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들린 것이 없어도
성경: 사무엘상 9장 1-10절(구 419쪽)
찬송: 368장(주 예수여 은혜를; 통486), 433장(귀하신 주여; 통490)
설교: 20190714.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오래 전 신대원을 다닐 때, 친구 전도사와 이야기를 나누다, 자신이 다니던 교회 한 집사님이 큰 상처를 받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곳도 시골에 있는 작은 교회인데, 강사 목사를 불러서 부흥회를 가졌답니다. 부흥회는 말 그대로 교인들에게 영적 활기를 불어넣고, 또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마음을 새롭게 해서 신앙생활하도록 하는 목적이죠? 부흥회를 통해서 기쁨과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크게 낙심했다 것은 바람직한 모습은 아닙니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물질 즉 헌금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 집사님이 말 못 할 만큼 상처를 받은 까닭은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강사 목사가 축복 기도해 준다면서, 각자 믿음에 따라 작정하라고 했습니다. ‘작정’이라는 것은, ‘얼마의 금액을 헌금하겠다’거나 ‘어떤 물건을 교회나 목회자한테 바쳐야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교회와 목회자에게 가져다 바치면, 하나님께서 바라는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강사 목사가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몇 가지 나열했습니다. 교회에 필요한 앰프 400만원, 강대상 200만원, 성찬상 100만원 등을 말하면서, 분에 넘치도록 헌금하라고 했습니다. 몇몇 교인들이 무엇을 감당해서 하겠다고 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양복 한 벌 50만원을 할 사람 손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분들은 대부분 이미 작정했는데, 이 할머니는 계속 안 들고 앞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강사 목사가 이 집사님을 집중적으로 비난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믿음으로 훨씬 큰 비용을 작정한다고 손을 들었는데, 하나님의 종을 섬기는 데 그만한 돈이 아까워서 작정을 못 하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헌신과 헌금하지 않으면서도 복을 받을 것 같냐며 열을 내며 비난했습니다.
이 정도로 하면 상처를 안 받을 사람이 없죠? 이 집사님은 가난한 분이었지만, 아까워서 안 한 게 아니었습니다. 청력이 아주 약한 분이었다고 합니다. 강사 목사의 말을 알아듣지 못 했다는 겁니다. 잘 알아듣지 못 하는 것 때문에, 다른 교인들이 있는 자리에서, 말씀을 듣는 시간에 부흥강사로부터 그런 비난을 받았으니, 얼마나 속이 상했겠습니까?
부흥강사가 잘못한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도의 사정을 확인하지 않은 채 비난하고 상처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늘 본문과 연결해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인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목사의 생각대로라면, 하나님은 물질에 따라 움직이는 분으로밖에 안 보입니다. 많이 바칠수록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꿔 생각해 보면, 만일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데, 빈손으로 오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 할 사람이 됩니다.
신앙인들 중에 이런 생각을 가진 분들이 참 많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뭔가를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들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고,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장 예쁘게 치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에서도 직장 상사나 웃어른들을 만날 때는 얼마나 깨끗하게 하고, 예쁘게 꾸미는데, 하물며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사회에서보다 훨씬 더 정결하게 깨끗하게 예쁘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옷을 좀 소박하게 입은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른 모습이 아니라고 합니다. 헌금할 때도, 좀 지저분하거나 구겨진 것은 깨끗하게 씻고, 다리미 같은 것으로 뻣뻣하게 만들어서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거룩해야 합니다. 복장도 아무렇게나 입고, 또 깨끗하게 씻지 않아서, 함께 예배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할 때 감사한 마음으로 물질을 드리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괜찮지만, 그렇지 않으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더 큰 문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질을 바쳐야 하고, 가장 깨끗하고 좋은 옷을 잘 차려 입지 않으면 마치 하나님이 싫어하시거나, 예배를 안 받으실 거라 생각하는 것에는 큰 문제점,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너무 멀리 계시고, 너무 어려운 분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귀히 여기는 것 자체는 괜찮습니다만, 정도를 넘어서다 보면, 하나님을 너무 무섭고, 어려운 분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인간은 피조물에 불과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기쁘고 기대가 되는 게 아니라, ‘혹시 잘못해서 벌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하나님은 언제나 벌하시려고 신경질적인 눈으로 바라보시는 그런 분으로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멀리 계시고,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라, 아버지로 고백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에서는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자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본래대로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종의 수준도 안 되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죄를 받고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자녀라는 신분을 갖게 됩니다.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과, 자녀가 부모를 섬기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생각하지 못 하는 사울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특히, 그가 자신의 아버지를 대하는 모습과는 너무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사사 즉 재판관으로서 이스라엘을 잘 지도하다가, 나이가 많아져 그의 두 아들에게 자리를 넘겨주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의 두 아들은 돈을 받고 재판을 부정하게 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찾아와서, 이제는 왕을 세우고,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게 해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 자기들이 원하는 세상, 자기들의 권리가 커지는 것을 원함을 아셨지만, 결국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왕으로 세워질 사울이 나오는데,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아버지가 키우는 암나귀 몇 마리 잃어 버렸습니다. 당시의 암나귀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귀한 것이겠죠? 그래서 아버지가 사울에게 사환 하나를 데리고 가서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사울과 사환은 이곳저곳을 열심히 찾아다녔지만 찾아내지 못 했습니다. 본문 뒤 20절을 보면 사울과 사환이 나귀들을 찾으러 다닌 시간이 사흘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상보다 시간이 길어지자, 이제는 오히려 아버지가 자신을 걱정하실 것이 염려되니, 그냥 집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사울은 자신의 아버지가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지도 알고, 아버지의 근심을 덜어드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집으로 돌아가려다, 함께 갔던 사환이, 가까운 곳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 사무엘이 있으니 가서 물어보자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릴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나마 사환이 1/4 세겔이 있다고 하자, 그제서야 사환의 의견대로 사무엘을 찾아가기로 결정합니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 두 이야기를 기록한 까닭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실 사울의 집안에서 암나귀들을 잃어버리고, 그래서 찾으러 다녔다는 건 그리 대단한 사건은 아닙니다. 특히 성경에까지 기록될 만큼 중요한 일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라는 답이 맞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을 기록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나귀를 잃고 찾으러 다니는 사울의 이야기와, 사무엘을 찾아가는 이 과정을 함께 둠으로써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울이 자신의 아버지를 대하는 것과, 하나님을 대하는 모습이 크게 달랐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어떤 것을 원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귀를 찾아보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사울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집에서 부리는 여러 사환들이 있을 것이니, 자신은 그저 시키기만 해도 괜찮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울은 아버지의 말씀대로 합니다. 핑계대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고 최선을 다해 찾아다닙니다. 이것만으로도 사울의 효성을 알 수 있는데, 시간이 너무 지체되자 오히려 자신들 때문에 염려하실 거라며 돌아가자고 합니다. 아버지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무엇을 원하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귀의 행방을 알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을 찾아가는 과정에서는 어떤 것 같습니까? 당시에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할 때는 뭔가를 드리는 게 관례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가자는 사환의 말에 사울이 가장 먼저 염려한 것도 드릴 게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사환에게 돈이 조금 있어서 찾아가긴 했지만, 바꿔 생각해 보면, 사환에게마저 돈이나 다른 것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주의적인 태도입니다. 내가 뭔가를 바치고, 뭔가 행한 업적들이 있어야 하나님이 받아주신다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도움을 받으려면 반드시 뭔가를 가져와야 한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까? 손에 많은 것을 가져오고, 깨끗하고 화려하고 좋은 것을 입어야만 하나님이 만나주신다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으로부터 도움과 말씀과 기도를 받으려면 반드시 뭔가를 바쳐야 한다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올 때마다 바칠 좋은 것들을 가져오라고도 하시지 않습니다.
사울은 육신의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알고, 노력했으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은 잘 모릅니다. 별로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육신의 아버지에게는 나귀 몇 마리보다 자신을 더 염려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하나님께도 돈보다, 차려입은 옷보다 자녀가 훨씬 귀하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아예 천하보다 한 생명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돈과 조건이 그처럼 중요합니까? 하나님은 손에 뭔가를 들고 오지 않으면, 뜻과 말씀을 주시지 않을 만한 분입니까? 돈 몇 만원에 좌우되고, 마음이 끌리는 분입니까? 작정과 헌신에 따라 사랑을 달리하십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과 정성으로 드리는 것을 기뻐하시지, 우리 손에 쥐어진 액수와 옷차림과 헌신에 따라 우리를 달리 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냥 우리 자체를 사랑하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사울이 자신의 아버지와 하나님을 대하는 이 두 모습을 통해 보면, 자신의 아버지보다 하나님을 훨씬 더 어려워하고, 오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하나님이 무엇을 귀하게 여기시는지를 알았다면,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며 찾아갔을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어려운 손님들을 찾아갈 때는, 깨끗하고 좋은 옷을 정결하고 차려 입고 갑니다. 그러면서도 손에 뭔가를 들고 갑니다. 무엇을 가지고 갈지 계속 고민할 때도 있습니다. 그게 예의라고 합니다.
하지만 부모님을 뵐 때는 어떻습니까? 저는 30년 가까이 부모님과 따로 살고 있습니다만, 부모님을 찾아가 뵐 때마다 좋은 옷을 입을까, 얼마를 드릴까를 크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입고 갈 좋은 옷이 없다고 해서 안 가거나, 드릴 돈이 없다고 해서 안 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가장 편한 복장으로 지낼 수도 있고, 가장 편한 자세로 누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부모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도 아닙니다. 부모님이 그 누구보다도 가장 귀하십니다. 할 수만 있으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것들로 드리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가진 것에 따라 마음이 바뀌지 않고, 부담을 갖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다른 무엇보다 저를 자식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기에 가장 부담이 없는 모습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과 친밀함의 수준도 이 정도입니다. 우리 손에 아무것도 없어도, 가까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비싸고 화력하고 좋은 옷들이 아니더라도, 가장 편한 복장으로 나아가 도움을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것들, 입은 것들, 바치는 것들에 따라 사랑과 관심을 달리하시는 쪼잔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얼마나 크고 확실한지를 알면, 육신의 부모님보다 더 편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하고 예배할 수 있습니다. 문제의 크고 작은 것을 나누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육신의 아버지가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알면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과 능력은 제대로 알지 못 했습니다.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부담과 물질과 오해라는 벽을 높이 쌓아 올렸습니다. 이 때문에 후반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만나기 전부터 부담이 되고, 고민이 되는 무섭고 어려운 어른이 아닙니다. 꼭 좋은 것으로 꾸미고, 좋은 것을 가져야만 좋아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저 우리의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기쁘게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감사와 기쁨을 담아 드리는 것을 좋아하긴 하시지만, 그 속에 담긴 우리의 마음을 기뻐하시지, 액수와 겉모습에 끌리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아무것도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께 기쁘게, 부담 없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할 수 있고, 예배할 수 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이 마음, 육신의 부모가 우리를 아끼고 조건없는 사랑으로 함께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과 자비로 대하심을 알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와 도우심을 구하고, 친밀하게 함께함으로써, 하나님의 간섭 가운데 날마다 더욱 복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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