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80429)하나님의 나라를 겸손하게 받아들이십시오(막 10장 13-16절)

청명하늘 2018. 8. 27. 14:42

하나님의 나라를 겸손하게 받아들이십시오

 

성경: 마가복음 1013-16(71)

찬송: 438(내 영혼이 은총 입어; 495), 450(내 평생 소원; 376)

설교: 20180429.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최근 우리나라 기독교의 한 부분에서 일고 있는 운동들 중 한 가지는, 방언 기도를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이 거세고, 그래서 아직 명확한 방향이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동안 방언을 사모하고, 심지어는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 하면 성령님을 받지 못 한 것처럼 여겨지는 상황에서 이런 주장이 일어나니 좀 의아하죠?

 

그런데 그 까닭을 듣고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나라 기독교는 짧은 역사에 비해 엄청나게 발전했습니다. 전세계 역사를 통해 봐도 이 정도의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빠른 성장만 생각하다가는 자칫 내실과 원칙을 잃기 쉽습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 역사에서도 이런 문제점들이 안고 있습니다. 성장과 부흥이라는 이름으로, 교인 수가 늘어나는 것이면 무엇이든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성경과 신학적으로 맞는지, 틀린지 확인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통해 부흥했다고 하면, 어김없이 그것이 좋은 것이라 여기며 그대로 따랐습니다. 방언 기도에 대한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최근 성령님을 받아 하게 되는 방언 기도와 현재 우리나라 기독교에서 하는 방언이 다르다는 점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성경 사도행전에서, 성령님이 임하심으로써 하게 된 방언은, 다른 나라 말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임에도 그 나라 말을 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요즘으로 보면, 영어를 전혀 안 배운 사람이 미국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방언을 하면, 영어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어를 안 배웠지만, 일본 사람들 앞에서는 일본어로 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교회들에서 말하는 방언은, 그 누구도 알아듣지 못 하는 말입니다. 심지어 방언을 하는 본인도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또 방언을 알아듣고 통역해 줄 수 있다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통역해 보면, 모두가 다 다르게 통역한다는 겁니다.

 

방언에 대해서는 좀 더 시간을 두고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중고등학생 때 함께 신앙생활한 분이 여기에 있지만, 저 개인적 경험으로는, 성령의 은사를 많이 사모했고, 또 방언의 은사도 받았습니다. 방언을 많이 하는 게 큰 능력이라고 생각할 때는, 몇 십 가지 방언을 하기도 했으니, 방언 은사를 못 받았다느니, 성령의 은사를 못 받았다느니 하는 등의 말씀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령님이 임하시면 어떻게 변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기독교에서는, 성령님이 임하시면, 방언과 통성기도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여겼습니다. 심하면 방언 기도를 하지 못 하면 성령의 은사를 못 받은 것이라 여기기도 했고, 그러면서 방언을 하기 위해 마치 앵무새처럼 연습도 시키고, 숨도 안 쉬고 주기도문을 계속 반복하면 방언을 하게 된다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볼 것도 없이 잘못된 것이고, 기독교 미신입니다. 훈련을 통해 성령님의 은사가 임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다가는 나중엔 앵무새가 사람을 따라 하는 방언마저도 은사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봐도 성령님이 임하시면 반드시 방언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성령님이 임하시고 방언하는 일이 있었지만, 이것은 은사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방언할 수도 있지만, 방언만이 유일한 은사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린도전서 77절에서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고 말씀하시고,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도 은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이 임하시고, 다양한 은사를 받을 수 있지만, 제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성령님을 받아들인 이들에게서 반드시 나타는 공통적 특징은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것들을 그대로 믿고, 그렇게 살기로 다짐하고, 또 담대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들 대부분이 갈릴리라는 가난한 동네 출신입니다. 가진 것이 없고, 배운 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부족함은 예수님과 함께한 시간에도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당시 그 누구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지혜의 말씀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다른 율법학자들이나 제사장들이 일반적인 교사라고 하면,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박사요, 또 과외선생님으로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여러 차례 반복해서, 또 가장 쉬운 방법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선생님인 예수님이 크고 놀라운 말씀으로 가르치셨지만, 그럼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깨닫지 못 하니 그들의 삶에는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자기 판단대로 생각하고, 자기 입맛대로 말하고, 자기들 고집대로 행동합니다.

 

이렇게 부족하고 어리석었던 사람들, 평생 자기들의 욕심과 판단에 따라 살았던 제자들이, 성령님이 임하신 이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고 죽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비난이 두려워, 하나님의 것을 멀리하던 사람들이었지만, 성령님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기의 목숨마저 기꺼이 버릴 줄 아는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성령님을 받지 못 해서,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대로 살지 못 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금세 잊어버리고,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는 제자들의 모습들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아이들을 데리고 왔는데, 제자들이 이를 막았습니다. 그냥 막는 정도가 아니라 꾸짖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단지 오지 말라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네까짓 것들이 뭔데... 너희들이 와봤자 무슨 도움이 되겠냐?”는 식으로 막았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있기 전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지를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하고, 어리석게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멀리서 볼 필요도 없이, 마가복음 9장에서 제자들이 서로 자기가 크고 높은 사람이라고 다툴 때, 예수님은 36,37절에서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2절에서도,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말씀으로만 하신 게 아니고, 아이들을 직접 앞에 두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오늘 본문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이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지만, 몇 년이 지난 것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를 직접 앞에 세우고 설명하셨다면,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막고 꾸짖었습니다. 몇 년 전의 일도 아니고, 열두 제자들 중 최소한 한둘만이라도 기억했을 것임을 생각해 보면, 그만큼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고, 어떻게 말씀하셔도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 보냈습니다. 제자들의 삶에 예수님은 별로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이 편히 쉬시도록,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어린 아이를 오지 못 하도록 막은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에 나오는, 재산이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올 때는, 어떤 제자도 막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제자들의 판단에, 아이들은 와도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막은 것입니다. 반대로 부자는 예수님과 자기들에게 어떻게든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에 막지 않은 것입니다. 철저히 계산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제자들의 이런 약삭빠른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이 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이 오는 것을 허락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아이들 같은 사람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처럼 받들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의 어떤 모습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가기 위해 가져야 하는 모습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제자들은 아직 갖추지 못 했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어린 아이들의 특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냥 겸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일까요? 예수님이 어린 아이들의 겸손을 말씀하신 것이라면, 우리들이 보는 어린 아이들은 정말로 겸손합니까?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그리 겸손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의 가장 큰 특징들 중 하나는, 참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어릴수록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하고 싶은 대로 말합니다. ‘어리석다는 말이 어리다는 말에서 나왔을 만큼, 어리면 어리석게 행동합니다. 어릴수록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지 못 합니다. 위험한 것이 앞에 있어도, 조심하지 않고 무작정 가까이 가서 손으로 만집니다. 농약처럼 위험한 것이 있더라도, 참지 못 하고 손을 뻗어 만지고, 입에 넣어 확인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어릴수록, 아이에게서 한 시도 눈을 뗄 수가 없이 지켜보고 보호해야 합니다.

 

이런 것만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 아이들의 것이고,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 한다는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어린 아이들이 모두 겸손하다는 뜻이 아니고, 어린 아이들의 기본적인 생각이 겸손하다는 뜻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기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어른의 보호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보호해 주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잘 받아들입니다. 또 자기는 어리니까, 당연히 어른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어린이 취급한다고 해서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전에 있던 한 교회에서, 다른 목사님의 5,6세 정도 되는 아들과 함께 놀아주면서 씨름을 하곤 했습니다. 어린 아이니까 씨름을 해서 지거나 힘들지는 않지만, 일부로 너무 힘든 척하고,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처럼 연기를 합니다. 그러다가 한 판은 이기기도 하고, 일부러 져주기도 하다가 마지막엔 져줍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죠?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 제가 힘을 일부러 덜 주고, 또 일부러 져 주었다는 것을 모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아이의 아버지가 이 아이와 씨름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일부로 져주지 않고 그냥 이겼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이 아이가, “어른은 힘이 세고, 자기는 어린이라 힘이 없는데, 아빠가 힘을 조금만 써야지 다 쓰면 어떻게 해?” 하며 울었다는 겁니다.

 

어려서 정확하게 표현이 안 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아이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어른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른이 힘을 덜 쓰고, 일부로 져 주는 것을 어린이들이 모르는 게 아니고, 알고 있고, 그러면서도 그것을 잘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어린이가 겸손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자기는 못 한다고 생각하며, 쉽게 남의 도움을 받아들이고, 자기는 낮은 대우를 받아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이처럼 겸손하면,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겠다고 할 때 거부하지 않고 잘 받아들입니다. 보통 몸이 어른이 되면, 성장한다고 말하지만, 마음이 어른이 되면, 모든 것을 혼자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도 하고 교만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겠다고 하셔도, 마음을 닫고, 불평하고 원망할 뿐, 도우시려 내미시는 하나님의 손길마저 거부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와 같은 겸손한 사람은, 돕는 손길을 언제든지 받아들일 만한 순수한 마음, 도움을 받아들일 만한 어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길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순수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의 이런 장점을 가르쳐 주시며, 어린이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어린이의 이런 마음을 보고 배우라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마음이 어른이 되고, 마음이 늙으면, 대부분 제자들처럼 변질되기 쉽습니다. 순수해지지 못 하고, 교만해지고 계산적이게 됩니다. 사람 자체를 안 보고, 그 사람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내게 얼마나 유익한지가 기준이 됩니다. 자기에게 도움이 되면 좋은 사람이고, 도움이나 손해가 없으면 그냥 그런 사람이고, 손해가 되면 나쁜 사람입니다. 이것을 처세술 혹은 성공법이라며 포장하지만, 예수님은 이를 두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 하는 교만하고 악한 마음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걸음을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향해 걷는 이 길이 거칠고 험해서 우리의 힘만으로는 제대로 이를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을 보내셔서 먼저 길을 만들어 주셨고, 성령님을 보내셔서 확신을 더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내미시는 도움의 손길 앞에 겸손하게 감사하며 받아야만 소망하는 나라에 이를 수 있습니다.

 

마음의 어른이 되어, 제자들처럼 이것저것 계산하지 말고, 교만함으로 함부로 남을 판단하지도 말고, 우리의 힘으로는 그 무엇도 해낼 수 없다는 낮고 겸손한 마음,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고, 더욱 주님을 의지함으로써, 모두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며, 이 땅의 삶도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더욱 복되고 기쁨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