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80909)하나님의 것만을 바라보며 참되게(막 12장 41-44절)

청명하늘 2018. 9. 10. 00:34

하나님의 것만을 바라보며 참되게

 

성경: 마가복음 1241-44(77)

찬송: 212(겸손히 주를 섬길 때; 347), 216(성자의 귀한 몸; 356)

설교: 20180909.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요즘은 좀 줄어든 것 같기도 하고, 또 방법과 형식이 좀 바뀐 것 같습니다만, 예전엔 홍수, 폭설, 가뭄, 지진 등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을 때마다, 성금을 모금했습니다. 학생들은 반강제적으로 내야 했고, 이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권력자들 배를 불리는 데 이용하는 경우도 꽤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금을 모금하는 모습을 보면, 그 형식도 매번 거의 비슷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많은 성금을 모으는지 아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냥 무슨 일이 일어났으니, 돈을 모아서 도와주자고 하지 않죠? 먼저는 가장 크게 피해를 입은 곳의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보통 이렇게만 보여주어도, 돕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기꺼이 성금을 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금을 모금할 때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 가지를 더 합니다. 그것은 성금하러 온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또 성금하러 온 사람들 일부와 인터뷰하고, 얼마를 성금했는지를 아나운서가 말하거나 자막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그렇게 성금하러 온 사람들은 강제적으로 하는 게 아니고, 자신이 원해서 합니다. 바꿔 생각해 보면, 성금하지 않았다고 해서, 법적으로 피해를 입거나 비난받지 않습니다. 자기의 마음과 정성대로 정해진 금액만 성금하면 됩니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릴까요?

 

또 방송국에서는 그런 방송을 준비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성금으로 내놓으면 되지, 큰 의미없고, 비슷한 모습을 왜 반복해서 내보내고, 또 성금하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겠습니까? 그런 방송을 내보내기 위해 필요한 인력과 비용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언젠가 이것으로 실험한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성금 모금하는 곳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다른 한 곳은 그런 것 없이 그냥 성금모금함과 그 내용만 기록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차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컸다고 합니다. 카메라를 설치하고 성금을 모금하는 쪽이 그렇지 않은 쪽보다 세 배 가량 사람도 많이 몰리고, 그만큼 금액 차이도 컸다는 겁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요? 그것도 세 배정도로 큰 차이를 보일까요? 성금하도록 누가 강요하거나, 성금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길거리에서 모금하는 경우엔, 성금하지 않았다고 불이익을 줄 만한 힘과 권력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차이를 보이는 까닭은 한 가지입니다. 자기의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방송을 통해 사람들에게 보이고, 알려지고, 칭찬받을 수 있는 곳에는 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수고까지 하면서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그렇지 않은 곳에는 훨씬 적은 사람들이 모입니다. 자기를 드러내고 자랑하고자 하는 인간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대곡교회에 부임한 지가 5년이 되어갑니다. 부임할 당시 계셨던 분들 중에 지금까지 계신 분들은 몇 분 안 되고, 또 모두 잊으셨겠습니다만, 부임하고 한두 달 지난 후, 헌금과, 교회 재정에 관한 계획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헌금과 재정에 관해, 여러분께 부담을 드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헌금에 대해 강요하지 않고, 헌금한 명단을 주보에 싣지 않고, 작정 헌금을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빚을 내서 공사나 사업을 진행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생각은 좀 다를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까지 이 약속을 지켜왔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대곡교회는 재정이 넉넉하지 못 합니다. 무엇을 계획하고, 작은 일을 해내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재정이 넉넉하면,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자주 듭니다.

 

이럴 때, 재정을 늘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있습니다. 헌금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헌금 안 하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 그래서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할 수도 있고, 반대로, 헌금을 많이 했더니, 하나님께서 엄청난 복을 주신 사람들의 경우를 계속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분명 재정은 늘어납니다. 앞에서 성금 모금에 관해 말씀드린 것처럼, 주보에 명단과 금액을 싣고, 표를 만들고, 함께 보도록 만들면, 경쟁심과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까지 합해져서 금액은 늘어날 것입니다. 방법이 어찌 되었든, 재정이 넉넉해지면,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할 수 있으니 결과마저 좋은 일이라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고, 훨씬 힘든 방법을 택한 까닭이 있습니다. 다른 그 무엇보다 이것 하나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헌금이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겁니다. 더 분명하게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헌금하는 가장 크면서도 또 유일한 까닭입니다. 헌금은 여기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고, 어떤 이유에서라도 여기에서 벗어나면 헌금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보통 헌금이라 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지?’ 하는 것보다는, 헌금액이 얼마고, ‘드린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곤 합니다. 헌금이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생각합니다. 믿음으로 드리면 된다고 말하면서도, 헌금액에 따라 다른 사람의 믿음까지 판단하려 합니다.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은, 믿음의 수준이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고, 반대로 헌금하는 액수가 적으면 믿음이 별로라고 남의 믿음까지 잣대질하곤 합니다.

 

그러나 헌금과 관련해, 우리가 가장 많이 보이는 이 두 가지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됩니다. 헌금한다 하면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생각하는 것도 잘못되었고, 헌금으로 남의 믿음의 수준을 판단하려 하는 것도 역시 잘못되었습니다. 헌금과 관련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들은 오직 오직 하나님만을 생각하며 드리고 있는지, 그리고 소중한 것들을 드리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헌금을 원하시는지, 많이 헌금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 성전에 들어가셔서 많은 일들을 행하시고, 다양한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시기도 하고, 여러 가지를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던 중에, 여러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헌금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당시 성전의 구조를 잠깐 화면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성전은 지성소, 교회로 예를 든다면, 강단을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지성소 가장 가까운 곳은 이스라엘의 뜰이라고 해서, 이스라엘 남성들만이 들어가 제사하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은 담장을 하나 두고 여인들의 뜰이라 해서 이스라엘 여성들이 제사하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전 둘러싼 벽 너머는 이방인들의 뜰로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다른 민족 사람들이 와서 제사하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헌금은 성전 속 여인들의 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여인들의 뜰에 헌금함이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이 장소로 예를 들면, 강단이 지성소고, 예배당은 이스라엘의 뜰로 속하겠죠? 그리고 본당 현관 밖이 여인들의 뜰인데, 그곳에 헌금함이 여러 개 놓여 있었고, 헌금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 헌금함에 돈을 넣고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헌금한 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셔서, 헌금에 대해 가르치시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가장 많은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지금은 지폐가 있고, 지폐를 넣을 수 있는 봉투가 있어서, 헌금함 가까운 곳에서 봐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당시엔, 지폐가 없이 동전만 있었습니다. 또 헌금함의 입구는 작았기 때문에, 많은 금액을 동전으로 바친다면 시간이 한참 걸렸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겨우 동전 한두 개만 넣으면 되니, 지나치듯 넣고 갈 수 있었습니다.

 

많은 것을 바쳤다고 예수님의 칭찬을 받은 이 여인은, 두 렙돈인 한 고드란트를 넣었습니다. 한 고드란트는 하루 일당의 64분의 1입니다. 일당이 64,000원이라 하면, 한 고드란트는 1,000이라는 것이고, 렙돈은 요즘의 500원짜리 동전 정도가 됩니다. 1,000원 정도의 금액이니 크다고 할 수 없죠? 이 과부는 오백원짜리 동전 두 개를 넣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41절에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라는 말씀을 보면, 부자도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넣었고, 부자인 만큼 많이 넣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왜, 많이 넣은 사람들을 많이 넣었다고 하시지 않고, 1,000원 정도의 적은 금액을 넣은 사람을 많이 헌금했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우리의 판단으로는, 많은 금액을 헌금하는 것은 어렵고 힘듭니다. 적은 금액은 헌금하는 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큰 금액을 드린 것이 귀한 것처럼 여겨짐에도, 예수님은 오히려 적게 드린 한 여인이 더 많이 드렸다고 말씀하신 까닭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앞의 내용과 오늘의 본문을 연결해서 봐야 합니다. 앞에서는 예수님이 서기관들을 책망하시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가르칠 수 있을 만큼 성경을 잘 알고, 연구한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질책을 받았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에 자신들이 얼마나 그럴 듯하게 보일까 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오늘 본문 속에서, 적은 금액을 헌금했음에도 예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은 과부는, 다른 이들 시선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관심과 인정만을 바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관심이 없습니다.

 

대부분 큰 금액을 헌금하는 것은 자랑스러워하고, 적은 금액을 헌금하는 것은 부끄러워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경이 기록된 당시에 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또 동전으로 헌금하면, 금세 누가 얼마를 헌금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500원 동전 두 개를 드리는 이 여인도 사람의 눈을 의식했다면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시선과 자기 체면을 생각했다면, 푼돈으로 헌금하지 않고, 더 모아서 자랑스레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런 외식과 가식이 없습니다. 그냥 최선을 다해 헌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받으실 것인지 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평가하실 때의 기준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얼마나 그럴듯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유창하고 얼마나 길게 기도하느냐를 중요하게 여기시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질실하게 믿고, 진실하게 기도하며 사느냐가 하는 것이 기준이 될 것입니다. 사람의 시선과 인정을 목적으로 하는 크고 많은 것보다, 오직 하나님의 눈과 인정을 바라며 하는 작은 것을 크게 보시고 인정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칭찬하신 두 번째 까닭은, 자신의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하나님께 바치려 했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여러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면, 그곳에서 헌금하는 사람들의 수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부자들이 헌금한 것에 대해 특별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부자들도 체면이나 자랑을 위해 가식적으로 드렸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이런 헌금은 금액의 크고 작은 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가난한 사람의 헌금만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위선적이거나 체면 때문에 드리는 것이 아니라면, 부자의 헌금도 기뻐하십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을 드리는 것이 더 크고 귀한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모두 진실한 마음으로 드렸어도, 주님이 인정하시는 더 큰 헌신은, 자기의 것을 얼마나 희생하면서 드렸느냐에 달렸습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헌금이 가장 큰 헌금이라고 하시며 44절에서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자들은 많은 액수를 헌금했지만 헌금 후에도 여전히 부자입니다. 생활에 별로 타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적은 액수를 헌금했지만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헌금 후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큰 희생을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다 좋은 헌금이지만 크기로 따지면 과부의 헌금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언제나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는, 헌금이나 헌신이나 신앙생활의 모든 것은, 사람의 눈을 의식하거나,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헌금, 헌신이 아니라, 가식과 외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모든 것은 오히려 주님을 속이려 하는 어리석은 일에 불과합니다.

 

기억해야 할 다른 한 가지는, 주님은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고, 바치는 것을 지켜보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귀한 것을 드린 만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쓰고 남아서 바치는 것은 하나님께 귀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먹고 남은 것, 처리하는 게 귀찮아서 드리는 처진 것들은 헌물, 헌신, 헌금이 아니라,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위입니다. 아까운 것, 귀한 것, 꼭 있어야 할 것이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그에 따른 복을 풍성히 내려주십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에 따라, 사람의 눈과 기준에 따라 신앙생활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눈과 기준을 가장 먼저 생각하며 살아가며, 더불어서 우리에게 귀한 것들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하나님을 귀히 여기는 자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날마다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