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대로 살아야만 복됩니다
성경: 사무엘상 4장 1-11절(구 413쪽)
찬송: 303장(날 위하여; 통403), 204장(주의 말씀 듣고서; 통379)
설교: 20190505.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먼저 사진 몇 장과 짤막한 영상을 보겠습니다.(티벳 불교의 마니차)
TV나 사진 등에서 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영상에서도 잠깐 나오는 것처럼, ‘마니차’라 불리고, 우리말로는 ‘마철’이라고도 한다고 합니다. 전부터 이것을 찾으려 했는데, 이름을 몰라서 최근에야 찾게 되었습니다.
마니차라고 불리는 것의 크기는 다양합니다. 어른 몇 명이 함께 돌려야 할 정도로 큰 것도 있고, 한 손으로 돌릴 수 있는 작은 것도 있습니다. 불교도, 나라와 교단에 따라, 절차와 기도하고 제사하는 모습이 다르겠죠? 마니차라는 것은 티벳이라는 나라의 불교인들이 기도할 때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돌리며 기도하는지 아세요?
티벳 불교의 설명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8만 자가 넘는다고 합니다. 이것을 다 읽으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쉽지 않겠죠? 그래서 생각해 낸 게 마니차입니다. 다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원칙으로는 마니차 속에 부처의 말씀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물론 모든 글자가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고, 대표하는 말이나 혹은 몇 글자만 들었을 수도 있고, 그저 상징할 뿐 실제는 글자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티벳 불교에서는, 마니차를 한 번 돌리면, 부처님의 말씀을 한 번 읽은 공덕, 공로로 인정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나, 아니면 빨리 공덕을 쌓고 싶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한 번씩 마니차를 돌린다든지, 아니면 작은 마니차를 계속해서 돌립니다. 큰 것은 힘도 들고 시간도 꽤 걸리겠지만, 어찌 되었든 불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쉽고 빨리 할 수 있겠죠?
이것을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마니차를 돌리는 까닭을 듣고서, 저는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는, ‘저게 부처님의 말씀과 무슨 상관이 있나?’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 쉽고 간단한 방법이라 사람들을 쉽게 유혹할 수 있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해서 전해 준 까닭이 무엇일까요? 읽고 배우고, 그리고 가르침대로 살라는 것이죠. 그런데 마니차를 돌리는 것은, 경전을 읽고 배우고, 경전대로 사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생각해 보면, 경전을 읽고 배우는 것과, 마니차를 한 번 돌리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어려울까요? 부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과, 엄청나게 큰 마니차를 돌리는 것 중에 어느 게 쉬울까요? 시간으로 계산해도 너무 쉽게 답이 나옵니다. 경전을 읽는 것은 며칠이면 할 수 있습니다. 경전을 배우는 것은 몇 달 혹은 몇 년이라는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배운 대로 사는 것은 평생 살아도 부족한데, 마니차를 돌리는 것은 한 시간에도 수십 번, 수백 번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나 수고나, 그 어떤 것으로 판단해 봐도, 마니차를 돌리는 게 너무 쉽고 간단합니다.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쉽고 간단하니 당연히 저런 방법을 생각해 냈겠죠?
그러나 저렇게 평생 몇 천, 몇 만 번을 돌린다고 공적이 쌓이겠습니까? 불교에 대해 잘 모르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뭔가 잘못 생각한 것이고,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믿고 살도록 변질된 것으로 보입니다.
설교 시간에 이것을 보여주고 말씀드리는 까닭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산다고 하는 우리도 이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행동들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글로 적어서 우리에게 주신 까닭이 뭐겠습니까? 기록된 말씀이니, 사람의 뜻과 계산에 따라 변질시켜서는 안 된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변질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라는 것이죠? 읽어야 알고 기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읽어 기억했으면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요? 말씀대로 행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마치 마니차 돌리 듯 신앙생활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해 주어진 것들을 따라 행하며 사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많이 읽고, 아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미신적이면서도 나쁜 모습은, 말씀을 읽고, 기억하고, 실천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성경이나 십자가를 화려하게 치장해 가지고 다니면, 하나님이 지켜 주시고 함께하시고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을 기록해 주신 까닭은, 읽고 배운 대로 행하도록 위한 것이지, 멋지게 치장하고 다니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까닭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죄의 무서움을 알고, 죄와 죽음에서 멀어지고, 예수님을 믿고, 말씀대로 행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십자가를 크게 높이 만들고 세우고 치장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마니차 돌리 듯 하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시는지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이 선지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무렵에 블레셋이라는 민족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습니다. 현재 이름으로는 팔레스타인이라는 민족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원수가 되어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적군이 공격해 왔으니, 당연히 이스라엘 민족도 맞서 싸우겠죠?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첫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패하고 맙니다. 전쟁이란, 목숨을 걸고 적과 싸우는 것이니 당연히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까닭은, 자기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민족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전투에서 패한 충격이 너무 커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분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이 내놓은 답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만들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처음 만들어진 언약궤는 남아 있지 않고, 성경 속에 모양과 크기 등이 나온 것으로 재구성해 보면, 이런 모습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언약궤 사진)
본래 이 속에는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블레셋과의 첫 전투에서 크게 패하자,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다른 지역(실로)에 모셔져 있던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오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으면 전쟁에서 반드시 이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얼마나 크고, 확실했는지,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져왔을 때 잘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전쟁에서 이기게 될 거라는 기대에 땅이 울릴 만큼 큰소리로 환호했습니다. 또 적군이었던 블레셋 사람들도, 하나님의 언약궤가 전쟁터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처럼 전지전능한 신 하나만을 믿은 게 아니고, 여러 신들이 있다고 생각하며 섬겼습니다. 농사를 책임지는 신, 가축일을 책임지는 신, 바다를 책임지고 다스리는 신, 전쟁을 담당하는 신 등이 각기 따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가장 강한 나라였던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탈출한 것은, 이집트의 강한 신들을 하나님이 모두 이기고 함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쟁과 산의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그토록 강한 신이 전쟁터에 왔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하지만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지고 와 싸웠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죽은 이스라엘 군인들의 수만 해도 3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당연히 이길 거라는 전투에서 3만 명이 죽고 패하는 것만으로도 믿기 힘든 충격인데, 비극이 이것으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본문 11절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는 말씀처럼, 언약궤를 빼앗겼고, 제사장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마저 함께 죽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언약궤는 단순히 몇 가지 거룩한 것이 들어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도구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바쁘게 생활하다 보면, 하나님이 언제 어떻게 함께하시는지 느끼는 게 쉽지 않죠? 하나님을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음성을 귀로 음성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것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못 하게 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신들처럼 뭔가 모양이나 형상을 만들어 섬기려는 유혹을 숱하게 받았고, 실제로 그런 죄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직접 새겨 주신 십계명 돌판 등이 들어 있는 언약궤는, 하나님이 삶의 자리에 언제나 함께하신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상징물이었습니다. 회막에 거룩하게 간직되어 있는 언약궤를 보고 듣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시고, 함께하심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가장 확실한 언약궤를 가져왔는데, 싸움에서 크게 패한 것은 물론, 아예 언약궤마저 빼앗겨 버렸으니 충격과 두려움이 너무 컸습니다. 게다가 당시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 제사장이나 선지자 혹은 재판관의 역할을 한 사사가 지도자 역할을 했는데, 비록 악한 자들이었지만 제사장으로, 지도자로 활약하던 홉니와 비느하스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지하고, 힘을 얻을 만한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패배와 아픔을 주셨겠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잘못 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행해야 하는데, 이런 것에는 관심이나 최소한의 노력도 없었고, 그러면서도 우상을 섬기듯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는 모습으로 종교 생활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오히려 이 때문에 무서운 징계를 내리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두껍고 멋진 책으로 장식해서 다니라고 주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많이 읽고 아는 것을 목적으로 주신 게 아닙니다. 많이 공부하거나, 손으로 베껴 쓰도록 주신 게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을 예쁘게 장식하고, 많이 읽고, 배우고, 베껴 쓰는 것에는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며 행하며 사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십자가를 높이 크게 세우는 것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십자가를 어디다 두고, 어떻게 만드느냐를 두고 서로 원수가 되어 싸우는 경우가 허다할 만큼 십자가에 대한 관심은 엄청납니다. 오죽 하면, 어두울 때 도시 주택가를 보면, 빨간 교회 십자가와 모텔 간판이 가장 많이 보인다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또 십자가를 목걸이나 귀걸이로 달고 다니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노력도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성경책을 차와 집에 간직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구절을 액자에 담아 두면 복이 온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미신에 불과합니다. 십자가를 매달고 다니면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인정해 주실 거라는 것은 완전히 착각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모습들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른다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다면, 그것을 나의 삶과 생각에서 직접 드러내야 합니다. 입술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냥 성경을 들고 다니고, 십자가 귀걸이나 목걸이로 치장하는 것으로 드러내봤자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매일 살아가는 가정과 일터와 동네와 길거리에서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이 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받습니다. 단지 성경을 가지고 다니고, 어디에 써놓는 것에 그친다면 우리의 영혼과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몸이 아프거나 다치면 병원에 가죠? 치료를 받을 건 받고, 필요하면 약을 처방해 주는데, 성경책과 십자가는 바르고 건강한 신앙생활,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을 만한 신앙생활을 위한 처방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병원에서 처방전을 주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처방전을 가지고 다니거나 어디다 붙여놓으라고 주는 것도 아니죠? 혹시 그런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병이 낫거나 건강해지지 않습니다. 처방전대로 약을 받아, 먹을 것은 먹고, 바를 것은 발라야만 비로소 병이 낫고, 아픈 상처가 아물고, 건강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다니거나 매달거나 치장하는 것으로 그치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책, 다른 소설책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말씀으로 인정하고, 그렇게 따라 살면, 구원을 받고 복을 받는다는 것을 믿으며, 내가 따라 살고, 그대로 행하며 살도록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가장 먼저 받았지만, 가지고, 치장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에 대한 믿음과, 말씀대로 살아야만 복을 받는다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멋대로, 욕심대로, 마니차를 돌리 듯 말씀을 대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처참한 실패였습니다. 이 모습을 기억하며 우리의 신앙생활과 모습을 다시 한 번 살펴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기억하고, 구원과 복의 약속으로 주신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고, 이 말씀에 따라 삶의 과정에서 매일 매순간 행하며 따라 살아감으로써, 날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 말씀을 통해 약속된 구원과 복을 받는 복된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
'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190519)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십시오(삼상 5장 1-12절) (0) | 2019.05.19 |
|---|---|
| (20190512)말씀을 기반으로 삶을 세워가십시오(삼상 4장 12-22절) (0) | 2019.05.12 |
| (20190428)말씀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십시오(삼상 3장 11-21절) (0) | 2019.05.01 |
| (20190421)부활의 씨앗으로 소망을 품으십시오(막 16장 1-11절) (0) | 2019.04.21 |
| (20190414)하나님이 찾아오시는 사람이 되십시오(삼상 3장 1-10절) (0) | 2019.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