 설교에 관한 권한을 담임 목사가 가지고 있으니, 이것까지도 따르는 것이 부교역자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교회들 중에는, 담임 목사가 부교역자들의 설교를 미리 점검하고 승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교역자들은 목회 경험이 적고, 또 신학적인 지혜가 부족해서 성경에서 벗어나거나, 교인들에게 해서는 안 될 말들을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부목사니, 설교마다 주제를 정해주는 것까지도 힘들어도 받아들이는 게 맞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받아들이기 어렵고, 견디기 힘들어 한 까닭은, 담임 목사가 주는 모든 주제가 담임 목사 자신을 향하도록 주문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충성에 대한 말씀은 성경에 수도 없이 많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충성이 우리의 영생과 연관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꿔 보면, 본인은 믿는 것 같은데, 마음과 열정이 없이 형식적인 신앙생활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헌신에 관한 말씀도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아직 도달한 게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인 동시에 일꾼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일꾼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까지 바쳐 헌신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말씀하신 것도, 제자들에게 헌신을 명령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순종에 관한 말씀도 얼마나 많습니까? ‘믿음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선조로 불립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보면, 다른 위대한 선지자들처럼 지혜의 말씀을 전한 것도 아니고, 기적을 행한 것도 아님에도, 신앙인들에게는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까닭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만큼 신앙생활에서 순종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질서도 신앙생활에서 중요합니다. 교회에 질서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실제 10여년 전에 서울에 있을 때,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큰 교회에 몇 번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당시 그 교회는, 담임 목사파와 반대파로 나뉘어서 격하게 싸웠습니다. 실제로 예배할 때도, 같은 예배당에서 두 파가 나눠서, 각자의 설교자를 두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다 결국 두 교회로 나뉘었습니다. 교회에 질서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많은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착각하는 게 이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충성, 헌신, 순종, 질서는 모두 하나님을 향한 것이어야 하지, 목회자 자신을 향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이고,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교인들을 멸망의 길로 이끄는 일입니다. 그런데 목회자는 이런 주제가 성경에 나온다며, 목회자 자신, 즉 사람을 향하도록 요구합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주제가 성경에 나왔다고, 목사를 하나님처럼 따라서는 안 됩니다. 충성은 목사라는 직분을 가진 사람을 향해서 해야 하는 게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 해야 합니다. 헌신도 목사라는 사람의 편의와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것들을 향해야 합니다. 목사라는 직분을 가진 사람을 향해 순종해서는 안 됩니다. 목사가 아무리 유명하고, 능력 있고, 큰 교회를 운영하고, 잘났어도 결국은 사람입니다. 질서도 무조건 목사가 시키는 일대로 따르는 게 질서가 아니고, 하나님이 각자에게 맡겨주신 한계 안에서 맡겨진 일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이런 것들을 하나님을 향하도록 요구하지 않고, 자신을 향하도록 설교합니다. 담임 목사들이 왜 이렇게 잘못된 것을 요구하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교회 운영이 쉽고 편해지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담임 목사의 말에 무조건 따르는 사람이 많은 게 편하겠습니까? 계산하고 살피고 좋은 대로만 따르는 사람이 많은 교회가 편하겠습니까? 당연히 시키는 대로, 말하는 대로 따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편해집니다. 그러니 자꾸 충성과 헌신과 순종이 목사 자신을 향하도록 가르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인들의 입장에서도, 목사가 시키는 것을 따르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세뇌와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특히 이런 모습은, 이단일수록, 문제가 많은 교회일수록 많이 나타납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던 이단에서 성폭행을 당한 여신도는, 육체적 관계를 통해 죄가 씻긴다는 목사의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것이 순종이고 헌신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헌신이나 충성도 아니고, 순종도 아닙니다. 그저 맹신에 불과하고, 어리석음에 불과합니다.
목사의 모든 권위와 권한은 철저히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것에 한정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말씀을 토대로 바르게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것이 자신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으로서 의무이기도 합니다. 더불어서 신앙인이기에 누릴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사람의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예수님을 추궁하고, 하나님의 권위 위에 서려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이 세대에 많은 목회자와 교인들이 보이는 모습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그곳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으셨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팔리던 짐승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이들이 다른 사람들, 특히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힘없고 나약한 사람들의 신앙과 제사를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 밖으로 나가서 하루를 묵으신 후, 다음 날 다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이곳저곳을 거닐고 계실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님께 와서 “무슨 권위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님께 와서 무슨 권위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물을 때의 분위기가 어땠을 것 같습니까? 이 사람들이 좋은 목적으로 와서, 점잖고 얌전하게 질문한 게 아닙니다. 이때의 분위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험악하다 못 해 공포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
먼저는 예수님께 와서 따지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와서,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는 것도, 채찍으로 제물로 팔리던 짐승들을 쫓아내시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무슨 권위로 그런 일을 하느냐는 질문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지게 하는 것이었는데, 예수님은 이에 빠지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되물으심으로써 이들을 곤란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분위기가 얼마나 무섭고 험악했는지, 이 질문과 답이 오간 후에,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하고, 마가복음 14장에 1절에서는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일들을 이들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 싶어 할 만큼 분노한 까닭이 있습니다. 당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장사를 허락하고 관리하는 일은 대제사장들, 종교 지도자들의 모임인 산헤드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성전은 이스라엘 전국에 단 하나만 있습니다. 이 성전을 세우는 데도 60년 이상이 걸릴 만큼 철저히 준비하고, 온갖 귀한 자재를 이용해 만들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온 백성이 오직 하나님만 믿어야 하는 나라고, 최소 몇 번은 그곳에 가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요즘 장사로 보면, 독점이고, 황금알을 낳는 곳입니다. 그러다 보니 성전에서 장사하려는 사람들이 많고, 당연히 성전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장사하는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수익을 얻어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라는 젊은 청년이 제자 몇 명과 나타나서, 장사하려고 펴놓은 상을 뒤엎고, 제물로 팔리던 짐승들까지 쫓아내니, 이들이 얼마나 당황했을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힘으로 예수님을 쫓아내지 못 한 까닭은, 당시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때인지라, 혹시 예수님이 로마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책임지던 사람들은 예수님께 무슨 권위로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파놓은 함정을 아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사람으로부터 권위를 받았다고 답하면, 이 사람들은 로마 정부의 권위가 아닌 한, 자기들이 성전을 책임지고 있다며 예수님을 쫓아냈을 것이고,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받았다고 답하시면,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재판에 넘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인지, 사람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되물으심으로써, 이 함정을 벗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고민했습니다. 요한이 준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면, 왜 세례 요한을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고, 요한의 세례가 사람으로부터 왔다고 하면, 세례 요한을 참 선지자로 믿는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반발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세례 요한의 권위가 어떤 권위인지, 어디에서 온 권위인지 모르겠다고 답했습니다.
여기에서 성전을 관리하고 책임지던 이들의 관심사와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단 하나입니다. 자기들에게 유익하느냐 아니면 손해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진실을 알고, 그것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이들은 예수님께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세례라고 답하면 되고, 사람으로부터 온 세례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답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진실이 무엇인지에는 전혀 마음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손해가 되는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도움이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틀린지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좋은 것이고, 자신들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면, 무조건 나쁜 것입니다.
본문 속 종교지도자들, 성전 관리자들의 이런 모습이 왠지 낯설어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워낙 익숙한 모습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많은 교회에서, 강단에 선 목사들의 설교에서, 능력을 가졌다고 말하는 기도자들로부터 나오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권위의 출처를 말씀하시지 않지만, 예수님의 권위는 누구에게서 받은 것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받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성전에서 바른 말씀을 전하실 권위, 성전에서 나쁜 것을 없애실 수 있는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권한은 사람이 만든 산헤드린이나 제사장의 권위보다 위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만든 그 어떤 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가 먼저이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권위를 사용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권위는, 세상적인 지식이나, 세상적인 이익이나, 죄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목회자, 교역자의 권위는 이렇게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과 말씀에 한정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설교단에서 한 마디 한 마디 조심해야 하고, 세상적인 생각, 자기의 생각을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권한이나 권위를 갖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은 바른 믿음에 서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있는지 고민하고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바르게 전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자신에게 거칠고, 손해가 나고, 이해가 되지 않아도 철저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교회에, 목회자에게, 성도들에게 허락하신 권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권위를 알도록 지혜를 주시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하나님의 권위로 인정하고, 사람의 권위와 분명하게 분별해야,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녀에게 주시는 복과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깨어 기도하며 지혜롭게 분별하고,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날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으로 채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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