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80520)영생을 위해 고난을 각오하는 신앙(막 10장 32-34절)

청명하늘 2018. 9. 3. 01:06

영생을 위해 고난을 각오하는 신앙

 

성경: 마가복음 1032-34(72)

찬송: 314(내 구주 예수를 더욱; 511), 320(나의 죄를 정케 하사; 350)

설교: 20180520.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오늘 살펴보는 본문이 마가복음 10장 말씀인데, 작년 봄부터 마가복음 11절에서 시작해 주일낮예배마다 설교 본문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부활절, 성탄절, 추수감사절 등 절기에는 다른 본문을 이용하기도 합니다만, 그 외는 차례대로 본문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문을 차례대로 설교하는 것과, 매주 필요한 본문을 찾아 설교하는 것에는 각기 장단점이 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필요한 본문을 찾아 설교하면, 설교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에 계속 맞출 수 있습니다. 또 교인들의 상황에 맞는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는 교인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그 말씀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목적을 위해 기록되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번 본문이 여기 저리로 바뀌면, 말씀이 주어진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게 됩니다.

 

본문을 여기 저리로 옮겨 설교하게 될 때의 또 다른 단점은, 성경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칫 목회자의 생각이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성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분들은, 목회자가 설교단에서 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에 맞느냐 틀리느냐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그것을 구별할 만한 능력도 없고, 무작정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목사가 설교단에서 하는 모든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 한 경우가 많습니다. 설교자의 지식이 부족해서 성경의 뜻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고, 설교자가 자기 욕심을 위해 의도적으로 본문을 왜곡하거나 전혀 상관없는 말씀을 끌어 쓰기도 합니다.

 

이런 면에서는, 지금처럼 성경 본문을 차례대로 살피고 설교하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 성도들이 덜 혼란스럽고, 또 성경 본문 중심으로 성경을 살피고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방법은 큰 약점이 있습니다. 먼저는 교인들의 삶과 동떨어진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지금 교인들은 대부분 질병 때문에 고민할 때임에도, 성경에서는 질병 문제가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과 영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큰 어려움은, 이렇게 본문을 이어 설교하는 게 무척 힘들다는 점입니다. 본문의 내용이 설교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고, 오히려 설교자가 하기 싫은 본문이거나, 혹은 설교자에게 부담으로 다가오는 때가 더 많습니다. 본문이 이미 정해져 있어서, 어떤 내용과 본문으로 설교할 것인지는 고민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럼에도 본문이 어려워 이해가 안 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어려움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본문의 내용이 반복되어서, 앞에서 이미 설교한 주제와 비슷하다고 여겨질 때입니다. 이럴 때는 본문을 건너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미 같은 주제를 가지고 한 설교를 반복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많은 목회자들이 본문을 차례대로 설교하는 것보다는, 설교하고 싶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본문을 선택해 설교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오늘 본문도 아주 힘들고 어려운 본문에 속합니다. 주제를 파악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해석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달리 해석할 까닭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곧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서 죽으시지만 부활하신다는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주제와 내용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이 설교하기 어려운 까닭은, 반복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대부분의 성경책에서는, 주제가 바뀌면 제목을 달아줍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오늘 본문에다 죽음과 부활을 세 번째로 이르시다라고 했습니다. 이 제목처럼, 오늘 읽은 본문은,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자신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다 부활하신다는 것을 세 번째로 밝히신 내용입니다. 앞에서 같은 내용을 이미 두 번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니이다”(29)라고 신앙고백하자,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다 부활하신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히셨습니다. 931절에서도 고난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 말씀하셨고, 오늘 본문이 세 번째 말씀하신 것입니다.

 

순서대로라면 오늘 본문으로 설교하는 게 당연하지만, 이미 앞에서 같은 내용으로 설교했기에, 오늘 본문으로 설교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서, 마가복음으로 새벽기도회에서 설교한 적이 있어서, 이것을 참고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는 오늘 본문을 어떻게 했나 하고 살펴봤더니, 오늘 본문을 다음 본문과 합해서 설교하는 방법으로 건너뛰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썼던 방법처럼, 건너뛰고 다음 본문으로 넘어갈까를 고민하다가, ‘성경에서는 왜 같은 내용을 세 번씩이나 기록했을까?’하는 기본적인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한 목적 하나만이라면, 이렇게 반복해서 말씀하실 까닭이 없겠죠? 그냥 한 번만 기록해도 우리가 읽어 잘 알 것입니다.

 

특히나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는, 요즘처럼 글을 써서 보관하고 전달하는 게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당시는 종이가 없어서, 기록해서 보관하거 후손에게 전해 주려면, 파피루스라는 풀을 복잡한 과정을 통해 종이로 만들거나, 가죽이나 나무껍질을 이용해 어렵게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글자 하나, 종이 한 장이 귀하고 아껴야 할 때입니다. 그렇게 쓸 곳이 귀한 때, 주실 말씀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다른 말씀을 기록하지 않고, 같은 내용을 세 번씩이나 기록했다면, 우리의 판단과는 달리 분명한 뜻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준비하면서, 이런 점을 다시 생각하고 성경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본문이 나온 상황을 되짚어 보자는 생각까지 하게 되면서, 비로소 오늘 본문의 뜻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서, 부자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살아오며 행한 선행과 율법을 지킨 것으로 영생을 얻으려 했습니다. 이 모습을 예수님의 관점에서 비춰 보면, 어린이처럼 겸손하지 못 하는 모습이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 부자의 모습을 보시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낙타는 쉽게 볼 수 없는 동물인데, 황소나 말보다 큽니다. 이렇게 큰 짐승이, 실을 꿰어 옷을 꿰맬 때 쓰는 바늘의 그 작은 구멍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말씀은, 어린 아이처럼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마음이 어른이 되어 하나님 아닌 그 어떤 것을 의지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자신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앞의 부자처럼, 자신의 업적이나 돈을 의지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릴 만큼 열심히 주님을 따랐다며 인정과 칭찬을 바라며 말씀드렸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 가진 것과 가정을 뒤로한 제자들을 칭찬하신 것이기도 하지만, 더불어서 희생과 결단이 반드시 주님과 복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경고의 말씀이도 합니다. 제자들은 자기의 모든 것을 뒤로한 것만으로 인정받기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희생과 방향이 무엇이고, 누구를 위한 것인지 분명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주님의 말씀인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많지만, 그러나 그 방법과 목적이 잘못되어서, 수고와 헌신마저도 모두 헛것이 되는 사람이 많을 거라는 뜻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 본문에서 십자가 고난과 부활에 대한 세 번째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세 번째 하셨다는 것은, 단순히 주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부활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냥 한 번만 기록되어 있어도, 그것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입니다. 한 번만 기록되었다고 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여러 번 반복해서 기록되었다고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한 번 기록되든, 반복해서 기록되든 하나님의 말씀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똑같은 마음으로 믿고 따라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세 번이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다는 것은, 강조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세 번째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신 까닭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본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앞뒤 본문과 연결해서 살펴야 합니다. 앞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사람은, 버린 것보다 백 배나 많은 복과 보상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버리는 것들에 대해, ,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자식, 전토라고 하십니다. 여러 가지를 말씀하셨지만, 간단하게 보면, 가족과 재산입니다. 보통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그래서 끝까지 지키고 함께해야 할 대상입니다.

 

이 말씀을 단지 글자대로 해석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생에 들어가고, 또 이 땅에서도 백 배나 많은 복을 받기 위해서는, 가족과 재산까지 모두 버려야 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입니다. 그리고 가장 소중한 가족이 평안하게 살기 위해서는 재산도 필요합니다.

 

이 땅에서 가족과 재산이 이렇게 중요하지만, 다음 세상, 그리고 영생까지 포함하고 보면, 영생이 더 귀하고 소중합니다. 이 땅의 가족과 재산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영생을 얻는 것은 지혜로운 선택이지만, 가족과 재산을 위해 영생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이처럼 다음 세상과 영생이 있다는 것을 믿고 선택하며 따라 사는 것이 곧 신앙생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가족과 재산까지 모두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시니, 신앙인은 자기가 영생하기 위해 가족과 재산까지 포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영생을 얻기 위해 가족과 재산을 버리고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족을 사랑하고 지키는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도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온갖 고통을 당하시며, 곧 숨을 거두시기 전에,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그만큼 이 땅의 가족을 사랑하셨습니다. 또 디모데전서 58절에서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위해 모든 것, 심지어는 가족과 재산까지 포기해야 한다는 이 말씀에 대해 신앙인들이 오해하고, 잘못 선택할 것을 염려하셔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걸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합니다. 하지만 고난과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비로소 부활의 영광을 누리실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앞의 말씀과 이어서 보면,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우리의 편함과 세상적인 즐거움을 포기하고 팔아서라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영생이라는 가장 귀한 선물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물을 얻기 위해서는 수많은 고난과 아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 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이고, 이 세상은 죄로 가득하기에,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언제나 평안과 안식과 기쁨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 땅에서 겪어야 하는 고난과 아픔의 길이 싫고 힘든 여정인 데다, 그 결과가 헛되고, 보상마저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 삶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우리 삶에서 욕심나는 모든 것을 참고 포기했는데, 그에 대해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고 끝나고 말면 절망의 연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고난과 아픔의 과정이 아무런 대가가 없이, 우리의 삶을 희생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에 대한 보상과 상급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희생하고 버리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귀합니다. 우리가 고난을 겪고, 희생해야 하는 시간은 길어도 고작 몇 십 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버리고 희생한 것들에 대한 보상은 영원하며, 게다가 이 땅에서의 복까지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이 되며, 주님이 먼저 걷고 모범을 보여주신 것처럼, 주님의 뒤를 따라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걸을 만하게 만드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약속된 은혜와 복은 이 땅의 것들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귀하고 좋습니다. 이를 얻기 위해서는 고난과 어려움과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주님이 먼저 가신 그 고난의 길을 따라 가면, 희생한 것보다 백 배나 좋은 것, 영원하고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더욱 굳세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도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기억하고, 주님이 약속하신 것을 얻기 위해, 이 땅의 것을 희생하고, 담대하게 고난의 길을 걷기로 다짐하며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과 더불어, 이 땅에서도 보상으로 주시는 은혜와 사랑과 복을 함께 받아 누리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