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00216)하나님 편에 속한 사람이 되십시오(삼상 19장 18-24절)

청명하늘 2020. 2. 16. 14:40

하나님 편에 속한 사람이 되십시오

 

성경: 사무엘상 1918-24(441)

찬송: 432(큰 물결이 설레는; 462), 288(예수를 나의 구주; 204)

설교: 20200216.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몇 주 전에 사택 건축 견적을 내기 위해 한 집사님이 다른 곳에서 여기에 오셨습니다. 상황을 설명 드리고, 또 그분의 말씀을 듣고 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집사님, 견적을 위해 오신 분까지 해서 세 명이 읍내에 나가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식사하면서 여러 이야기가 나오죠? 그러다가 그분이 기도를 많이 하고, 능력이 있는 분과 함께 한 가정을 방문할 때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집에 들어가는 순간, 기도를 많이 한 다른 분이 그 자리가 본래 공동묘지였다고 알아보셨다는 것입니다. 함께 식사하던 집사님이 역시 기도하는 분들은 다르더라고 덧붙이시면서, 빨리 이사하라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이분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되시죠? 이분의 말씀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먼저는, 공동묘지 위에 지은 집은 안 좋으니 빨리 이사해야 한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기도를 많이 한 분들은 나쁜 터 위에 지어진 집을 빨리 알아내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집사님의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묘지 위에 지어진 집은 정말 안 좋은 집입니까? 또 기도를 많이 해서, 흔히 표현하는 말로, 영적인 능력이 크면, 터가 좋은 집, 안 좋은 집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그 말씀을 듣다가 제가 세상에 지금까지 사람이 죽은 자리가 아닌 곳이 얼마나 되겠습니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세상의 역사가 얼마나 긴지 모르죠? 이 긴 시간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고 죽었겠습니까? 요즘이야 대부분 병원에서 죽고, 화장터를 거쳐 납골당이나 가족묘에 묻힙니다만, 이것도 얼마 안 되었죠? 2,30년 전만 해도, 집에서 죽고, 땅에 묻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그 동안 나고 죽은 사람들이 다 어디에 묻혔겠습니까? 바위나 깊은 산골이 아니었을 것을 보면, 대부분 현재 집과 건물이 세워진 곳에서 죽고 묻혔겠죠. 지금 우리가 자고, 눕고 생활하는 대부분의 자리는, 언제인지 누구인지 모르지만, 사람이 살다가 죽은 자리고, 묻힌 자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묻힌 자리 위에 집을 세운 것은 안 좋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잘 지어진 좋은 집이 있고, 잘못 지어진 안 좋은 집이 있습니다. 좋은 집터, 안 좋은 집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준은, 묘지 위에 세워졌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햇볕이 안 드는 곳보다는, 햇볕이 잘 드는 곳이 좋은 집터입니다. 물이 잘 안 빠져서, 비만 오면 질척거리는 곳보다는, 물이 잘 빠지는 곳이 좋은 집터입니다. 생활하는 데에, 또 건강 문제에서는 이게 구분됩니다.

 

하지만 이게 우리의 영적인 부분까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이 묻힌 자리에는 귀신의 능력이 크고, 그래서 거기에 지은 집에 살면, 삶이 더 어려워지고,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또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은, 집터가 공동묘지였음을 빨리 알아내는 능력을 받습니까? 그게 기독교 신앙에서 갖는 믿음이고 능력입니까? 성경 어디에서, 기도해서 능력을 받으면, 묘지 위에 지어진 집임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시거나, 그런 사건이 나온 적이 있습니까? 성령의 은사를 받은 성경 속 인물들 중에, 누가 그렇게 말씀하고 행동한 적 있습니까? 모세가 이런 모습을 보인 적 있습니까? 다니엘이나 다른 선지자들, 혹은 예수님이나 제자들 중에서, 이렇게 좋은 터, 나쁜 터를 알아내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까?

 

이런 생각 자체부터 이미 성경, 기독교 신앙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입니다. 오히려 풍수지리나 무속인들이 하는 일들이죠? 집이 잘되고, 가문을 빛나게 하는 자리가 있고, 가문을 망하게 하는 집터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집터처럼 어느 특정한 자리가, 또 특정한 날짜가 사람을 잘되게 하기도 하고, 해롭게 하기도 한다는 게 풍수지리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무속인들의 생각이죠? 그래서 이들은, 이사하고, 결혼하고, 묘를 옮기는 데에도 좋은 날, 나쁜 날을 확인해야 한다고 하죠?

 

열심히 기도했더니, 집터가 묘지였음을 알게 되고, 집터가 사람을 해롭게 하고, 집에 어려움을 가져다주고, 그래서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다른 곳으로 이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여기에 훨씬 가깝지 않습니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은사나 능력이 이렇게 발휘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특정한 장소에 가야만, 혹은 특정한 물건을 만지거나, 특정한 날에만 특별한 능력이 발휘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은 사람을 통해 일어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능력도 사람을 통해 일어납니다. 사탄에 속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후에,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써, 생령이 되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존재임을 뜻하기도 하지만, 바꿔 보면, 하나님의 영이 장소나 사물 등을 통해 역사하는 게 아니고, 사람을 통해 활동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탄과 귀신의 무리처럼 악한 영을 품은 세력도 있습니다. 이들은 본래 하나님의 영을 품고 있던 존재들인데,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과 욕심 때문에 하나님을 거슬렀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과 맞서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악한 영들도 영적인 존재인지라, 이들도 역시 영적 존재인 인간을 통해 활동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인간은 둘 중 하나에 속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거나, 사탄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 속한 다윗과 사탄에 속한 사울 왕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이 영광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계획하고, 선택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왕이 될 사람으로 선택하셨습니다. 복은 하나님만이 주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살았다면, 사울은 대를 이어 왕이 되는 영광과 복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이를 인정하지 못 했습니다. 인간적인 성공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고, 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왕이 되었음에도, 이제는 악령에 속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 다윗의 성공과 복을 견디지 못 합니다. 다윗은, 나라가 큰 위기에 빠져 있을 때 구한 영웅이었음에도,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직접 창을 던져 죽이려고도 했고, 작전을 짜서 죽이려고도 했습니다.

 

몇 차례 위기를 넘긴 다윗이 결국 라마 나욧으로 피합니다. 다윗이 이곳으로 피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다윗이 단순히 자기 목숨 구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사울에게서 멀어질수록 좋죠? 아니면 자기 고향으로 가는 게 유리할 것입니다. 다윗의 고향은 베들레헴입니다. 여기 교회를 기준으로 보면, 베들레헴은 무안읍내 정도 거리와 방향이고, 라마는 반대 방향에다 청계면 소재지 정도 거리밖에 안 됩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자기 고향으로 가지 않고, 고향의 반대 방향에 있는 라마 나욧으로 피했습니다. 다윗이 라마 나욧을 향한 까닭이 단순히 사울의 위협을 피해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라마에는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사울과 그 군사들과 맞서 싸울 만한 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오는 것을 보고 피하기에 충분히 먼 곳도 아니었고, 문을 닫고 피하면 오랫동안 피할 수 있는 천연요새도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라마 나욧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피한 한 가지 이유는, 그곳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신실한 선지자 사무엘이 여러 제자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괴롭히고 위협하는 문제들을 하나님께 묻고 구하고 싶었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 앞길을 열려 했습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아픔과 답답함을 인간적인 방법이나 악한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대로 믿고, 그대로 행하며 살려 했습니다. 이게 다윗이 라마 나욧을 향해 피한 까닭입니다.

 

다윗이 라마에 있다는 이야기를 사울이 듣고, 부하들을 보냈습니다. 가까운 곳이니, 부하들이 다윗을 잡아 금세 돌아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부하들이 돌아오지는 않고, 이 부하들이 오히려 선지자들처럼 예언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그래서 다시 다른 부하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마찬가지였고, 세 번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사울이 직접 길을 나섭니다. 이때 사울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살기등등했겠죠? 악령에 휘둘릴 때마다, 그나마 다윗이 수금을 연주해서 좀 가라앉곤 했는데, 이제는 다윗마저 없으니, 악령이 사울을 강하게 붙잡아 휘둘렀을 것입니다. 왕이지만, 미친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향한 증오심과 살기를 가득 품고 라마 나욧에 도착한 사울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그 동안 하나님을 등지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뒤로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곧 사탄과 악령의 세력에 속한다는 의밉니다. 하나님과 사탄 사이 중간지대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났는데 악령에 휘둘리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사탄의 세력에서 벗어났는데,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때 사울이 예언하는 모습을 24절에서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의 제자들이 있었고, 사울이 다윗을 잡아오라고 세 차례 보낸 부하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과는 달리 사울 혼자만은 옷을 모두 벗은 채 예언했습니다.

 

사울이 이처럼 이상한 모습으로 예언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무엇보다도 사울이 그 동안 쌓아온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헛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왕이라는 신분은 옷을 통해 가장 쉽게 확인됩니다. 왕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도, 옷만 봐도 왕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울은 바로 이 옷을 위해, 왕의 자리를 위해 하나님을 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욕심과 성공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뒤로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을 시기하고, 죽이려 혈안이 된 까닭도, 왕의 자리를 계속 붙잡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울은 왕의 옷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울이 그토록 원하고, 고집했던 그 자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갔더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벌거벗으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겠습니까? 왕이나 종이나 다를 바 없는 모습 아니겠습니까?

 

이를 통해 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우리의 것과 다릅니다. 우리의 욕심만을 위해 살다가는,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모습이 됩니다. 아무것도 쌓은 것 없는 사람, 헛된 것만을 위해 산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들을 많이 모으고, 높이 쌓았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하나님은 쓸 데 없는 사람, 악령에 속한 사람으로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인정하는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갖지 못 했어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를 바라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위로하시고, 새 힘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세우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나아갈 곳이 바로 이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을 품고 사는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기에, 하나님을 품고 사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 있는 자리가 곧 라마 나욧입니다. 비록 그곳이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너무 작아 미약하기 짝이 없는 곳이라 하더라도, 그곳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보잘것없는 사람,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한 자리와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과 평안과 위로가 나옵니다.

 

더불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뒤로하고, 악령에 붙잡힌 자처럼 살다가는, 너무나 부끄러운 모습일 수밖에 없음도 기억해야 합니다. 가장 화려하고, 가장 높은 사울마저, 벌거벗은 모습으로 설 수밖에 없었다면, 우리가 어느 자리,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 분명해집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불어넣어 주신 영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디를 향하고, 무엇을 향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소속이 전혀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악령에 속한 자가 될 것이고, 악령을 떠나면 하나님께 속한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악령에 휘둘리는 비참한 삶이 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있는 자리와 향하고 있는 곳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땅의 삶과 이후에 주어질 영원한 생명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라마 나욧 같은 자리를 만드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크고 넓고 안전한 곳, 먹고 누릴 것이 풍성하지 않더라도, 사무엘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바르게 알려줄 만한 사람이 있는 곳으로 만들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라마 나욧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을 인정하고, 세상을 뒤로하고 향해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잘되고, 복된 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하나님이 함께하실 만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자녀를 지키시고, 생명과 복과 은혜로 채우시는 하나님 안에서 날마다 기쁘게 살아가시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