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영혼을 위한 예방약입니다
성경: 마가복음 10장 1-12절(신 70쪽)
찬송: 425장(주님의 뜻을; 통217), 406장(곤한 내 영혼; 통464장)
설교: 20180422.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중국의 옛 나라들 중 하나인 위나라에 의술로써 유명한 화타가 있습니다. 요즘으로 보면 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다치거나 병이 들어 아픈 사람들을 아주 뛰어난 처방과 시술로 낫게 했습니다. 그 실력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지금도 병에 대한 지식과 의술이 특출난 사람을 말할 때 ‘화타’라고 부를 정도입니다.
화타에게는 두 형이 있었는데, 이들도 역시 의술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위나라의 임금이 화타에게 “3형제 중에 누구의 의술이 떠 뛰어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화타가 두 형들의 실력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둘째 형님은, 다른 사람의 병세가 막 시작될 정도로 작은 기미를 보고서도 병을 알아보고 치료해줍니다. 워낙 작은 기미를 보고서 치료하기 때문에, 병이 나은 사람마저도 자신이 병이 결렸었다는 것도, 병에서 나았다는 것도 잘 모릅니다. 첫째 형님은, 사람의 얼굴빛을 보고, 병을 예감하고, 병의 원인을 제거해 줍니다. 그래서 환자는 아픔을 느끼지도 않은 상태에서 병이 낫게 되고, 첫째 형님의 의술이 뛰어남을 깨닫지 못 합니다”고 답했습니다.
화타 자신도 뛰어난 의술로 이름이 나고 인정을 받은 사람인데, 화타의 이야기에 따르면, 3형제 중에서 누가 가장 의술이 뛰어나다는 뜻인가요? 첫째형님의 실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이고, 둘째형님이 그 다음이고, 자신은 3형제 중에서는 가장 떨어진다는 뜻이죠?
화타는 왜 두 형님의 의술이 자신보다 더 뛰어나다고 했고, 특히 첫째 형님의 실력이 가장 좋다고 했을까요? 그저 형님들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 때문에 그럴까요? 물론 당시 화타의 두 형님들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화타가 겸손해서 그렇게 형님들의 의술을 높이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 형님들의 의술에 대한 평가를 통해 보면, 그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3형제들 중에서, 의술이 가장 떨어진 화타는 어떻습니까? 화타는 다치거나 병이 나고 증상이 커졌을 때 치료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치료 자체를 잘 하는 겁니다. 둘째형님은, 병세가 막 시작되는 시기에 병을 알아보고 치료한다고 하니, 요즘으로 보면, 병의 아주 초기에 병을 알아보고 치료해 준다는 것입니다. 작은 증상만 있어도 어떤 병인지 잘 알고, 병이 커지기 전에 치료합니다. 요즘으로 보면, 병 진단을 잘 한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첫째형님은, 병이 시작되기 전에 병을 알아보고 치료해 준다고 하니, 요즘으로 보면, 치료보다는 질병 예방을 잘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병이 생기고, 병이 커져서 치료하는 것보다는, 예방해서 병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게 훨씬 더 어렵지만, 또 그만큼 훨씬 이롭다는 점입니다. 병이 생기고 커져서 치료하려면 얼마나 힘듭니까? 시간도 많이 필요하고, 거기에 따라 들어가야 하는 비용도 크고, 또 치료하고 수술해서 회복하기까지 고통도 큽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병이 나고 커진 후에 치료하는 것보다는, 병이 막 시작되었을 때 병을 알아내고 치료하는 게 훨씬 좋습니다. 비용이나 수고나 고통까지도 비교가 안 될 만큼 줄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최근 우리나라 건강보험에서는, 병이 생긴 후에 치료하는 것보다는, 일찍 병을 발견하고 치료할 수 있도록, 아주 적은 비용이나 무료로 검사를 받을 수 있게 했습니다. 또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병을 일찍 발견하는 것보다는, 아예 병이 생기지 않도록 병을 예방하는 쪽으로도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과거 20,30년 전과 비교해 보면, 지금은 예방 주사나 약이 훨씬 많아졌죠? 예전엔 평생 예방 주사가 몇 가지 안 되었고, 그것도 대부분 초등학교 정도에서 모두 마쳤습니다. 하지만 최근엔 연령과 유행병에 따라, 그에 맞는 주사와 약이 다양해졌고, 또 많아졌습니다. 그만큼 병이 생기고 커진 이후에 치료하는 것보다는, 병 자체를 예방하는 게 비교가 안 될 만큼 효과적이고 좋습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모든 질병에 대한 예방약을 만들어서 모든 병을 없애는 것이 가장 좋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에서는 그만한 기술이 없습니다. 예방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병이 생기는 원인과 치료법을 알아야 하는데, 인간이 앓는 질병이 워낙 많고, 또 새로운 질병이 생기기도 합니다. 또 아직은 그만한 능력과 지식이 없어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그 방법을 이용하고, 이미 발병한 경우에는, 병을 직접 치료하거나 수술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치료보다는 예방이 훨씬 좋은 것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예방약, 예방법과 치료약, 치료법은 다르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예방약과 치료약이 같다면, 계속 한 가지 약만 먹으면 해결됩니다. 그러나 예방약과 치료약은 다릅니다. 요즘은 독감이 유행하기 전에, 독감 예방 주사를 맞죠? 예방 주사를 맞지 않았는데 독감에 걸렸다면 어떤 약을 이용해야 할까요? 독감 예방용으로 나온 약을 이용하면 독감을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독감 예방약은 있지만, 독감에 걸렸을 때 치료할 수 있는 기술과 약은 아직 없습니다. 감기에 걸리면, 감기 자체를 치료할 만한 지식과 기술이 없어서 증상만 치료하게 됩니다.
독감에 걸려서 열이 나고, 목이 붓고, 머리가 아프고, 콧물이 나고, 몸살이 나죠? 그런데 이런 감기 전체를 낫게 할 수 있는 약이 아직 개발되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감기 자체는 못 고치니, 열을 내리는 약, 목의 염증을 가라앉히는 약, 두통을 없애는 약 등을 먹게 됩니다. 독감에 걸렸을 때, 독감 예방약을 준다고 낫지 않기 때문에, 예방약인지 치료약인지를 분명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우리의 생활에서 적용하는 데도 이런 원칙은 똑같이 적용됩니다. 성경에는 예방약과 치료약이 있고, 이 둘을 분명하게 구분해서 적용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질병 문제에서 치료보다는 예방이 더 중요하고 훨씬 이익인 것처럼, 영적인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말씀을 어기고, 영적 질병에 들고 나서, 이후에 해결하는 것보다는,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이 가장 좋고,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 대부분은 우리가 영적인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예방법으로 주시는 말씀들로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대표적인 계명 10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만 섬기고,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등인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장 복되게 살아갈 수 있는 예방법으로 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해석할 때도, 이것을 마음에 두고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만일 이 원칙을 잊고, 성경을 글자 그대로 무조건 받아들이고 해석하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을 멀리에서 찾을 필요도 없이, 오늘 본문 바로 앞 마가복음 9장 42-49절까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9장 42절에서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낮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남을 무시하거나 상처 준 적이 없습니까? 기억나는 경우도 있겠지만, 훨씬 더 많은 경우에는 잘못을 저지르고서도 기억하지 못 할 만큼 많이 저지르고, 그러면서도 기억하지 못 할 만큼 쉽게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치료법처럼 글자 그대로 적용시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이 말씀만이 아니라, 그 뒤에도 손발, 눈이 범죄하게 했을 때는, 손발을 잘라내고, 눈을 뽑는 게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예방법이 아닌 치료법으로 여기고, 그대로 적용시킨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들이 살아온 과정과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우리 모두는 눈이 없고, 손발을 잘라내고 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어디 손발과 눈만 없겠습니까? 머리도 없어야 하고, 귀도 없어야 하고, 몸 어느 한 곳 남아 있을 수 없고,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하시고자 하는 것은,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죄를 지었으면, 손발을 잘라내고, 눈을 뽑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며 예방법으로 적용하게 하시려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는 까닭이 무엇인가요? 대부분 상대를 무시하기 때문이고, 그 정도는 괜찮거나,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말씀처럼, 남에게 말과 행동으로 죄를 짓고 상처를 주는 게, 절대 가볍거나 그럴 수 있는 작은 일이 아니고, 우리의 손발을 잘라내고, 눈을 뽑을 만큼 심각하고 무서운 죄라는 것을 인정하면 어떻겠습니까? 단돈 몇 만원 때문에라도, 운전할 때도 법규를 위반하지 않기 위해 조심 조심하는데, 몸의 일부가 걸려 있다면 얼마나 조심하고, 얼마나 참고 절제하겠습니까? 아마 법으로 정해서 남에게 상처를 주면 손발을 자르고, 눈을 뽑는다면, 내가 손해보고, 가진 것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참고, 참고, 또 참을 것입니다. 너무 참아서 속병이 생긴다 하더라도, 절대로 함부로 행동하거나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적인 질병인 죄를 짓지 않고, 건강하고 복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예방법으로 주신 말씀이라는 것은, 오늘 본문 속에서 이혼에 관한 말씀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곤란에 빠뜨리기 위해 이혼해 대해 질문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이혼에 대해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혼을 해도 괜찮다고 말씀하셔도, 이혼에 대해 반대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싸우게 되고, 반대로, 예수님이 이혼은 어떤 경우에도 안 된다고 말씀하셨어도, 이혼을 허용한다는 바리새인들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에 빠지게 하고, 다른 사람들과 싸우게 만들려 던진 교활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학파, 어느 노선에 속한 사람이냐고 묻는 바리새인들의 인간적인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생각으로 답하신 것이 아니라, 6-9절까지의 말씀으로 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남자와 여자로 짝을 이루어 만드셨기 때문에, 사람이 함부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짝을 버리면, 남자도, 여자도 모두 서로에게 간음이라는 큰 죄를 행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남녀 둘이 하나가 되어 한 가정을 이루는 것을 하나님이 원칙으로 정해 주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신앙인들에게는 이보다 더 큰 원칙이 없습니다. 이혼이 하나님이 주신 원칙을 어기는 것임을 기억하며, 철저히 조심하고, 신중하고, 죽을힘을 다해서 가정을 지키려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이 만든 원칙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고, 다르게 적용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원칙은 변하지 않는 법칙이자 진리입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가정이 무너지고, 부부가 갈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도 치료약이 아닌 예방약으로 주신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가정이고, 하나님은 가정을 지키는 것을 원칙으로 삼으셨음을 인정하면, 믿음에 따라 가정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이 수고하고 노력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원칙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고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이혼에 관한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앞에서 섬기는 자가 더 크다는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손발을 잘라내고, 눈까지 뽑을 각오로 살라는 말씀과 연결해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한 가정을 이룬 사람들이 서로 다투고 갈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이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배우자보다 더 높아지려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높아지기 위해 상대를 무시하고, 낮추고, 함부로 대하기 때문이고, 그래도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사람이 되려면, 상대를 무시하거나 낮추거나 함부로 대하지 말고, 반대로 상대를 더 잘 섬기고, 높이고, 귀하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처럼, 가정에서 부부가 서로를 더 잘 섬기고 높이고 사랑하고 아끼면, 그 가정에서는 갈등이 생기거나, 다툼이 나거나, 갈리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누군가에게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게, 손발을 잘라내고, 눈을 뽑는 것보다 못하다는 말씀을 가정에 적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부부가 서로에게 함부로 말하거나, 함부로 행동하지 못 할 것입니다. 가정에서 다툼이 생기고 나뉘는 많은 경우는,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대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내 배우자니, 이 정도의 말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이 정도 행동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주 하찮은 사람에게도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게, 몸의 한 부분을 잘라내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임을 기억하고, 더욱이 그 상대가 하나님이 배필로 정해주신 사람이라면 그 누가 함부로 상처를 주고 함부로 대하겠습니까? 신체 중 한 부분을 잘라낼 만한 각오를 하면, 참지 못 할 일이 없고, 가정에서 큰 다툼과 문제가 생길 일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만일 이미 가정이 깨지는 아픔을 겪게 되었으면, 가정을 지키는 게 하나님의 뜻이고 원칙임을 기억하며, 기회가 다시 주어졌을 때라도 지금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냥 조금 참다 포기해도 되는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되고, 말 그대로 죽을힘을 다해야 합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배우자를 더 높이 생각하고, 낮아져 섬겨야 합니다. 배우자에게 하는 말 한 마디, 행동 한 가지라도 철저히 조심해야 합니다. 말 한 마디 할 때도, 주님 앞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고, 어떤 일을 하든,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법으로 정해주신 거라 여기며, 참고, 조심하고, 상대를 섬기는 수준으로 해야 합니다. 가정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 주신, 부모와 자녀의 관계, 교회와 마을과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를 짓지 않는 길, 영적으로 건강하고, 복될 만한 길을 말씀을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이 말씀들을 법칙으로 기억하고, 순종하되, 더욱 힘써 남을 높이고, 섬기며, 참고 사랑함으로써,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가고, 서로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는 가정, 성도, 교회, 공동체로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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