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90908)하나님의 영으로 변화되십시오(삼상 11장 4-15절)

청명하늘 2019. 9. 8. 14:29

하나님의 영으로 변화되십시오

 

성경: 사무엘상 114-15(424)

찬송: 428(내 영혼에 햇빛; 488), 420(너 성결키 위해; 212)

설교: 20190908.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여러 분야의 일들을 보면서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많이 떠오르곤 합니다. ‘내로남불이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줄임말입니다. 남녀가 결혼해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독점적 계약을 맺는 것과 같죠? 그런데 이를 지키지 못 하고, 다른 사람에게 몸과 마음을 빼앗기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럴 때를 불륜이라고 합니다. 윤리에 맞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불륜임에도, 막상 본인이 그러한 입장이 되면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의미로 로맨스라고 부른다는 겁니다.

 

불륜이면, 그 사람이 누구든지, 다른 사람이든지, 자기 자신이든지 불륜입니다. 배우자를 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불륜이라고 하는 까닭은 사회에서 정한 윤리와 도덕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사자가 누구인지, 상대자가 누구인지는 더 이상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내로남불이라는 기준을 내세울 때가 적지 않습니다. 배우자를 두고 한눈파는 경우만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이들이 잘못했을 때는, 그것이 잘못이라고 삿대질하고 욕하면서도, 본인이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지를 때는, 반성도 안 하고, 끝까지 이러저러한 핑계로 일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가 좋지 않죠?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는 갈등의 연속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 갈등은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경제 보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기 전까지 일본은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끌고 가 온갖 강제노역을 시켰습니다. 또 젊다 못해 어린 여성들을 속여 끌고 가 성노예로 부렸습니다. 속이고 끌고 간 것도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리고,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으면 당연히 배상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과거에 우리나라 정부와 이미 합의했기 때문에 배상해 줄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이 문제에서 내로남불 해석을 내놓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후, 일본 정부에서는 연합국에 대해서는 배상청구권을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원자폭탄 피해자 개인은 자신들이 입은 피해에 대한 배상을 연합국에 요구할 수 있다고 판결했습니다. 자기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정부의 합의와 상관없이, 개인은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고 하면서, 우리나라 국민들에 입힌 피해에 대해서는, 이미 국가간에 합의해서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로남불식 해석이라 하면 정치권에서 빼놓을 수 없죠? 최근 한 정당의 원내대표가, 인터넷에서 자신에게 나쁘게 말한 사람들을 상대로 고소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정치인이 하는 행동과 말들을 보고 비난하며 안 좋은 별명을 많이 만들어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자신을 모욕한 것이라며 고소한 것입니다.

 

만약 이 정치인이 이런 고소를 할 수 있으려면, 먼저 자신의 언행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 동안 자신이 이런 모욕을 받지 않을 만큼 깨끗하고, 정당하게 행동했는지를 살피는 게 먼저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현직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 향해 문빠’ ‘달창이라는 말을 내뱉었습니다. 이런 표현은 그 의미와는 별개로,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사용하지 않는 너무 저급한 말입니다.

 

이 사람이 또 이번에 경상도 지역에 가서 현재 정권을 비난하기 위해 지역감정을 자극했습니다. 서울의 구청장이 25명인데, 그중 20명이 광주, 전남북 출신이라면서, 지금의 정부를 광주일고 정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정말 20명이 호남 출신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20명이 아니라, 25명 전부가 호남 출신이면 어떻습니까? 25명 전부가 제주도 출신이면 어떻고, 경상도 출신이면 어떻습니까? 어느 지역 출신이 서울의 구청장이 돼서는 안 된다는 법이나 약속이 있습니까?

 

또 현재 구청장을 대통령이나 정부에서 임명했습니까? 여러분. 지금 전남도지사, 도의원, 무안군수, 군의원 등이 모두 어디 출신인지 알고 기억하세요? 저만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 저는 이 사람들이 어디 지역 출신인지는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도정과 군정을 깨끗하게, 또 잘 해서,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고, 무슨 일을 했는지를 보긴 하지만, 출신 지역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것은 모두 옳다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도 안 되는 것들로 트집을 잡고, 사람들을 현혹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로 볼 수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기적이고도 자기중심적인 나쁜 본성을 바꾸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대로 해석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성숙한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안경을 벗고, 새로운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다니긴 하지만, 이전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의 시간은 길어지고, 예배와 헌금의 액수는 늘어나긴 하는데, 삶의 행태는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거친 말을 내뱉고, 거친 행동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온갖 상처를 줍니다. 정작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노력도 기울이지 않으면서도, 전혀 중요하지 않는 것들에 목숨을 걸 듯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도 모르고, 말도 안 되는 것들을 핑계로 끝까지 회피하려고만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론과 이유를 갖다 대겠지만 사실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아직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지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이미 오염되어서, 스스로는 어떠한 노력으로도 바뀌지 않습니다. 바뀌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변하지 못 하고, 여전히 모난 모습, 자기중심적으로 산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과 함께하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이 하나님의 임하심으로 어떻게 변하는지 내용이 잘 나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에서 나온 지 약 300년가량을 왕이 없이 살았습니다. 재판관의 역할을 하는 사사들이 있어서, 큰 문제가 생기면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긴 했습니다만, 왕처럼 이끌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유사시에만 이끄는 사사가 아니라, 다른 나라들처럼, 계속해서 통치하며, 이끌어줄 왕을 요구했고, 사울이 뽑혔습니다.

 

사울이 왕으로 뽑히긴 했지만, 사울에게서 왕다운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죽했으면, 이제 왕으로 뽑혀서, 권력의 기세가 가장 강할 때임에도, 일부 불량배들은 사울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이런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할 수 있겠느냐?”할 정도였습니다.

 

사울에 대한 멸시는 지나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울도 이미 왕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왕처럼 살지 않습니다. 왕이 되었으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왕이 머물며 일할 곳을 정하고 마련하는 것, 그리고 일할 사람들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울은 가장 먼저 해야 하고, 가장 중요한 이 두 가지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는 것이라곤, 소 두 마리를 끌고 밭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구원하겠느냐?”는 평가가 지나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지만, 길르앗 야베스 지역에 적이 공격해 와서 큰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순간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강하게 임하시는데, 이때부터 사울이 이전에 보여주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먼저는, 거룩한 분노를 발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6,27절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노가 마귀에게 틈을 내어주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습니다. 절제하지 못 해서, 속에 있는 거친 생각들을 아무렇게나 내뱉고, 또 행동으로 옮기는 분노는 마귀에게 틈을 내어주게 됩니다.

 

최근 자주 나오는 말들 중에 분노조절장애라는 말이 있습니다. 순간에 생기는 충동과 분노를 조절하지 못 해서, 그대로 내뱉고 행동해서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장애 때문에 자주 생기는 사고는 보복운전입니다. 흔히 평소엔 괜찮은데, 운전대만 잡으면 난폭해진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운전하다 보면, 정말 이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짜증날 때도 있고, 화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대로 그대로 표출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더 큰 사고가 생기고, 자칫 사람이 다치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간혹, 절제하지 못 하는 사람들은 화난다고 다른 차를 박기도 하고, 때로는 내려서 폭행을 가하기도 합니다. 이런 분노가 바로 마귀에게 틈을 주는 분노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분노를 철저히 절제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분노가 있습니다. 이것을 거룩한 분노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이끌리어 하나님의 일을 위해 발하는 분노입니다. 본문 6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라고 기록된 것처럼, 사울의 분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한 분노였습니다.

 

분노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인지, 마귀로부터 주어진 것인지 구별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그 결과가 무엇을 만들어 내는지를 확인하면 됩니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는 누가복음 643절 말씀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분노는 마귀의 일을 만들어 낼 수 없고, 마귀로부터 나온 분노는 유익한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강하게 임하심으로써 사울이 분노를 발해서 무엇을 만들어 냈습니까? 그 동안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철저히 돌아서고, 다시는 옛날의 잘못된 삶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가장 큰 재산이라 할 수 있는 두 마리 소를 조각냈습니다. 그리고 그 다짐대로 하나님이 맡기신 일들을 충성스럽게 해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사울이 두 마리 소로 밭을 갈았다는 것을 겸손하다는 의미로도 볼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심으로 변한 모습을 보면, 그 전까지는 왕의 책임과 의무를 제대로 몰랐거나, 아니면 크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의 책무보다 밭가는 일에 익숙해 있고, 더 열심히 일하던 사울은, 하나님의 영이 임하심으로써 삶의 방향과 방식이 전혀 달라집니다. 소로 먹고 살아온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소를 조각냈습니다. 다시는, 예전 모습, 익숙하고 잘 하지만 사소한 것들에 얽매지 않겠다는 의미로 두 마리 소를 없앴고,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의 증표로 내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임하심으로써 나타난 또 다른 모습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넓은 관용과 아량을 베푸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 일부 불량배들은 사울을 무시했습니다. 평소 알고, 가까이서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고 하니, 좀 우습게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소심한 사울의 성격을 비춰 볼 때, 사울도 이들의 비아냥거림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암몬과의 전쟁을 거치면서 사울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겨우 소나 이끌며 일하던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한 마디 명령만으로 건장한 군인만 해도 30만 명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 군대로 적을 철저히 무찔렀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커졌습니다. 말 한 마디로 전국의 모든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첫 전쟁에서 크게 이기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오자, 곁에서 몇 사람이 사울에게 묻습니다. 이전에 왕으로 뽑혔을 때, 비난하며 무시했던 자들을 끌어내서 죽이자는 것입니다. 속 좁은 예전의 사울이었다면, 자신이 당했던 수모를 갚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힘도 있고, 인정도 받고 있으니 여건이 충분합니다.

 

그런데 더 이상 예전의 사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 날,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 날이니 남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장 그날만 죽이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한 남을 해치지 않겠다는 것이고, 사울이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사는 한 죽이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자 사울은 크게 변했습니다. 자신에게는 더 엄격한 잣대를 대면서도, 다른 이에게는 크고 넓은 아량과 자비로 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이 임하신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고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말씀대로 살고자 다짐하는 우리가 기억하고 본받고 행하며 살아가야 하는 모습입니다. ‘내로남불의 방식과는 정반대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 임하심으로써만 변화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을 위해 거룩한 분노를 발하며, 다른 이에게는 더 넓은 자비와 관용을 베풀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언행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임을 확인시켜 주는 증거가 됩니다.

 

사울의 변화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기억하고, 자기 욕망과 욕심을 위한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향한 거룩한 분노를, 이웃에게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자비와 아량으로 대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확인되고, 하나님이 자녀에게 약속하신 복과 은혜를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