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80826)바른 신앙은 바른 지식 위에 섭니다(막 12장 35-37절)

청명하늘 2018. 9. 3. 21:26

바른 신앙은 바른 지식 위에 섭니다

 

성경: 마가복음 1235-37(77)

찬송: 452(내 모든 소원; 505), 338(내 주를 가까이; 364)

설교: 20180826.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약 두 달 전 즈음에, 마취환자 성희롱 사건이 알려졌습니다. 전신마취를 하면, 의식 자체가 없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수술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 환자가 성형 수술을 받으면서, 뭔가 꺼림칙한 마음이 들어서, 녹음을 몰래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의사와 간호사가 수술하는 내내 이 환자를 비난하고 희롱하는 내용이 가득했습니다.

 

수술이란, 그것이 크든 작든, 사람의 건강과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수술을 받는다는 것은, 그것이 미용을 위해서이든, 병을 고치기 위해서든 더 좋아질 것을 기대하며 하지만, 수술이 잘못되면 위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성형수술을 받다가, 오히려 더 안 좋아지는 경우가 많죠? 더 잘못되면 심각한 장애를 입기도 하고, 사망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책임지는 의사들과 간호사들 중에는, 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평생 심각한 장애를 가지거나 사망에 이를 수 있음에도, 수술을 의사가 아닌 사람들에게 맡기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 같습니다. 잠시 이에 대한 영상을 보실까요?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dPdDfgfMop8

https://www.youtube.com/watch?v=arlA9mGEtCo)

 

내용은 수술할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의사를 대신해서 수술하다 적발되었다는 것인데, ‘어떻게 저럴 수 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한편으로는, ‘환자의 생명이 달려있는 수술인데도 의사가 아닌 사람이 저렇게 수술할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의료기업체의 직원이라는 것은, 의료기를 팔러 다니는 사람입니다.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거나, 의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저런 사람이 환자 무릎의 뼈를 깎고, 인공관절을 넣는 등의 수술을 직접 했다니, 놀랍기도 하고, 수술이라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많은 지식과 경험이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저런 경우가 간혹 적발되어서 논란이 되고, 재판에 넘겨지고 있습니다만, 적발되지는 않았지만, 실제 저렇게 하는 경우라면 얼마나 많겠습니까? 저런 식으로 수술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은, 바꿔 생각해 보면, 의사처럼 의술에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몇 번의 경험과 웬만한 지식이 있으면 다른 사람의 몸을 수술할 정도가 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시골엔 불법으로 치과 치료하는 경우가 있죠?

 

그런데 왜 저런 뉴스가 큰 논란을 낳고, 또 자신이 저런 수술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할까요? 무엇보다도 제대로 훈련과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섬세하고 어려운 수술이 될수록 실패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무자격으로 수술하는 사람이 나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수술하지 않을까, 그러다 실패해서 큰 장애를 입거나 사망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의사의 자격을 제대로 갖춘 사람들도 실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사 자격을 갖춘 사람들도 수술하다가 장애를 입히거나 사망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술을 제대로 공부하고, 사람의 몸을 잘 아는 좋은 의사는 최소한 사람의 몸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명의로 이름난 한 교수는, 수술할 때마다 최선을 다하겠다고보호자들에게 말한다고 합니다. 물론 모든 수술에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그 말을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다시 다지는 것입니다. 좋은 의사, 사람의 몸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이렇게, 남의 몸이지만, 함부로 대하지도 않고, 수술을 앞두고 교만하지도 않습니다. 의사가 되기까지 많은 시간 공부하고, 또 얼마나 많은 환자를 만나고, 치료하고 수술했겠습니까? 그럼에도 유능하고 좋은 의사일수록,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정식으로 의학을 공부하지도 않고, 제대로 된 교육과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수술을 몇 번 해보고, 그래서 성공하게 되면, 점차 방심하게 되고, 교만해지게 됩니다. 사람의 몸을 함부로 대하게 됩니다. 몇 번 성공했으니, 남의 몸을 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자기의 능력에 대해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을 건드린다거나, 엉뚱하게 수술해서 장애를 입히게 한다든지, 사망하게 만들게 됩니다.

 

이것은 신앙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말썽을 일으키고, 많은 사람을 시험에 빠지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 대다수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만 오래 한 것이 아니라, 몇 가지 신비한 체험을 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습니다. 몇 번 환상을 볼 수도 있고, 기적을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환자를 위해 기도했더니 치유되는 기적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신비한 일들을 체험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우리의 삶도 언제나 오르내림이 있듯이, 믿음의 크기와 확고함도 시시때때로 변하기 마련입니다. 갑자기 시험에 빠지고, 믿음이 흔들리게 될 때, 자신이 겪은 기적이나 기도의 응답 등이 믿음을 붙잡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체험들이 자칫 자신의 믿음과 능력에 대해 과신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몇 번 기도의 응답을 받으면, 자신이 마치 하나님이나 되는 양,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바로 계시를 받는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몇 번 환상을 보면, 환상이 곧 가장 정확한 답인 줄 압니다. 기도로 병을 몇 번 고치면, 자신이 예수님처럼 손만 얹으면 무조건 낫게 될 것이라 착각하고, 자신의 기도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다가 몇 번 해석하고, 예측한 것이 잘 맞는 것 같으면, 마치 성경 전체를 알고, 세상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착각하는 일이 많습니다.

 

여기에서 가까운 한 교회의 목사님이, 그 교회 한 집사님의 일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60대 중반의 부부가 교회 출석하는데, 남자 집사님은 출석하긴 하지만 교회 일을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예배 출석을 안 해서, 여 집사님한테 물었더니, 어디를 가서 신학하고 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3개월 정도 지난 후 남자 집사님을 만나서, 왜 교회에 잘 안 나오느냐고 묻자, 남자 집사님이 대뜸 하는 이야기가 집사가 아니고 목사인데...” 하더랍니다. 그런데 이 분은 한글을 읽긴 하지만, 아주 띄엄띄엄 읽을 정도의 수준인데, 3개월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고 하고, 목사가 되었으니 성경 해석이나 설교를 가장 잘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담임목사의 목회와 설교가 우스워 보였던 겁니다.

 

인간이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입니다. 간혹 인간이 대단히 철학적인 것 같고, 엄청난 수준으로 사는 것 같지만, 티끌만큼만 알면 세상 전체를 아는 양 착각합니다. 몇 번 잘 하면, 마치 자기의 생각과 행동만이 정답이라 생각합니다. 신비한 일들을 몇 번 행하거나 경험하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은 필요 없고, 자신의 기도, 자신의 환상과 체험만이 최고라 여깁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보다 자기의 감정과 판단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전혀 모르는 것보다, 어설프게 알고 체험하는 것이 훨씬 더 위험합니다. 차라리 모르면, 쉽게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정답이라고 착각하지도 않고, 위대한 사람이라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적게 알수록, 몇 가지 체험할수록, 그것이 교만과 착각의 빌미가 되고, 그래서 자신이 잘못되었다거나, 부족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못 해서, 잘못된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내신 마지막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예수님은 신앙의 중심지였던 성전에 들어가셨고, 그곳에서 예수님을 무너뜨리려는 자들의 거센 공격을 받게 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공격하고, 함정에 빠뜨려 무너지게 하려는 자들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다는 점입니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헤롯당들이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는데, 이들 모두가 종교적 목적으로 모인 무리들이고, 종교적으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향한 공격을 아시고, 공격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두 가지가 잘못되었다고 꾸짖으셨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 잘못되거나 부족하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잘못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양심과 신앙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들이라면, 자신들의 잘못된 행동과 생각을 되돌아보고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들만이 곧 정답이고, 자신의 모든 판단이 하나님의 것과 같다고 생각한 이들은,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더 비겁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며, 이 두 가지를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나는 말씀대로 살고 있는 것인가?’ 아는 것도 바르고, 행하는 것도 옳아야만, 그것이 곧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신앙이고, 점차 성장하고 또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들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공격하는 종교지도자들의 첫 번째 문제는 부분적으로만 알고, 부분적으로만 옳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즉 구원자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사실은 알면서도, 동시에 다윗에게 주님이 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께 엉뚱한 질문으로 공격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생각한 것도 그랬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문제에 대한 것도 그랬습니다. 자기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또 부활 후의 세상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면, 부활을 부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는 가이사에게 바쳐야 할 것도 있고, 또 철저히 하나님께만 바쳐야 할 것도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자기들의 질문은 꺼내기도 부끄러운 것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는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533절에서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고 이미 예언되었지만, 이들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세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난 받는 그리스도를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자신들을 구원하시는데도, 예수님을 믿기는커녕 오히려 더 반대하고 해치려 애쓰고 있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요약하면, 성경을 잘못 알고 있거나, 아니면 알아도 자기들의 욕심을 위해 모른 척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손해나는 것이 너무 많을 것 같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욕심에 따라 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이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고난의 길을 걸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고난의 길을 가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처한다고 실망하고 신앙에서 멀어진다면, 그것은 주님을 바로 알지 못 하는 것입니다. 악한 세상에서 주님을 따르다보면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함에도 오히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고, 오히려 고난을 겪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시고 우리에게도 유익을 주십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어려움 후에 주님께서 더 큰 영광과 상급을 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고난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영광을 바로 이해하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않고,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설교시간만 되면 딱딱하고 지루해서 힘드시죠? 특히 저의 설교 형식은, 어쩌면 여러분이 그 동안 들어왔던 모습과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큰 소리도 별로 안 내고, 자꾸 따라하라거나 아멘하라고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설교 내용을 모두 원고로 준비하고, 준비된 원고로 설교합니다.

 

이 형식이 여러분에겐 단지 지루하고 딱딱한 정도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제게는 힘든 정도가 아니라, 여러분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많은 시간을 들이고, 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제가 한 주 먹는 음식 양을 보면, 주일설교를 준비할 때 가장 많이 먹습니다. 이때는 다른 때보다 세 배가량을 먹습니다. 그렇게 먹어도 자꾸 뭔가를 찾습니다. 그만큼 힘들고 중압감이 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대부분이 잘 알아듣지도 못 하는 설교를 좀 쉽게 준비하고, 원고도 없이 요점만 준비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서 말로만 편하게 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러분께나 제게나 힘든 모습으로 설교를 준비하고 전하는 까닭은, 여러분의 귀를 자극하기 위해서, 혹은 저 편하게 설교하려다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저의 판단과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포장해 전할 위험이 있고, 그것도 가능성이 아주 크기 때문입니다. 며칠 힘들게 고민하며 준비해도 실수할 수 있는데, 편함과 쉬움을 두고 타협한다면, 얼마나 많이 실수하겠습니까?

 

설교에서 필요한 것은 흥미와 귀를 즐겁게 하는 소리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바르게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과 은혜를 누리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 이 땅에서도 복과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길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철저히 겸손해야 하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어려움과 아픔마저도 하나님의 참된 말씀에 따라 이겨내야 하고, 말씀대로 살아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고, 가장 복되고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의 삶과 믿음과 행함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날마다 누리며 사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