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80527)열정보다 방향이 더 중요합니다(막 10장 32-40절)

청명하늘 2018. 9. 3. 01:07

열정보다 방향이 더 중요합니다

 

성경: 마가복음 1032-40(72)

찬송: 287(예수 앞에 나오면; 205), 452(내 모든 소원; 505)

설교: 2018052.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군대에서 살상무기로 사용하는 것 중에 클레이모어라는 지뢰가 있습니다. 보통 크레모아라고 부르곤 합니다. 일반적인 지뢰는, 땅에 묻어서 사용하죠? 땅에 묻어 안 보이도록 준비해서, 그것을 못 보는 사람이나 차량이나 탱크 등이 지나며 밟으면 터지도록 설치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클레이모어 지뢰는 땅에 묻지 않고, 적이 올 것으로 보이는 곳에 땅 위에 세워서 설치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클레이모어 지뢰 속에는 많은 쇠구슬이 들어 있고, 적이 올 때 연결된 선으로 이것을 폭발시키면, 수많은 쇠구슬이 터져 흩어지면서 피해를 줍니다. 군대의 무기인지라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으니, 잠깐 사진으로 보겠습니다.(클레이모어 사진들)

 

이 무기가 사용된 사건은,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입니다. 오래되었지만, 1983년에 이 폭탄을 터트려서 우리나라 사람 17명과 미얀마 사람 4명이 사망하고, 많은 사람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을 암살하기 위해 북한이 벌인 테러라고 합니다.

 

이 지뢰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만드는 것이 단순하고, 또 쉽게 다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해치는 목적으로 만든 지뢰 중에서는 피해를 줄 수 있는 범위가 가장 크다고 합니다. 유효살상거리 즉 죽을 확률이 높은 거리는 50m 정도, 준살상거리 큰 부상을 입힐 수 있는 거리는 100m 정도까지 된다고 합니다. 만들기 쉽고, 또 다루기 쉬우니, 전쟁에서 많이 사용되는 게 당연하겠죠?

 

무기로서 갖는 클레이모어의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약점이자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것 때문에 적군이 아니라, 아군이 다치거나 죽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는 겁니다. 무기란 적을 해치고 죽이려고 만드는 것인데, 왜 이 무기는 적군을 해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군까지 다치게 하거나 죽게 만드는 문제를 가지고 있겠습니까?

 

방향을 잘못 정해 놓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 무기는 방향을 쉽게 바꿀 수 있습니다. 바꿔 생각해 보면, 폭발해서 이 무기에서 구슬이 나가는 쪽이 적이 있는 쪽이어야 하고, 자신과 아군은 이 무기 뒤쪽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무기에 대해 잘 모르고, 처음 접하는 사람이 실수로 방향을 잘못 잡아놓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 무기는 미국에서 개발되어 1955년부터 약 20년 동안 계속되었던 베트남전쟁에서 사용되었고,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기가 개발된 초기에는, 이것을 잘 모르고 방향을 잘못 잡아놓아서, 적을 죽이려 하다가 오히려 자신과 아군이 피해를 입는 일이 아주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이 무기에는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미군의 무기라 영어로 적혀 있는데, ‘FRONT TOWARD ENEMY’ , 적 방향이라고 적혀 있고, 뒤쪽엔 ‘BACK’ 뒷쪽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럼에도 글을 못 읽는 사람들 중에 방향을 잘못 사용해서 아군이 피해를 많이 입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아무리 많이 설명해도 그래도 모르는 사람이 있고, 한 번이라도 방향을 잘못 바꾸면 그 피해가 워낙 크기 때문에, 생각해낸 한 가지 방법이, 자기 배에 대서 곡선의 안쪽이 자기 방향이고, 배부른 쪽이 적의 방향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많은 장점이 있어도, 자칫 방향을 잘못 정하게 되면, 큰 장점들이 오히려 자신을 더 크게 해치고, 망치게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장점과 능력보다는 방향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장점이 말 그대로 자신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방향이 바르게 정해져야 합니다. 방향이 잘못 정해지면, 장점이 단점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 장점들이 없는 게 나을 만큼 그 피해가 커지게 됩니다. 장점이었던 큰 힘과 능력이 오히려 자신을 더 크게 해치고 죽이게 만듭니다. 그래서 장점이 본인에게도 장점이 되고, 유익하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방향을 바르게 정하고, 정해진 대로 적용시켜 나아가야 합니다.

 

큰 힘과 능력이라는 장점보다는 방향이 먼저라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서 필요한 것들, 또 장점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많습니다만, 그 중에 열정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보통 교회의 일이 진행되고 만들어질 때, 교인들 대부분은 그냥 교회당만 오가는 사람들이고, 소수만이 교회의 대부분의 일을 담당한다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을 달리 생각해 보면, 열정과 열심이 있는 소수의 교인들이 교회를 만들어 가고, 다수는 그냥 교인으로 그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 교회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도 열심과 열정이 꼭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열심과 열정이 꼭 필요하다는 것은, 성경 속 수많은 사건과 인물에서도 드러납니다. 또 특히 열심과 열정이 식어버린 것에 대해 주님이 직접 꾸짖는 것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가장 끝에 나오는 요한계시록 2,3장에는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들이 등장합니다.

 

일곱 교회 중에서, 두 교회(서머나, 빌라델비아)는 칭찬만 받습니다. 세 교회(버가모, 두아디라, 사데)는 칭찬과 책망을 함께 듣고, 에베소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는 책망만 듣습니다.

 

그런데 책망만 들은 두 교회 중 하나인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요한계시록 315절에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꾸중만 듣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는 말씀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차지 않다는 것은, 신앙생활을 한다는 뜻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신앙생활하지 않아서 꾸중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도 우리처럼 시간을 정해 놓고 교회에 나와서, 함께 예배도 드리고 찬양도 하고 기도도 했습니다. 이렇게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지만, 이들이 뜨겁지도 않다며 꾸중을 들은 까닭은, 이들이 열심과 열정이 없이 신앙생활했기 때문입니다. 그냥 물에 술 탄 듯, 물에 술 탄 듯 교회는 다니기는 하지만, 그 외의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열심과 열정이 없는 까닭에, 주님으로부터 혹독한 꾸중을 듣는 것만 봐도, 신앙생활에서 열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심과 열정은 신앙생활에서 꼭 필요한 것이고, 이것이 많으면 주님으로부터 약속된 복과 상급을 받을 만한 큰 장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열심과 열정은 있으나, 이것이 오히려 이들의 신앙을 갉아먹게 되고, 성숙한 신앙까지 이르지 못 하도록 만드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다는 것을 세 번째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이 두 사람은 형제고, 아버지의 이름은 세베대입니다.

 

이 두 형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모습은 마태복음 5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먼저 베드로와 안드레라는 두 형제를 부르셨고, 조금 더 가시다 야고보와 요한이 그물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부르셨습니다. 이들이 그물 손질하는 중에 있었다는 것은, 다음 작업을 위한 계획과 준비 중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는 일 없고, 계획도 전혀 없을 때는 과감하게 결단하고 행동할 수 있지만, 하는 일과 다음 계획이 있으면 주저하는 게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해도 되는지 계산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하고 있는 일을 마무리하기 위한 시간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르실 때 야고보와 요한 형제들의 모습에 대해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물질을 하던 베드로와 안드레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야고보와 요한은 하던 일과, 생계수단인 배만 뒤로하고 온 게 아니라, 함께 일하던 아버지까지 두고 과감하게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 모습이 야고보와 요한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보통 이런 모습을 성격이 화끈하다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열심과 열정이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성격이 화끈하다 못 해 얼마나 급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특징을 보시고, 별명을 주신 경우가 있는데, 마가복음 317절에서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레의 아들이란 천둥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보통 천둥 같다혹은 천둥 치는 것 같다고 하면 무슨 뜻이겠습니까? 보통 때는 경험하기 어려울 만큼 갑자기 너무 크게 놀라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누군가의 성격을 표현한다면 무슨 뜻이겠습니까? 성격이 너무 거칠고, 또 너무 심하게 화를 낸다는 뜻이겠죠? 야고보와 요한 이 형제들의 성격이 꼭 이랬습니다. 어떤 상황이 되면,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이렇게 행동해도 되는지 잠깐이라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그렇지 못 했습니다. 생각하거나 계산하지 않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뱉어냈습니다. 이런 모습을 재밌게 표현할 때, “말이 머리를 거쳐 나와야 하는데, 머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입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모습이 이랬습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에, 사마리아 지역으로 선발대를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때 야고보와 요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곳 사람들을 멸망시킬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한 용기와 열정이 유독 남다른 사람들이지만, 그럼에도 이에 대해 절제하지 못 해서, 엉뚱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오늘 본문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 즉 예수님이 세상의 왕이 되시거나, 아니면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계실 때, 그 곁의 가장 높고 좋은 자리를 원했습니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고, 조금만 더 신중하게 말하는 사람들이라면 말할 수 없는 내용이고, 상황입니다.

 

자신들에게 가장 높은 자리를 달라고 하는 말은 웬만해서는 할 수 없습니다. 흔히 염치없다는 말처럼, 말하기 어렵고 부끄러운 말입니다. 함께하는 다른 제자들만 해도 열 명이 있고, 그 외에도 하나님의 뜻대로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가장 높은 자리에 앉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들의 한 일을 높이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일을 무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 두 형제는 아무런 거리낌이나 주저함도 없이 말합니다. 그것도 다른 제자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말했습니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염치도 없고, 절제도 없는 모습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가장 높은 자리를 달라고 말씀드릴 때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아무리 봐도 영광과 자리를 이야기할 만한 때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얼마 있지 않아서 곧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이고, 이것을 세 번째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한두 번이 아니라, 세 번이나 말씀하신 까닭은, 그만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상황을 전혀 깨닫지 못 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 상황을 우리의 모습으로 바꿔 보면 이렇습니다. 아버지가 아파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니, 몇 개월밖에 못 살 거라는 시한부 판정을 받았습니다. 혹시나 검사가 잘못되었나 싶어서 두 번째 검사를 받고, 세 번째 검진을 통해 확진을 받았습니다. 세 번째 검사를 통해 확진 받았을 때, 자녀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대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세 번이나 이야기해 줬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은 아버지가 아프고 곧 죽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고, 유산을 자기에게 가장 많이 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야고보와 요한은, 남다른 열심과 열정이 있었지만, 절제하지 못 하고, 자기 욕심과 욕망으로 드러났습니다. 열심과 열정이 잘못된 방향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신앙생활할 때, 교회의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정도 있어야 하고, 맡겨진 일에 열심도 내야 합니다. 그러나 방향이 잘못되면, 이 오히려 열심과 열정이 없는 게 나은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실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세상의 보상, 사람들의 높은 평가를 기대하는 것으로 나타나서는 안 됩니다. 복과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주관이고, 올해 대곡교회 표어처럼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중에서도, 본문 속 야고보와 요한처럼 절제되지 못 한 말과 행동을 보이기 쉽습니다. 절제되지 못 한 말과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교회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고, 열심히 일한 사람도 역시 말과 행동에 절제가 꼭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칭찬을 받을 만한 열심과 열정 때문에, 오히려 더 큰 책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맡겨진 일에 최선과 열심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때에 바른 방향과 방법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할 수 있는 각자의 은사를 베푸셨습니다. 각자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은사를 귀히 사용하되, 절제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모양대로 사용함으로써, 우리의 삶의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