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00301)사랑의 크기만큼 복을 받습니다(삼상 20장 12-17절)

청명하늘 2020. 3. 1. 15:03

사랑의 크기만큼 복을 받습니다

 

성경: 사무엘상 2012-17(443)

찬송: 279(인애하신 구세주여; 337), 218(네 맘과 정성을; 369)

설교: 20200301.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얼마 전에 장로님 한 분을 오랜 만에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 장로님이 하나님께 많이 바칠수록 복을 많이 받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로님은 의사로서 바쁜 중에도, 교회에서 모범적으로 헌신하는 분입니다. 주일에는 교회에서 목회자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물질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어려움을 거쳐 작은 가정의원을 운영하시느라 빚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수익의 아주 높은 비율을 헌금하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시는 분으로서 자기 신앙고백을 겸한 것이기도 하고, 더불어 제가 목회자니 제게 확인하고 싶어서 하신 말씀이기도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아니면 반대하십니까?

 

제가 그 말씀을 듣고서 그냥 웃었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동의를 구하는데, 거기다 드러내놓고 반대하거나 부정하기 쉽지 않죠? 또 여러 과정과 이유를 설명하기 쉽지 않은 자리라서 그렇게 얼버무리긴 했지만, 많이 바칠수록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복을 많이 주신다는 말씀에는 동조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때의 일을 되새기며, 고민해 보니 그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들 중에서는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목사가 그 동안 헌금에 대한 부담을 안 주고, 강조도 안 하겠다고 하더니, 슬슬 본색을 드러내서 헌금을 많이 하게 하려고 저런 이야기를 꺼내는가 보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헌금과 헌신보다는 구원과 영생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질이 정말 없어서 신앙생활을 못 하겠다 하는 분이 계실까 하는 염려를 적지 않게 합니다. 헌금하지 않고, 물질을 안 바치면 믿음이 없다거나,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고도 말씀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여기에 부임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약속이면서 당부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또 제가 헌금에 대해 자주 드린 말씀들 중 하나는, “우상이나 수준이 낮은 신앙에서의 신은, 많이 바치면 좋아하고 무조건 복을 준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신들과는 질적으로 수준이 다른 분이다. 오히려 하나님을 그렇게 믿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잘못된 신앙이고, 하나님을 우상처럼 믿는 것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제가 왜 많이 바칠수록 하나님이 복을 많이 주신다는 말씀을 다시 생각하고, 또 이를 신앙생활에 맞는 이야기로 말씀드리겠습니까? 어쩌면 앞뒤가 맞지 않을 것 같은 이 말씀을 드리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우상과는 질적으로 수준이 다른 분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바치면 좋아하는 신, 바치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좋아하고, 복을 주는 우상이나 다른 신과는 전혀 다른 분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 자체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믿음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드리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으로 갖고 살아가는 것을 더 좋아하십니다.

 

보통 신들은 드리는 사람의 마음과 믿음 자체보다는, 그들이 드리는 것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점쟁이나 무속인들이 무엇을 원할까요? 그들의 신이 가르친 대로 사는 것을 원하고 더 좋아할까요? 아니면 신들에게 좋은 것을 많이 바치는 것을 더 좋아할까요? 한 가지뿐입니다.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바치는 것입니다.

 

일이 잘 안 되었을 때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신에게 재물이나 귀한 음식들을 바치는 것입니다. 일이 잘되고, 성공하기 위한 방법도 한 가지입니다. 그들의 신에게 값비싼 것들을 바치는 것입니다. 병이 나을 수 있는 방법도 그렇고, 자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마찬가지로 신에게 좋은 것들을 많이 바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한 번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믿으라고 말씀하신 적도 없고, 이렇게 해서 복 받은 사람들을 통해,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가장 큰 계명을 마가복음 12장에서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먼저 30절에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라고 하시고, 두 번째 31절에서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무속신앙과 저급한 우상들을 섬기는 곳에서 가장 큰 계명을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알려주신 말씀을 이용해 한다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들 다하여 너의 신에게 모두 바쳐라. 그러면 네 모든 문제와 어려움이 해결되고, 원하는 것들을 모두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무조건 많이 바치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제가 왜 많이 바칠수록 하나님이 복을 많이 주신다는 말씀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음을 말씀드리겠습니까? 그 무엇보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가짐 때문입니다.

 

많이 바칠수록 복을 많이 받는다고 믿으면 신앙생활을 어떻게 할까요? 이 정도의 믿음에 이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죠? 오락가락하는 단계와 수준을 넘어서, 확신의 단계에 이르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이릅니다. 예수님이 가장 큰 계명으로 말씀하신 마음과 목숨을 다하고, 물질까지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준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이들이 보여주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것을 가장 먼저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먼저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을 앞세우며 살아갑니다. 이 정도의 수준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게 성경을 통해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고 약속입니다.

 

초보 신앙인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이게 더욱 분명해집니다. 초보 신앙인들이 자주 보이는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을 믿어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불교나 무속신앙 등에서 다른 신을 섬길 수도 있고, 아니면, 아무것도 믿지 않을 수도 있는데, 자신이 하나님을 믿어 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수준의 신앙인들에게 하나님의 자리는 어디고, 그 크기는 얼마만 하겠습니까? 없거나 있어도 겨우 제일 끝자락에 있는 듯 없는 듯할 것입니다. 가장 좋은 자리, 중심에는 자기 자신이 자리하고, 하나님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자투리에 두고 삽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한 쪽에 두고 사는 것입니다.

 

이 정도 수준의 신앙인이라면, 자신의 욕심과 즐거움을 위해서 아낌없이 씁니다. 꼭 필요한 것을 넘어서, 더 즐기고, 더 멋있고, 보기 더 좋은 것을 채우고 만드는 데는 분수에 넘치도록 씁니다. 그리고 남은 것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드릴 수 없는 이유와 핑계를 먼저 생각해 내고, 이후에 남은 것들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합니다. 자투리 물질만 드립니다. 그러면서도 아까워하고 생색냅니다. 이런 신앙인을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복을 내리시겠습니까?

 

하지만 많이 바칠수록 복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순서가 다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향한 것들을 앞세우고, 자기의 형편과 상황과 조건과 핑계를 뒤에 두며 살아갑니다. 바칠수록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신앙인이라고, 왜 돈을 쓸 데가 없겠습니까? 더 좋은 것을 갖추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사람인 이상 더 좋은 차를 타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더 멋진 집을 짓고 싶고, 더 비싸고 좋은 것들을 갖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물질이 귀한 걸 왜 모르겠습니까? 사람의 생각이라는 게 거기서 거기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살며, 하나님께 가장 먼저 드릴 줄 아는 이들은 내가 더 갖고 싶음에도 드리고, 내가 먹고 싶음에도 하나님께 드리고, 내가 더 즐기고 싶지만, 그럼에도하나님께 먼저 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 중심이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과 은혜를 받을 만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수준의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더 많은 복과 은혜를 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모습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 하는 첫 번째 계명을 지키는 삶 아니겠습니까?

 

많이 바칠수록 복을 받는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어야 바칠 수 있고, 그런 믿음에 이르러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이 정도가 되어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고,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사랑의 수준을 이 정도로 높여 모범을 보이는 요나단이 등장합니다. 요나단은 왕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왕이 될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탐내는 왕의 자리가, 당연히 자신이 받을 것으로 생각된 왕위가 어느 날 나타난 베들레헴 목동 출신 다윗에게 돌아갈 형편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정도 되면 미움의 정도를 넘어서지 않겠습니까? 가족들이 싸우는 경우가 있죠? 싸우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가요? 거의 대부분 돈 문제입니다. 얼마 안 되는 돈 때문에 형제자매가 싸우고 연을 끊는 경우는 허다하고, 부모와 자녀가 갈라서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요나단에게는 나라 전체를 누가 다스리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도 형제나 친척도 아닙니다. 생판 남인 다윗이 자기의 앞길을 막고 위협하게 되었습니다. 미워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상황입니다. 자기 아들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서 다윗을 없애고자 혈안이 된 사울의 모습이 오히려 인간의 본성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럼에도 요나단은 다윗을 오히려 사랑합니다. 단순히 말로만 사랑하는 게 아니고, 17절의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는 말씀처럼, 자기 생명처럼 끝없이 사랑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고, 죽음의 위협에 처할 때마다,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 편에 서지 않고, 오히려 다윗을 축복하며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나,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향한 축복이 자신에게는 도리어 저주가 되고, 손해로 돌아 수 있는 상황이라면 어떻겠습니까? 그때도 여전히 그 사람을 위해 축복하며 사랑의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이 잘될수록 요나단은 어려움이 커집니다. 다윗이 왕의 자리에 가까워질수록, 요나단은 왕의 자리에서 더 멀어집니다. 다윗의 가문이 부흥할수록 요나단 자신의 가문은 점차 약해질 것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 다윗을 사랑할 수 없는 게 정상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다윗을 아끼고, 보호하고, 위로하고, 축복합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다윗을 살리고 돕습니다. 다윗을 사랑한다는 것이 단지 말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확실한지는 다윗을 위해 요나단이 희생한 것들의 가치를 계산해 보면 쉽게 이해됩니다. 다윗을 위해 자기 왕위를 양보했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양보할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왕인 자기 아버지의 명령과 위협마저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요나단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인간입니다. 몸을 가진 사람인데, 왜 왕의 자리가 좋아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왕으로서 먹고 누리며 살 것들을 왜 몰랐겠습니까? 왕이 되면 누릴 수 있는 온갖 좋은 것들도 역시 요나단이 모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요나단이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다윗에게 양보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만큼 다윗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자신을 도구로 양보하고자 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큰 두 가지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까닭은, 우리의 삶을 얽매어 조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계명에 순종하고, 지키는 자녀에게 복과 사랑을 베푸시기 위해서입니다. 복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계명을 통해 반복해서 베푸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랑, 하나님이 복을 베푸실 만한 믿음과 사랑은, 내가 중심이 되고, 하나님을 자투리 자리에 모시고 사는 게 아닙니다. 내 욕심부터 채우고, 남은 하찮은 것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내 중심에 두며, 내 자신의 욕심을 마음 바깥으로 밀어내는 정도가 되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내가 먼저 누리고자 하는 욕망을 누르는 수준,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는 수준에 이르는 정도가 되어야만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하나님께 기꺼이 바칠 만한 사람이 됩니다. 이웃을 사랑할수록 이웃에게 기꺼이 양보할 만한 사람이 됩니다. 요즘처럼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자신의 것부터 채우고 즐기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이 시대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이 정도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과 은혜를 이 땅과 이생에서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요나단을 통해 베푸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고, 사랑의 참 뜻과 깊이를 깨닫고,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크기와 수준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칭찬과 약속된 복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