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80415)주의 약속을 소금으로 두고 화목하십니오(막 9장 42-48절)

청명하늘 2018. 8. 27. 14:25

주의 약속을 소금으로 두고 화목하십시오

 

성경: 마가복음 942-50(70)

찬송: 94(주 예수보다; 102), 436(나 이제 주님의; 493)

설교: 20180415.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지난주에 지인이 다니던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규모가 큰 도시 교회인데, 그 교회가 큰 어려움에 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어려움이 있는 교회들이야 워낙 많아서, 어려움과 문제가 없는 교회 찾는 게 더 빠를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그 교회 이야기를 듣고 이상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던 까닭은, 갈등의 문제가 예배당의 십자가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좀 들어보니, 아주 간단하게 보면, 본당의 십자가를 옮기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십자가를 옮기자는 쪽과 옮겨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나뉘어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싸움이 단순한 말다툼 정도가 아니라, 제직회 시간에 심한 갈등으로 드러났습니다. 서로 격해져서, 나중엔 상대편을 비난하고, 어떤 분들은 상대편을 이단이 아니냐는 식으로까지 비난했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교회에는 예배당에 십자가가 있죠? 그곳 교회 사진을 봤더니(본당 사진), 큰 교회답게 강단 앞에 큰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당에는 설교자나 찬송가 가사나 성경을 보여줄 화면이 필요하죠? 그 교회는 큰 교회답게 큰 화면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화면이 십자가를 막고 있습니다. 화면을 내리면 십자가의 대부분이 가리고, 그렇다고 화면을 안 내리면 또 다른 여러 문제가 생기니, 한 쪽에서 이 십자가를 교회 좌우 한 쪽으로 옮기고, 가운데 화면을 크고 좋은 것으로 바꿔서 편리하게 사용하자고 했습니다.

 

문제는 이 다음부터입니다. 연세가 있는 분들 중심으로, 절대로 십자가를 옮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십자가는 교회와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니, 십자가가 본당 앞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하고, 십자가 이외의 것을 목적으로 십자가를 옮기는 것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옮기는 것을 주장하는 분들도 역시 가만 안 있었겠죠? 교인들의 편의와 교회의 필요에 따라 십자가를 옮길 수 있는 것이지, 십자가를 없애는 것도 아니고, 옮기는 것이 왜 안 되냐며 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자 십자가를 옮겨서는 안 된다고 하는 분들은, 교회에서 십자가를 옮기자는 것은 이단들이 주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곳 교인 한 분의 말을 빌리면, 지금의 상황은 교인 모두가 이 십자가 문제로 격앙되어 있어서, 초긴장 상태고, 어디로 튈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겁니다.

 

십자가 문제 때문에, 이렇게 시끄럽고 갈등이 커진 이 교회의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만약 이와 같은 문제가 지금 우리가 있는 대곡교회에서 일어났다면, 여러분은 어느 편이 옳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리고 왜 그 편이 옳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십자가가 교회와 예수님을 상징하죠? 그래서 교회가 세워지면 밖이나, 높은 곳에 십자가를 답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님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예배당에 있는 십자가를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교회를 거룩한 장소로 여기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교회에는 십자가가 있어야 하고, 십자가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름 괜찮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십자가를 믿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믿는 사람들이지 십자가를 믿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상징하지만,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한 게 아닙니다. 십자가는 상징의 하나일 뿐, 십자가 자체에 능력이 있거나, 십자가만 붙잡고 있으면 능력이 생기거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병원을 상징하는 표시가 있죠? 그런데 이 상징을 본다고 해서, 병이 낫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십자가가 교회와 예수님을 상징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 자체에 능력이 있다고 믿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예수님이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계명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고, 십자가 자체에만 신경 쓰게 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살라고 하신 것에 대해서는 마음이 없고, 십자가를 얼마나 크게, 또 얼마나 화려하게 만들고, 어디에 둘 것인지에만 관심을 두게 됩니다. 이것이 심해지면, 예수님은 없고 십자가만 남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중에서, 2 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입니다. 이 계명에 따르면, 십자가를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십자가 자체가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십자가를 우상으로 만들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10여 년 전에, 우리가 속한 통합 교단에서, 예배당에서 십자가를 없애자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교인들이 십자가를 거룩하게 생각하는 것을 지나쳐, 십자가 자체에 능력이 있고, 구원이 있는 것처럼 믿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십자가에만 집중하는 교인들이 많아서, 우리는 십자가가 아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확인시키려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편의를 위해 십자가를 한 쪽으로 치우는 게 전혀 이상하거나 잘못된 게 없습니다. 필요하면 예배당에서 십자가를 없애는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대한 두 가지 주장은 일리 있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그 반대가 잘못되거나 틀린 것도 아닙니다. 무조건 자기의 주장만이 맞다고 생각하면서, 자기의 의견과 다르다고 해서, 이단이라느니, 신앙에 큰 문제가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서 십자가를 어디에 두느냐는 문제에서, 서로 자기의 판단을 정답으로 여기고, 그래서 다른 의견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교회가 둘로 나뉘어 다툴 만큼 심각하게 생각하는 모습이 왠지 익숙해 보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서로 좋은 신앙, 바른 신앙, 전통, 개혁 등의 여러 이름으로 자기주장을 펴느라, 상대편 의견을 무시하고 잘못되었다고 하는 모습은, 누가 높느냐며 심각하게 다투고 경쟁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예배당 안에 있는 십자가를 어디에 두느냐, 어디로 옮기느냐 하는 문제로 심각하고 심하게 다투는 교회가, 이 문제를 예수님께 여쭌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예수님께 이것으로 질문할 수나 있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이런 것으로 다투고 정죄하는 것 때문에, 부끄러워 차마 질문을 던지지 못 하지 않겠습니까? 가버나움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 뒤를 따르며, 예수님이 듣지 못 하시도록,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다투는 제자들의 모습과 닮아 있지 않겠습니까? 차마 예수님께 질문할 수 없을 만큼 작고 사소한 문제고,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예수님께 질문했다면, 예수님이 뭐라고 답하실까요? 나이 들고 공로가 있는 이들을 높여주라고 하시면서, 십자가를 중앙에 두어야 한다 말씀하실 것 같습니까? 아니면 십자가를 섬기는 게 아니니, 교회의 편의를 위해서 옮겨야 하고, 비교적 젊은 분들의 의욕과 수고에 힘을 실어 주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아무리 봐도, 예수님께 질문할 수 없는 문제 같고, 예수님도 이편이나 저편의 주장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실 것이고, 오히려 이 문제로 다투고 정죄하고 시끄럽게 하는 그 모습을 꾸짖지 않으시겠습니까?

 

심지어 그 교회의 올해 표어를 보니, ‘세상 속에서 거룩한 교회가 되게 하소서였습니다. 세상 속에서 거룩한 교회가 되기를 가장 큰 기도로 삼았으면서도, 그런 작고 아무것도 아닌 문제로 다투고, 정죄하는 것은, 거룩하다는 것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싸우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일인데, 그런 모습으로 무엇을 보여주고, 거룩하게 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를 놓은 문제로 싸우는 문제의 밑바탕은, 사실 십자가를 크고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그 문제를 통해서 자기 의견과 입김대로 이끌고자 하는 자기 높음을 포장할 뿐입니다. 그 겉포장이 걷히고 나면, 서로 높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다만 자기들의 욕망을 십자가라는 무기로 바꿔 남을 공격하고, 상처 주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죄의 유혹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이 나오는 상황을 살펴봐야 합니다. 앞에서 제자들이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다투었는데, 이때 예수님은 섬기는 사람을 하나님이 큰 사람으로 인정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더불어서, 그리스도인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에 대한 보상을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이어집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지고, 심지어는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는, 범죄하게 만드는 손과 발을 자르고, 눈을 빼야 한다는 무서운 말씀이 왜 갑자기 등장할까요? 다른 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일하더라도,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는 말씀으로, 주님의 이름을 위하는 사람으로 인정하라고 하시고서, 갑자기 오늘 본문의 내용을 말씀하시겠습니까?

 

그것은 그만큼 아주 하찮은 사람에게 상처주고, 실족하게 하는 것이 전혀 간단하거나, 그럴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오늘 본문의 내용이 없이, 작은 자를 영접하면 하나님을 영접하는 상을 받고, 그리스도인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반드시 보상하시겠다는 말씀만 들으면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남에게 상처를 주고, 범죄하는 것을 가볍게 여길 것입니다. 이미 받을 만한 상이 크고 많기 때문에, 웬만한 죄와 잘못은 충분히 만회하고도 남을 거라 판단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떤 사람인가요?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생계 수단이었던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가족까지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물 한 그릇만이 아니라, 이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의 여러 가지 능력을 베풀고 도움을 주었습니다. 귀신을 쫓아냈고, 병을 낫게 해주었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 정도면, 물 한 그릇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크고 중요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비록 섬기는 사람으로 살지는 못 했지만, 작은 자에게 물 한 그릇만 주어도 그 상을 반드시 받으리라는 말씀을 통해, 자기들이 그 동안 베풀고 행한 능력과 선행을 먼저 떠올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런 생각과 계산을 아시고, 아무리 업적과 공로가 크고 많아도, 그럼에도 그 누구에게 하는 범죄라고 하더라도 심각하게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오늘 말씀을 주셨습니다.

 

42절에서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고 하십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 신앙인들 중에서 있으나마나 한 사람, 별로 중요하지 않는 신앙인, 교회에서 큰일을 해낼 수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실족하게 하다는 말은 걸려 넘어지게 하다는 뜻인데, 축구에서 공을 가지고 열심히 뛰는 사람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태클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는 사람들이 신앙인이라고 하면, 신앙인들 중에서 특별하게 잘난 것도 없고, 도움도 안 되는 사람. 있어도 도움될 것 없고, 없어도 손해날 것 없는 사람이 곧 신앙인 중 작은 자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는 발을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 이것이 곧 실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잘 것 없는 신앙인 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실망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예수님은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연자맷돌을 사진으로 잠깐 볼까요?(연자맷돌) 보통 맷돌은 사람의 손으로 돌릴 수 있을 만큼 작은데, 이것의 수십 배의 크기와 무게고, 그래서 보통 소나 말처럼 힘이 센 짐승들이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크고 무겁습니다. 이렇게 무거운 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던져지면 어떻게 될까요? 무조건 죽는다는 뜻입니다. 하찮은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의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상처를 주는 것은, 차라리 스스로 죽는 것만큼이나 큰 죄임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심지어는 손이 자신을 죄짓게 했으면 손을 자르고, 발이 자신을 죄짓게 했으면, 발을 자르고, 눈이 죄짓게 했으면 눈이라도 뽑을 만한 각오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 주는 것을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손발과 눈을 가지고 죽겠지만, 지옥에 던져져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작은 자에게 주는 배려와 베풂을 기억하며 보상하시겠다는 말씀이나, 작은 자에게 주는 상처와 아픔에 대해 반드시 응징하시겠다는 말씀의 결론은 50절의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우리 속에 소금으로 가지고 살아가며, 그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세상에 복음을 전할 만한 도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주님의 말씀과 약속을 소금으로 두고, 낮아져 섬김으로써 화목하라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큰 능력이나 공로로 화목하는 게 아니고, 변치 않는 섬김으로써만 화목할 수 있습니다. 높아지기 위한 경쟁으로 화목해지는 게 아니고, 겸손과 섬김으로써만 화목해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 따라, 낮아져 섬기고 서로 사랑하고 섬기면, 보잘것없는 작고 사소한 섬김과 베풂마저도 반드시 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자신이 높아지기 위해, 작고 사소한 것으로 경쟁하며 싸우다, 다른 성도에게 상처를 주고 방해가 되고, 무서운 형벌에 처해질 수 있음을 기억하고, 그리스도인답게 주님의 말씀에 따라 낮아지고 섬김으로써, 화목한 교회, 주님의 복과 은혜를 충만히 받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