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실패도 복으로 바꾸십니다
성경: 사무엘상 9장 1-10(구 419쪽)
찬송: 258장(샘물과 같은 보혈은; 통190), 338장(내 주를 가까이; 통364)
설교: 20190721.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사회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죄에 따라 구치소나 교도소에 가죠? 구치소는 형량이 정해지기 전에 가고, 재판에서 형량이 정해지면 교도소에 갇히게 됩니다. 군대에서도 이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곳들이 있습니다. 큰 범죄라고 보기 어려운 정도의 근무태만이나 기강 위반 등의 문제를 일으키면 영창이라는 곳에 갑니다. 구치소와 비슷한 역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군인이나, 군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면, 사회에서처럼 법에 의해 재판을 받고, 교도소에 갈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사회에 있는 교도소보다는 군이 별개로 운영하는 군 교도소에 간다고 합니다.
저는 직접 영창이나 군 교도소에 가보지 않았습니다. 영창이나 군 교도소에 갈 만한 큰 문제나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뿐만 아니라 그런 곳을 방문해 본 적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런 곳이 어떻게 생겼고, 그곳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오래 전에, 군 교도소에서 일한다는 분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사회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교도소에 가서 정해진 형량을 채워야죠? 노역도 하고, 출소하기 전까지 갇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군 교도소 생활에 비하면 훨씬 덜 할 것 같습니다. 군대라는 조직이 의무적으로 가야 하고, 강제적인 면들이 훨씬 강하기 때문에, 군 교도소도 사회 교도소보다 훨씬 더 엄격하거나 제약되는 것들이 많을 것입니다.
군 교도소에서 일한다는 분의 이야기 중에 수감자들에게 내리는 여러 형벌에 관한 것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게 진실인지 확인할 수 없고, 또 당시는 그랬더라도 지금까지 그런다고 확정하긴 어렵습니다.
아무튼, 그분의 이야기에 따르면, 죄가 가장 큰 사람들에게만 내리는 벌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처벌이 가장 무서울까요? 몇 십 년 전에는 구타하고 고문하거나 굶기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요즘은 그럴 필요도 없고, 효과가 없는 일이죠. 그러면 어떤 처벌을 내리는 것이 무서울까요?
군 교도소에서 일하는 분의 말은 전혀 예상 밖이었습니다. 범죄자를 운동장 같은 곳으로 데려가서 삽 한 자루를 던져주며, 너비와 폭 깊이 2m씩 등으로 크기를 정해주고 땅을 파라 한답니다. 2m 깊이까지 판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죠? 수감자는 또 다른 처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땀 흘리며 정해진 시간까지 땅을 팝니다.
시간이 돼 교도관이 와서 어떻게 하는 게 수감자에게 가장 괴로운 일일까요? 왜 제대로 하지 않았다며 더 무서운 처벌을 내리거나, 여러 말로 꾸짖으면 힘들겠죠?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죄수가 파놓은 땅속에다 담배꽁초나 성냥개비 하나를 던져 넣고, 다시 그것을 메워서 본래대로 복구하라고 한답니다. 죄가 무거운 사람에게 내리는 처벌로는 별것 아닌 것 같죠?
저도 처음 들었을 때는 ‘에게 그게 뭐야? 그게 벌이 되겠어? 땅을 잘 파는 사람들에게는 벌이나 되겠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힘이 아주 약한 사람들이나 여성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군대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고 건강하고 힘이 좋잖아요? 그런 사람에게 땅 파는 것 자체는 육체적으로는 힘들긴 하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닙니다. 더욱이 범죄자에게 주는 가장 무거운 처벌이라고 하기에는 안 어울리는 것 같죠? 그런데 이 벌이 얼마나 무서운지, 이를 계속 버티는 사람들이 없답니다. 몇 번까지는 해내지만, 점차 모든 의욕을 잃고, 정신이상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물론 땅을 파는 게 쉽지 않은 건 분명합니다. 또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라, 정신적으로 더 힘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의욕을 잃게 만들고, 정신이상을 일으킬 만큼 가혹한 처벌은 아니죠? 이것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훨씬 더 큰 고통을 줄 수 있는 형벌은 얼마든지 있겠죠? 그럼에도 땅을 팠다가 다시 덮는 단순한 이 과정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려움을 주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무엇보다, 자신이 힘들게 해낸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땀 흘리며 애썼으면 그에 맞는 대가를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살아가는 의미가 되기도 하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죽을힘을 다해 해낸 것이 전혀 쓸모없는 일이라는 자괴감에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비록 죄를 저질러 감옥에 있고,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하는 사람이지만, 힘들게 땅을 파냈으면, 그게 무엇인가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파묻는 용도로 사용된다든지, 아니면 건물을 짓기 위한 기초공사로 사용되면, 자신의 수고와 노력을 통해 뭔가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수고한 땀과 수고의 가치가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 시간 동안 열심히 땀 흘려 수고해서 목표에 도달했더니, 이제는 파냈던 곳을 그대로 원상복귀시키라는 것입니다. 몇 시간의 수고가 겨우 담배꽁초나 성냥개비 하나 넣고 덮을 가치밖에 안 된다는 생각을 심어줍니다. 이것이 몇 번 반복되면, 허무함과 무가치함으로부터 오는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큰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내려지는 가장 무서운 처벌이라는 게 이해가 됩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이 하는 일로부터 반드시 의미와 가치를 찾아야 합니다. 짐승들이야 그저 먹고 배부르고 살아가면 만족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인간만은 같은 힘을 들이고, 같은 시간 일해도, 그것이 무엇을 만들어 내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집니다. 아무리 많은 수고와 노력을 들였어도,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못 하면 절망으로 치닿게 되고, 좋은 것을 만들어 내면 소망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되는 사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울은, 키우던 암나귀들을 잃어버렸으니 사환을 데리고 가서 찾아보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이곳저곳을 찾아다닙니다. 암나귀가 별것 아니었으면, 찾으라고 하지도 않았겠죠? 또 사환까지 데리고 가서 찾으라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만큼 나귀가 큰 재산이었습니다.
요즘이야 교통수단이 발달해서 움직이는 것이 쉽습니다만, 본문 당시에는 기껏해야 말이 전부였습니다. 특히 도로 사정이 안 좋았을 테니,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사울은 아버지의 잃어버린 나귀들을 찾아 사흘을 고생했지만 찾지 못 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지금도 면적이 아주 작습니다만, 당시도 우리나라 강원도 크기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전지역을 열두 지파로 나누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없는 개념이긴 합니다만,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강원도에 열두 개의 군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속해 있는 베냐민 지파를 샅샅이 뒤졌지만, 나귀를 찾지 못 하자 인접해 있는 에브라임 지역까지 찾아다녔습니다.
이 정도로 노력했으면 최선을 다한 것이긴 합니다만,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는 수고에 대한 대가가 자동으로 생기는 게 아닙니다. 사울이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나귀를 찾으러 나가서 수고한 것 자체는 우리가 본받을 만한 좋은 모습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그렇게 수고했지만 나귀를 찾지 못 했으니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사흘 동안 들인 수고와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또 본문에서는 사울의 외모에 대해, 아주 잘생겼다고 특별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또 키가 얼마나 큰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사울의 어깨 높이밖에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의 가문도 알아주는 유력한 가문이었습니다. 요즘 사용되는 말대로 하면, 금수저 가문일 뿐만 아니라, 사울의 외형적인 조건마저 좋았으니, 부족한 것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면 무엇 하겠습니까? 이런 사울이 하는 일이라는 게 겨우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다닌 것에 그칩니다. 나귀를 찾아다니는 데 있어 좋은 가문이라는 조건도, 크고 잘 생긴 외모도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것도 사환을 데리고 사흘을 찾아다녔지만 헛수고에 그쳤으니, 사울이 겪어야 하는 허무함과 상실감이 얼마나 클지 짐작되지 않습니까? 3일 동안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자지도 못 하고 곳곳을 다녔지만, 나귀의 흔적조차 알아내지 못 했으니 실망감이 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울 만큼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이 절망감과 상실감이 한순간에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려주는 사무엘이라는 선지자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겨우 나귀 정도를 찾아다니는 사람밖에 안 되는 사울, 그마저도 결과를 얻어낼 수 없었던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이 되도록 준비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왕의 자리는 특별하기 마련입니다. 왕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왕은 가장 높은 자리고, 가장 큰 권력을 가집니다. 사울은 왕이 되는 것만이 아니라, 게다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첫 번째 왕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얼마나 영광스럽고 기쁘겠습니까?
사울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고, 좋은 인물이긴 했지만, 왕이 되기에 좋은 여건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열두 지파 중에서 가장 막내, 가장 지파 출신이었습니다. 게다가 베냐민 지파가 워낙 큰 문제를 일으켜서, 나머지 열한 지파와 전쟁을 치르면서, 겨우 600명밖에 남지 않을 만큼 전멸의 위기를 겪은 지파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울이 왕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감히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되었고, 그 이야기를 사무엘을 통해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겨우 이름만 남은 작은 지파 출신에, 겨우 짐승이나 찾아다닐 수밖에 없는 사울이, 수많은 백성들을 이끄는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사울은 당장 원하던 나귀를 찾지 못 했지만, 왕의 자리를 약속받았으니 비교가 안 될 만큼 성공한 것이었습니다. 일의 결과로 순서를 정해 보면, 나귀를 찾지 못 한 것은 헛된 수고만 한 실패라 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나은 것은, 열심히 수고해서, 원하던 대로 나귀를 찾은 것으로서 본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나귀 몇 마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왕의 자리를 약속받았으니, 기대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성공하고 잘된 것입니다. 게다가 이후에 잃어버렸던 나귀마저 찾았으니, 이보다 더 잘되고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보면, 사울이 며칠 동안 실패한 것은 오히려 사울에게 복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의도를 가지고, 나귀를 안 찾은 것 아니고, 왕의 자리를 얻기 위해 사무엘을 찾아간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이를 계기로 더 잘되는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삶에도 사울처럼 실패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몇 달, 수년 동안 수고하고 애썼던 것들이 흔적 없이 사라지는 아픔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는 속담이 있지만, 할 수 있는 최선과 최고의 노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순간에 무너지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나 똑같이 넘어지고 실패하고 망가져도 그것으로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패는 누구나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을 만들어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못 하면, 그 모든 수고와 노력이 말 그대로 물거품이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실패가 됩니다. 하지만 사울의 실패가 결국 왕의 자리로 이끌었던 것처럼, 실패와 고난이 우리로 더 복되고 좋은 길로 인도한다면, 실망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할 일입니다.
이에 대해 로마서 8장 17,18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고 말씀하십니다. 고난을 겪지만, 고난이 하나님의 상속자,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받을 자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고난을 받습니다. 때로는 수고하고 애쓴 것들 한순간에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뜻대로 되고, 언제나 성공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이 땅의 것에만 집중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생각할 필요도 없고 생각도 없습니다. 이를 사울의 경우로 예를 든다면, 열심히 찾아다녀서 결국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서, 더 이상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생이 끝나고 말았으면 어땠을 것 같습니까?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고, 훤칠한 인물이었지만, 고작해야 잃어버린 나귀를 되찾은 사람에 그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좀 잘 먹고 잘 살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 사람을 칭찬하거나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의 것을 찾고 만나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새롭게 됩니다. 실패하고 잃어버린 것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좋은 것들을 얻게 되니, 더 잘되고 성공한 것입니다. 몇 십 년 세상의 것들을 잃은 대신, 영원한 하나님의 것을 찾게 되면 성공한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좋은 모든 것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끝나면 그 삶은 손해가 되고 실패한 것이 됩니다.
삶의 모든 과정이 실패와 절망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순간을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실패와 넘어짐도 더 좋은 것으로 채우시고 바꿔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과 아픔과 어려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고, 실패에도 불구하고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않을 소망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반드시 소망과 기쁨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지는 것 자체로 끝나지 않고, 회복시켜 주시고 이루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보다 훨씬 더 좋은 영생과 구원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울의 삶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언제나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무너지고 실패한 것들을 모두 회복하고, 넘치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날마다 누리며 살아 나아가는 복된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190804)선별하고 집중하십시오(삼상 9장 25-27절) (0) | 2019.08.04 |
|---|---|
| (20190728)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십니다(삼상 9장 15-24절) (0) | 2019.07.28 |
| (20190714)손에 들린 것이 없어도(삼상 9장 1-10절) (0) | 2019.07.14 |
| (20190707)하나님의 통치가 사는 길입니다(삼상 8장 10-22절) (0) | 2019.07.07 |
| (20190630)하나님의 통치에 따라 사십시오(삼상 8장 1-9절) (0) | 2019.0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