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성경: 마가복음 10장 35-45절
찬송: 430장(주와 같이 길 가는 것; 통456), 218장(네 맘과 정성을; 통 369)
설교: 20180603.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평강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자오스린 교수의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고 합니다.
한 교수가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누가 봐도 감탄할 만큼 아름다운 여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교통사고를 당해, 얼굴에 심한 흉터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남자는 그녀를 예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는 것입니다.
1. 당연히 예전처럼 사랑할 것이다.
2.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질 것이다.
3. 아마도 예전처럼 사랑할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은, “사업에 크게 성공한 백만장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회사가 파산해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여자는 그 남자를 예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는 것입니다.
1. 당연히 예전처럼 사랑할 것이다.
2.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질 것이다.
3. 아마도 예전처럼 사랑할 것이다.
이 문제들에 대해 학생들이 대답한 결과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당연히 예전처럼 사랑할 것이다’는 답이 10%,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질 것이다’는 답이 10%, ‘아마도 예전처럼 사랑할 것이다’는 답이 80%였습니다. 여성의 외모가 변해도 사랑하는 마음이 크게 바뀌지 않을 것 같지만, 확신하지 못 하는 것입니다.
돈이 많았던 남자가 사업이 망했을 때에 대해서는, ‘당연히 예전처럼 사랑할 것이다’는 답이 30%,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질 것이다’는 답이 30%, ‘아마도 예전처럼 사랑할 것이다’는 답이 40%였습니다. 돈을 잃은 남자에 대한 여자의 사랑이 변하는 확률이 커지고, 또 그렇지 않더라도 확신하지 못 했다는 뜻입니다.
결과를 보고 교수가 학생들에게 “모두들 이 두 남녀를 연인관계라 생각했나?”라고 묻자, 학생들이 모두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교수는 “하지만, 나는 연인관계라고 말하지 않았네.” 하면서, “만약 첫 번째 질문의 남녀가 부녀관계이고, 두 번째 질문의 남녀가 모자관계라면 어떻게 대답하겠나? 원래의 대답을 유지할 것인가?” 하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외모를 잃은 여성이 딸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아버지라면, 그 마음이 바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돈을 잃은 남자가 아들이고, 사랑하는 여성이 어머니라면, 그 마음이 바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교실 안이 조용해지고, 학생들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 모두 1번을 선택했습니다. 외모나 돈과 상관없이 ‘당연히 예전처럼 사랑할 것이다’는 것입니다. 외모와 돈을 잃어도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답으로 바뀐 것입니다.
여기에서 학생들의 답이 바뀐 이유가 무엇일까요? 처음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성적인 관계로 사랑하는 남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돈이 많은 남자를 사랑하는 사람도 이성적인 관계로 사랑으로 하는 여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수는, 이성간의 사랑으로 한정시키지 않고, 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까지 넓혀서 생각하게 했습니다. 즉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에 사랑의 종류가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크고 온전하고 변하지 않는 것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남녀간의 사랑이 뜨겁고 간절하게 나타날 때가 있지만, 그러나 남녀 사이의 사랑은 조건과 욕심이 섞일 때가 많습니다.
예쁜 여성을 남성이 사랑할 수 있고, 멋진 외모를 가진 남성을 여성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모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게 되고, 그것도 대부분 안 좋은 쪽으로 바뀝니다. 돈이 많은 사람을 이성적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돈이라 하더라도, 돈만으로 모든 게 해결될 수 없고, 또한 한순간에 모든 재산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조건에 따라 하는 이성적인 사랑은, 조건이 변하면서 그에 따라 변질되거나 안 좋아질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에 대한 사랑은 조건에 따르지 않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도 합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조건이 없어서, 자녀의 처지와 형편과 모습이 바뀌어도, 그 사랑이 바뀌거나 약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겪는 사랑 중에, 가장 온전하고 큰 사랑을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간도 우리가 신앙생활하며, 함께 모여서 예배하는데,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말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영생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하고, 하나님이 시키신 일들을 잘 지켜 행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게 신앙생활의 조건이고, 의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본적인 설명이라고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니,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지켜 행합니다. 그래서 신명기 6장 5,6절에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모습으로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것으로 본다면, 남녀간의 사랑처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처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자녀를 향해 하는 부모의 사랑처럼, 무조건적이고, 가장 크고 순수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그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과 최고의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서 겪고, 할 수 있는 최고와 최선의 사랑은 자녀를 향한 사랑이어서 그렇지, 부모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사실은 부족하고 온전하지 못 합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워서 그렇지 이보다 더 크고 온전하고 순수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갈등과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가진 것들을 버린 사람은 그에 대한 보상과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가족을 버리고, 재산을 버리고, 교회 일만 하라거나, 세상을 등지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살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위해 먼저 희생하시고 죽으신 것처럼, 고난과 희생을 각오하며 믿고 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상과 영생을 반드시 주신다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야고보와 요한 두 형제가 예수님께 가서, 예수님이 정권을 잡으시거나, 주님이 부활하셔서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에 계실 때, 좌우의 가장 좋은 자리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때문에, 다른 제자들이 크게 화냈습니다.
여기서 열 명의 다른 제자들이 화를 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야고보와 요한 두 형제가 잘못 행동한 것을 꾸짖기 위해서일까요? 지난 주일에 살펴본 것처럼,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의 부르심에, 주저하지 않고 배와 가족까지 버리고 따를 만큼 성격이 화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또 급한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말을 해야 해도 되는지, 그럴 만한 상황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속에 있는 것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이 곧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신다고 말씀하신 무거운 상황에서, 이들은 자기들의 욕심과 욕망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이 높은 자리에 앉으시면, 자기들을 그 다음 높은 자리, 권력의 자리를 챙겨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절제하지 못 하고, 이기적이고, 밉살스러운 이런 발언을 듣고, 열 명의 다른 제자들이 크게 화를 냈는데, 이것이 적절하지 못 한 상황에서 나온 발언을 꾸짖는 것이라면 그나마 괜찮습니다. 함께 신앙생활한다는 것은, 서로 모난 것을 고쳐주고, 부족한 것을 메워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열 명의 다른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는 까닭은 순수하거나, 야고보와 요한의 부족한 부분을 고쳐주기 위한 좋은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열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세상 권력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강제로 지배하고, 권력으로 내리누르지만, 신앙인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앙인들에게서는, 힘과 권력과 능력이 있는 사람일수록 낮아져서 남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45절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모습은, 높을수록 낮아지고, 가질수록 겸손해지고, 욕심날수록 양보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야고보와 요한의 잘못된 요구를 다른 제자들이 꾸짖는 것은 좋은 의도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열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적절하지 않은 때에,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 때문에 화가난 것이 아니고, 자신들도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욕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들도 그 동안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많은 것을 희생했으니, 당연히 높은 자리와 큰 보상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낸다는 것이 염치없어서 참아왔는데, 야고보와 요한이 먼저 요구했으니, 마치 자기 속마음을 들킨 사람들처럼,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분노하고 책망했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모습이 어떻습니까?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처럼 보인가요? 제자들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어떻습니까? 성숙하고, 온전하고,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사랑처럼 보인가요? 앞에서 나온 이야기에서 찾는다면, 하나님에 대한 제자들의 사랑이, 남녀간의 사랑처럼 조건에 따른 사랑처럼 보입니까?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처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보입니까?
제자들은 자신들이 주님과 복음을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가족과 재산까지 버리고, 앞으로 생계 수단까지 포기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맞습니다. 만일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가족과 재산과 인생 계획까지 모두 버리고 따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복음을 향한 이들의 사랑은 조건을 두는 사랑입니다. 좋은 조건이 있어야만 사랑하는 모습, 그래서 좋은 조건이었던 것이 조금 적어지거나 나빠지면, 그에 따라, 사랑도 역시 약해지거나 사라지는 모습입니다. 이런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변하지 않는 부모의 사랑보다 더 작은 사랑이고, 온전하지 못 한 사랑입니다. 어쩌면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수고하고 희생한 것들에 대한 보상이 이 땅에서 주어지길 원했습니다. 바꿔 보면, 희생에 대한 보상이 이 땅에서 주어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뒤돌아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성숙하지 못 해서, 세상적인 욕심과 욕망을 안고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미숙하고, 세상적인 욕망과 대가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했던 제자들은, 성령님을 받고, 아주 오랜 기간의 기다림과 훈련을 통해 비로소 온전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순수하고 온전한 모습, 이 땅에서 높아지고, 누리고, 갖는 것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 사랑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이 땅에서 높은 자리를 달라고 요구했던 요한은 ‘사랑의 사도’로 불립니다. 요한복음, 요한1,2,3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인물이기도 하고, 요한1서 2장 15-17절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높아지고, 갖고, 누리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순수하고, 온전하고, 간절합니까? 아니면 이 땅에서 당장 그 보상이 주어지길 바라는 조건이 섞인, 좀 부족하고 온전하지 못 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고 희생하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땅에서 편하고, 누리고, 갖는 욕심을 버리셨습니다. 때 묻지 않는 온전한 사랑이었고, 모든 것을 버릴 만큼 순수한 사랑이셨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시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그 나라를 향해 우리가 보여야 하는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희생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상과 영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처럼, 더욱 순수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조건을 내세우지 않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복음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크고 영원한 복과 상을 반드시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 모두가 순수하고 무조건적인 모습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들을 지켜 행함으로써, 순수하게 애쓰고 희생한 자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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