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90421)부활의 씨앗으로 소망을 품으십시오(막 16장 1-11절)

청명하늘 2019. 4. 21. 15:09

부활의 씨앗으로 소망을 품으십시오

 

성경: 마가복음 161-11(85)

찬송: 161(할렐루야 우리 예수; 159), 165(주님께 영광; 155)

설교: 20190421. 주일낮예배(부활절)

 

 

 

이 시간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억하며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유명한 외국영화들 중에 슈퍼맨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들이 여러 편 있습니다. 연세가 많은 분들을 위해 좀 설명을 드리면, ‘슈퍼라는 말은 ‘~을 훨씬 뛰어넘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자어로는 초인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능력 면에서는 평범한 인간이 갖지 못 한 엄청난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비행기를 이용한다든지, 아니면 다른 기구를 이용해 날 수 있어도, 맨몸으로는 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슈퍼맨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그것도 빛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날 수 있습니다.

 

세상엔 엄청난 힘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죠? 이런 사람을 보통 천하장사라고 합니다. 천하장사는 우리가 낼 수 없는 엄청난 힘을 내긴 하지만, 지금까지 역도에서 가장 무거운 무게를 든 것이 263kg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슈퍼맨은 몇 백 톤을 들 수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슈퍼맨의 이런 능력을 보면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주인공 슈퍼맨이 초능력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일상적인 생활도 안 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랑과 가정마저 가질 수 없습니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이 때문에 여러 가지 고민하고 방황하다가 결국 자기 집이 집을 완전히 파괴되고 맙니다.

 

슈퍼맨이 인간 이상의 초능력을 유지할 수 있는 까닭은, 특수한 수정으로 만들어진 집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슈퍼맨의 힘을 얻을 수 있는 집이 무너졌으니, 이제는 초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평범한 사람이 됩니다. 날 수도 없고, 엄청난 힘을 낼 수도 없습니다.

 

슈퍼맨으로 사는 게 부담스럽고, 어렵다며 평범한 사람으로 살기를 바랐지만, 막상 초능력들을 잃어버리니 생각이 달라집니다. 힘과 능력이 있어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초능력을 갖춘 슈퍼맨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능력을 줄 수 있는 집이 이미 모두 파괴되었으니 불가능하겠죠? 다시 만들고 싶어도, 수정이 어떤 재질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슈퍼맨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무너진 자기 집에 가서 이곳저곳을 찾다가, 폐허더미 속에서 온전히 남아 있는 수정 하나를 발견합니다. 이것은 집을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작은 것에 불과하지만, 이것 하나를 조사하면, 수정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알 수 있고, 다시 자기 집을 만들고 슈퍼맨으로서 초능력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자기 집을 완성하면, 이전보다 훨씬 더 나은 슈퍼맨이 될 것입니다. 전까지는 자신이 가진 능력이 얼마나 귀한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수고와 희생을 통해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안전하고 일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이 가진 초능력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압니다. 그래서 이전과 별다를 것 없는 능력이지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각과 자세로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게 됩니다.

 

슈퍼맨이 이전과는 달리 굳은 각오를 다지고, 훨씬 더 적극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된 것은 마지막 수정 하나가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수정 하나마저 남지 않고, 모두 파괴되어 버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슈퍼맨이 아무리 자신이 가진 능력이 귀하다는 것을 깨닫고, 또 새롭게 각오를 다진다고 하더라도 이미 늦었습니다. 다시 슈퍼맨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슈퍼맨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어려울 만큼,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조각이라는 것은 양으로 보면 참 보잘 것 없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벽돌을 극단적으로 예를 들어보면, 거대한 빌딩에서 벽돌 하나뿐이라면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습니까? 평상시에는 있으나마나 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있어도 도드라져 보이지 않습니다. 없어도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있을 만큼 높은 평가를 받지 못 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모든 건물이 무너져 사라져서, 벽돌이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전혀 모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는 벽돌 하나가 남아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전혀 다릅니다. 벽돌 하나가 작고, 있으나마나 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세상에 있는 모든 건물의 높이와 건축 방법에 절대적인 영향을 줄 만큼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모든 건물과 벽돌이 무너지고 사라졌을 때, 벽돌 하나가 남아 있으면, 그것을 조사해서 벽돌을 무엇으로 만드는지 알아낼 수 있습니다. 무엇으로 만들어야 하고, 또 재료를 어떻게 해야, 높은 건물을 쌓을 만큼 벽돌이 단단하고 튼튼해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건물이 모두 무너지고, 벽돌 하나 남지 않았다면, 다시 좋은 벽돌을 만들 수 없거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은 세상의 모든 건물들이 수백 년 이전처럼 약해질 것입니다. 아니면 위험을 피하기 위해 모든 건물이 1,2층의 높이로 지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처럼 신앙도 언제나 순탄한 것은 아니죠? 어떨 때는 크고 단단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중심에 자리하고, 그 중심에 따라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웬만한 것들은 감수할 수 있을 것처럼 자신의 믿음이 제법 그럴듯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어떤 유혹과 시련이 와도,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또 어느 순간 시련의 파도 앞에서 믿음의 크기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실감하게 됩니다. 종이배보다 작고 약합니다. 시련이라는 작은 물결만 밀려와도, 어느새 젖고 찢어지고, 가라앉고 맙니다. 깊은 밤까지 뒤척이며 고민해 봐도, 사방에 아픔과 어려움만 가득해서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소망의 작은 빛이 희미하게나마다 보였으면 좋겠는데, 누구를 생각하고, 어디를 계산해 봐도 전혀 볼 수 없는 때가 닥쳐오곤 합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도 우리 모두가 걸어온 길을 걷게 된 사람들, 우리 모두가 겪을 수밖에 없는 아픔을 겪는 두 사람을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입니다. 두 사람을 찾아오신 예수님은 절망의 자리에 소망을 주셨고, 고통의 자리에 기쁨을 대신 채워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약속하신 대로,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몇 차례 제자들에게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고난과 조롱을 받고 죽겠지만, 그러나 3일만에 부활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 설명과 말씀을 전해 주시는 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싫어하는 사람들이나, 아니면 잘 모르는 사람이 믿지 않은 것은 당연하겠죠?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도 부활을 믿지 않았고, 예수님이 특별히 택하시고, 몇 년을 함께 생활하며 가르치셨던 열두 제자들마저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였습니다. 이들을 끊임없이 가르치시고, 말씀으로 교육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했을지 어느 정도 이해되기도 합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언제나 짝사랑이라고 말하곤 하죠? 부모는 할 수만 있으면 끊임없이 사랑을 베풉니다.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자녀들은 부모가 베푸는 사랑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에 눈길을 고정하고 돌아볼 줄 모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도 비슷해 보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극진히 베푸셨습니까? 자신이 직접 죽어서라도 인간을 살리시겠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도 큰 사랑이고 희생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의 이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들 멋대로 판단하고, 자기들 좋은 대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약속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했던 이들과 제자들마저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믿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는 날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는 것을 믿고, 영접하는 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세 여인만이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며 무덤까지 찾아갔을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7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이라고 하시면서, 베드를 특별히 언급하셨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을 따르고 함께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왜 특별히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시고, 베드로를 따로 말씀하시면서 약속의 자리를 되새기게 하셨겠습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9절의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이라는 한 마디로 설명이 되는 여인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존중을 받는 사람이 있고, 무시를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곱 귀신에 들렸다고 하면, 무시 받는 정도를 넘어선 경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막달라 마리아의 삶이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귀신이란,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을 망가뜨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무너뜨리고 해치는 게 가장 큰 존재 이유입니다. 귀신 하나에 억눌려 산다는 것만으로도 그 여정들이 훤한데, 일곱 귀신에 들렸으니, 막달라 마리아가 얼마나 괴롭고 비참했을지 알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사람의 몸으로 살았지만, 마치 귀신과 다를 바 없이 살았던 것입니다.

 

이랬던 막달라 마리아의 삶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야 비로소 사람다워집니다. 사람답게 말하고, 사람답게 행동하고, 사람다운 대접과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느 날 돌아가셨으니, 막달라 마리아의 슬픔과 좌절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다시 귀신에 붙들리지 않을지 두려웠을 것이고, 이제는 그 누구도 자신을 도와줄 하나 없는 앞날에 대한 좌절감과 무서움이 큰 파도처럼 막달라 마리아를 휩쌌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제자들 중에서도 자기주장이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다른 제자들보다 앞장서기를 좋아했습니다. 작은 시골 마을의 가난한 어부였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온전해집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베드로의 삶은 기껏해야 어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따르면서부터 베드로는 특별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과 매일을 같이하는 정도를 넘어서, 특별히 선택된 열두 명이 되고, 그 중에서도 대장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식사를 제대로 못 할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곁에 몰려들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베드로의 전성기는 예수님을 만난 후였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르다가 결국 모든 것을 잃지 않을까 염려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막상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보니, 이전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수록 베드로의 입김은 세지고, 고개는 높아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느 날 죄수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 가까이 할수록 커졌던 베드로의 힘과 기쁨은, 예수님의 죽음으로써 절망으로 곤두박질칩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뒤로하고 몇 년 예수님을 따랐던 베드로에게 무엇이 남았겠습니까? 차라리 어부로서 살았으면 나았겠다는 후회도 들었을 것이고,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좌절감이 베드로를 억눌렀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를 찾아와 만나시고, 특별히 베드로에게 약속의 자리를 말씀하신 까닭이 이것입니다. 소망의 그림자마저 보이지 않을 만큼 절망과 좌절에 휩싸인 자들,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이들에게 부활의 씨앗이 주어졌음을 보여주시고, 소망을 가지고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부활 신앙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러나 신앙인들에게는, 좌절과 고통 속에 있는 삶을 새롭게 만들어 갈 수 있는 시작점이 됩니다. 무너진 것들을 바로 세울 수 있고, 망가진 것들을 회복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영원한 소망과 회복의 씨앗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오늘 우리의 삶에도 회복과 소망의 씨앗입니다. 각자가 살아온 길과 방향과 모양이 다릅니다만, 그럼에도 슬픔과 절망과 고난을 겪지 않은 삶은 또한 없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소망의 끈이 모두 끊어져서 믿음마저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가장 큰 절망 속에 있는 막달라 마리아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죽어가듯 살아갈 수밖에 없는 베드로에게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베푸신 주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와 별반 다르지 않는 과정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아픔과 절망의 크기가 클수록 주님은 더 아끼시고 먼저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절망과 슬픔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품을 수 있도록 부활하셨고, 우리에게 부활의 씨앗을 심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셨으나, 우리에게 소망의 씨앗으로 부활하신 주님께 감사하고, 삶의 여정이 거칠고, 주위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이 주신 부활의 씨앗을 품은 자처럼, 이제는 회복되고, 기쁨이 가득하고, 소망이 있는 여정들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 주님이 주신 것들을 품고 살아감으로써, 삶의 모든 여정들이 더 복되고 기쁘고 은혜가 가득한 삶을 살아 나아가는 복된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