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 것을 선택하는 지혜
성경: 사무엘상 20장 1-11절(구 442쪽)
찬송: 258장(샘물과 같은; 통190), 380장(나의 생명 되신 주; 통424)
설교: 20200223.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지난 9일에 우리나라 영화계에 큰 경사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감독과 배우가 만든 ‘기생충’이라는 영화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개 상을 받았습니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아카데미 시상식이라는 게 뭔지 잘 모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라마다 영화제가 있고, 시상식이 있겠죠? 그런데 자기 나라에서 만들어진 영화를 대상으로 평가하고 시상하는 것을 넘어서, 전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영화제와 시상식이 있습니다. 또 이들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이 있겠죠? 아카데미 시상식은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지고 인기가 많은 시상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만든 영화가 처음으로 이 시상식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이것도 놀라운 일인데, 무려 4개를 받았고, 더 놀라운 것은 가장 높이 평가 받는 감독상과 작품상까지 받았다는 것입니다. 정확한 표현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나라의 영화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시상식에서 1,2등을 차지한 것입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올해로 92회가 되는데, 지금까지 작품상을 받은 영화들은 모두 영어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나라 말로 만들어진, 미국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외국어로 만들어진 영화가 최고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곳에 관객으로 앉아 있는 배우들과 감독들을 보면, 말 그대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TV나 영화에서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앉아서 축하해 주고, 우리나라 감독과 배우와 제작자가 상을 받았으니, 경사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반지하에 사는 가난한 가족의 아들이 부잣집에 일하러 들어가게 됩니다. 이후에는 동생과 부모까지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해서 부잣집에 들어가서 생활하며 일어난 일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보통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부자는 악하고, 가난한 사람은 착한 모습으로 그려질 때가 많죠? 하지만 이 영화의 장점이나 특징 중 하나는, 그 속에 등장하는 사람이 악한지 선한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살인사건이 일어나는데도, 죽은 사람이 죽을 정도로 악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인 사람이 용서받을 수 없을 만큼 악한지 판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와 다를 바 없이, 빈부격차가 아주 심하죠? 이게 심해지면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을 싫어하고 욕할 때가 많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조롱하곤 합니다. 하지만 정작 부자와 빈곤한 사람들 중에 누가 더 착한지, 누가 악한지 단정하기 쉽지 않죠? 부자라고 모두 착한 것도 아니고, 모두 악한 것도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무조건 착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죠?
이는 신앙적인 관점에서도 똑같습니다. 신앙인들은 부자여야 합니까? 가난해야 합니까? 한때 이게 우리나라 기독교의 논쟁거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더불어 재물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가난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뜻은, 단순히 물질을 가지고 누리는 것을 말씀하신 게 아니고, 물질을 좇느라,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잘못임을 말씀하신 것이니,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고, 물질을 이용하는 것은 괜찮다는 이야기들도 있었습니다.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가난해야 한다는 것은, 물질과 부요함은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물질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저 물질일 뿐입니다. 그리고 물질이 악하느냐, 선하느냐 하는 것은 이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과 목적이 결정합니다. 물질을 쓰는 사람이 좋은 목적을 위해 좋은 일에 쓰면 그것이 선한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악한 일에 쓰면 악의 도구가 됩니다. 물질 자체는 악하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고, 이를 쓰는 사람의 의도와 방법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물질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게 좋겠습니까? 당연히 물질이 풍성한 게 좋죠? 가난은 어려움을 넘어 고통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가진 것 없고, 먹을 것 없으면, 나 자신이 겪는 어려움만 있는 게 아니죠? 자녀와 가족까지 사랑하는 사람들도 함께 어려움과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물질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고, 이를 쓰는 사람과 목적에 따라 선과 악이 나뉜다면, 내가 바른 믿음과 생각으로 재물을 바른 일에 사용하면 됩니다. 이게 좋습니다.
문제는, 재물과 선악이 분명하게 구별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풍족하고 편안한 삶이 보장되지만, 악한 길인 경우가 있습니다. 선하고 옳은 길이긴 한데, 거기에는 고된 여정이 함께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릴 수 있는데 나쁜 자리가 있고, 옳고 바른 길이긴 한데, 거기에는 너무나 많은 희생과 고난이 따라야 한다면, 이럴 때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길을 선택하고 살아가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본문 앞에서, 사울 왕이 다시 다윗을 죽이려 하자,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가 있는 라마 나욧이라는 지역으로 도망갔습니다. 이곳은 사울 왕이 지내고 있는 기브아라는 지역에서 4km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살기등등한 왕의 위협으로부터 피하기엔 너무 가깝지만, 그곳에 하나님의 신실한 선지자 사무엘이 있었기에 여기를 택했습니다. 눈에 가까운 왕의 위협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과 보호를 믿고 선택했습니다.
라마 나욧으로 피한 다윗을 죽이기 위해 사울은 부하들을 보냈지만,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영에 붙잡혀 예언하게 되어, 다윗을 잡아오지 못 합니다. 이게 세 번이나 반복되자, 사울이 직접 다윗을 잡으러 갔지만, 사울마저도 하나님의 영에 붙잡혀서 벗은 몸으로 예언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을 지켜본 다윗은 다시 기브아라는 지역으로 도망합니다. 지금 당장은 자신을 잡으러 온 부하들도, 사울 왕도 하나님의 영에 붙잡혔지만, 이들의 본바탕이 바뀐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좀 지나면, 마치 술에서 깬 사람들처럼 다시 악한 본성을 그대로 드러낼 것입니다. 다윗을 향한 질투심과 살기가 되살아날 것입니다. 이를 알았기에 다윗은 기브아 지역으로 도망했습니다. 도망하기 전에 지냈던, 왕궁이 있고, 자기 아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곳에서 다윗은 친구인 요나단을 만나 자기의 억울함을 이야기합니다.
본문 속에서 요나단은 선택할 수 있는 양갈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라마 나욧과 같은 삶이고, 다른 하나는 기브아에 있는 왕의 식사 자리 같은 삶입니다. 요나단은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어디를 선택하느냐 하는 의미를 넘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 갈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윗이 도망했다가 되돌아온 자리인 라마 나욧은 어떤 곳이겠습니까? 그곳에만 가면 사람들이 변하는 곳입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듯이 특정 장소나 날짜가 사람을 바꾸지 못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영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영을 품고 있는지에 따라 전혀 달라집니다. 악한 영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악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사울 왕이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지라, 사람들이 사울을 얼마나 높이고 대접했겠습니까? 일반 사람들로서는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것을 입고, 편한 자리에서 누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환경이 좋았지만, 그 속에 악한 영이 들어가자,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악한 일들에 앞장섭니다.
나라를 구한 영웅을 높이지는 못 할망정, 자신보다 더 많은 칭찬을 받는다는 이유 하나로 죽이려고 하는 게 사람이 할 일이겠습니까? 사울은 악령에 붙들려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을 당했습니다. 다윗은 이런 사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수금을 연주합니다. 이처럼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향해 창을 던지는 게 보통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딸의 남편으로서 사위가 되는 사람을 죽이려 침실까지 들어가는 게 멀쩡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죠?
그런데 이처럼 인간 말종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런 사울도 라마 나욧에 가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왕이 된 후 사울의 모습을 한 마디로 평한다면, 하나님과 맞서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 욕심과 욕망만을 위해 힘쓰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살아온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라마 나욧으로 갔다가, 다른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까닭은, 라마 나욧이라는 곳 자체가 거룩하거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는 사무엘 선지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행하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능력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라마 나욧은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이 전해지는 자리, 그러나 동시에 고난이 가득한 자리입니다. 선지자들의 헌신과 열정이 가득하지만, 무기를 가진 군사들이 많은 곳도 아니었고, 진수성찬이 가득한 곳도 아니었습니다. 라마 나욧은 삶의 질고 중에 지치고 상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피난처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반면에 왕의 식탁이 있는 기브아는 라마 나욧과는 전혀 다른 자리입니다. 왕의 식탁에는, 전국에서 올라온 가장 기름지고 좋은 음식들이 가득합니다.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식으로 채워졌습니다. 언제나 강한 군사들이 지키고 함께하는 자리입니다. 왕의 식탁에 앉는다는 것은, 그만큼 백성들로부터 섬김을 받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요나단이 왕의 식탁을 선택했다면, 자기 아버지를 이어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왕의 식탁이 있는 기브아와,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라마 나욧 중에서 요나단은 하나님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보장된 왕위를 뒤로하고, 다윗과 함께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기브아를 선택하는 것과 라마 나욧을 선택하는 것의 차이를 요나단이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기브아에서 왕의 식탁에 앉아 있으면, 평생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많은 것을 누리며 살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이 자리를 뒤로한 까닭은, 그곳이 악한 자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셔서, 악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자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요나단은 라마 나욧의 길을 선택합니다. 라마 나욧을 향하는 순간, 자신에게는 왕의 자리도, 편안하고 보장된 삶도 없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자리를 택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는 자리에 머물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세우시기로 결심한 다윗을 돕고, 함께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요나단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위대한 신앙인으로 세워진 까닭이 이것입니다. 편하고 쉬운 길, 화려한 삶을 선택할 수 있음에도,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것을 알고, 이 모든 것에서 뒤돌아섰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에게는 다음 왕이 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조건과 자격이 있었습니다. 요나단이 자기 아버지의 편에 서서 다윗을 없애고, 왕이 되었어도 잘못이 아닙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가 죽이려 혈안이 되어 있는 다윗을 오히려 돕기로 다짐합니다. 왕의 자리까지 다윗에게 양보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고, 요나단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요나단과 같은 갈림길에서 설 때가 적지 않습니다. 요나단이 기브아와 라마 나욧 사이에서 선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뜻과 세상 속에서 누림 사이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세상에서 갖고 누리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나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쉬운 선택도 없습니다. 갈등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선한 방법과 선한 목적을 향한다면, 얻고 누리고, 좋은 곳에 이용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 한 경우가 분명 있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길임에는 분명한데, 그것만 선택하면 쉽고 편한 삶이 보장될 것 같은 길이 있습니다. 이런 갈림길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쉽고 편한 길을 선택합니다. 편하고 풍요로운 삶이 자기 삶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이 땅의 삶이 마지막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이 땅이 최종 목적지라고도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다음 세상이 있고, 그곳에서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길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렵고 힘든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길을 따라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누리지 못 한 부요한 삶과 쉬운 길이 아쉽고 달콤해 보여도, 이를 과감히 버리고 돌아설 만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버려야 하는 게 아무리 크고 좋아도, 요나단이 버리고 돌아선 것만큼 좋은 것이었겠습니까? 우리가 버리는 것이 왕의 자리만 하겠습니까? 요나단이 선택한 길만큼 어렵고 고통스럽겠습니까? 우리가 선택한 길이 죽음까지 각오한 길이겠습니까? 요나단은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쉽고 편하고 화려한 자리를 버리고, 험난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약속하신 길을 선택했고, 그래서 하나님은 요나단을 사랑하시고, 함께해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요나단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삶의 모습들을 기억하고, 요나단이 먼저 우리 앞서 걸어간 선하고 의로운 길을 따라 행하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그게 무엇이고, 아무리 좋아도, 철저히 버리고 돌아섬으로써,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이 세상과 내세에서 약속하신 보호하심과 복을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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