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00315)신앙의 배수진을 쳐야(삼상 21장 10-15절)

청명하늘 2020. 3. 15. 14:43

신앙의 배수진을 쳐야

 

성경: 사무엘상 2110-15(446)

찬송: 258(샘물과 같은; 190), 357(주 믿는 사람; 397)

설교: 20200315.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우리 민족의 위인들 중에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이 계시죠? 1592년 임진년에 일본이 침략해 왔습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이 크게 활약하는데, 한 번은 13척의 배를 가지고, 200척의 왜선을 물리친 적이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싸움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군사들이 용감하게 잘 싸운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또 조선 수군들에게 익숙한 곳에서 싸우는 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들을 감안해 작전을 짜고, 좋은 작전대로 싸움을 끌고 간 이순신 장군의 통솔력과 더불어 전술이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입니다.

 

만일 전술이 없이 싸웠으면, 13척의 배로 200척의 배를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싸움에서 전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우게 됩니다. 뛰어난 전술이 없었다면, 적이 20척만 되어도 13척으로는 이기기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만큼 싸움에서 전술은 가장 중요합니다.

 

전술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만, 그 중 하나가 삼십육계 줄행랑이라는 말입니다. ‘삼십육계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36가지 계책, 전술 등을 뜻하고, 마지막 36번째 전술이 주위상’(走爲上)이라고 하는데, 도저히 안 될 것 같을 때는 도망가는 게 낫다는 뜻을 줄행랑이라는 재밌는 말로 표현 것입니다.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간다는 게 좀 비겁해 보이기도 하고, 부끄러워 보이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한 번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것으로 모든 게 끝나지 않죠? 길게 보면, 전열을 정비해서 다음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잘 준비하는 게 훨씬 더 좋을 때 이런 전술을 이용합니다.

 

전술을 짤 때 무엇을 중요하게 여겨야 할까요? 어디에서 어떻게 싸우느냐 하는 것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겠죠? 이기기 위한 싸움이라면 이 점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작전을 잘 세우는 참모라면, 좋은 자리와 방법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바로, 승산이 없을 때나, 계획이 실패했을 때 어디로 후퇴하고 빠져 나갈 것인가를 계획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자리에서 싸워 이기고, 작전을 완수하는 게 가장 좋지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 빠져 나갈 것까지 계획해야 불필요한 희생을 막을 수 있고, 다음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전술 중에, 이 부분을 일부러 제외시키는 게 있습니다. ‘배수진’(背水陣)이라 하는데, 말 그대로 물을 등지고 적과 맞서 싸운다는 것입니다.

 

이 작전의 유래는 중국 한나라의 한신이라는 명장이 훨씬 많은 적에게 쫓길 때 사용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한신은 자기 부하들을 큰 강가로 끌고 가서, 강을 등지고 적과 맞서 싸우게 만들었습니다. 이 작전을 본 상대는 이 전술을 쓴 한신과 군사들을 조롱하며 쉽게 이길 거라 판단하고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한신과 그 부하들의 뒤는 큰 강이라 물러서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도망치려다 물에 빠져 죽는 것보다는 그래도 적과 맞서 싸우는 게 그나마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생기죠? 그래서 한신의 군사들이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각오, 정확히는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로 싸웠습니다. 뒤로 물러서거나 도망할 마음을 아예 없애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승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작전과 전술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만큼 중요합니다. 좋은 전술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싸움을 이길 수 있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나쁜 작전은 절대적으로 유리한 싸움도 결국 패하도록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편에 서서 사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맞은편에서 사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맞은편에는 사탄과 그 부하인 귀신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곧 하나님 편에서 사탄과 그에 속한 무리들과 싸우는 영적 전쟁을 뜻하기도 합니다.

 

전쟁에서 적을 죽이지 못 하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신앙생활에서도 적을 무찌르지 못 하면, 내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탄과 그에 속한 무리들은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는 베드로전서 58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신앙의 관점에서는 여전히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승리할 수 있는 작전, 전술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 사탄의 유혹과 공격을 이기고 승리할 수도 있고, 반대로 악령들의 공격을 받아 패배할 수도 있습니다. 이 전쟁의 승패에 따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사느냐, 아니면 영원한 형벌 속에 처해지느냐가 결정됩니다. 지금 우리는 몇 십 년의 승패를 결정하는 싸움 중에 있는 게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죽음을 두고 전쟁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것을 두고 싸운다면, 어떤 작전을 가지고 삶을 만들어 가겠습니까? 아무 작전 없이 무작정 살 수는 없습니다. 아무 전술과 계획이 없이는 사탄의 강력한 공격을 막아낼 수 없고, 이길 수도 없습니다. 그냥 막 싸워 이길 만큼 우리의 능력이 뛰어나지도 않습니다. 또 데살로니가후서 29,10절의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라는 말씀처럼, 악한 세력은 엄청난 것들을 행할 수 있을 만큼 능력이 대단합니다. 모든 거짓과 속임수까지 동원할 만큼 간교합니다. 이처럼 강한 적을 우리가 무작정 맞서 싸워서는 승산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사탄의 공격을 막아내고,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작전, 전술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신앙인들은 고난과 시험을 이기고, 사탄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어떤 전략과 전술로 싸워야 하겠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정반대의 두 전술 중에 어느 작전을 짜야 하겠습니까? 최후의 수단으로서, 나중을 기약하고 도망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한 전략을 펼쳐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도망하거나 피할 길을 완전히 차단한 배수의 진과 같은 작전으로 신앙생활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이 사울 왕의 위협 때문에 도피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먼저, 19장에서 다윗이 도망했던 곳은 라마 나욧이었고, 오늘 본문 앞 21장 초반에 도망했던 곳은 놉이라는 곳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했던 이 두 곳의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라마 나욧에는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인 사무엘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피한 놉이라는 곳에는 제사장 아히멜렉이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보면, 다윗이 사울의 위협으로부터 도망한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의 위협으로부터 피해 도망한다는 이유와 더불어, 자신에게 닥친 고난과 아픔의 이유를 하나님께 묻고, 이를 신앙적인 방법으로 이겨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목적도 방법도 믿음을 가진 사람다운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다윗의 좋은 의도와 계획에도 불구하고, 이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먼저 라마 나욧으로 피했을 때도, 사울의 부하들이 세 차례나 찾아왔고, 나중엔 사울이 직접 다윗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래서 곧 바로 제사장이 있는 놉이라는 곳으로 피했지만, 사울의 눈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었고, 머지않아 곧 사울이 쫓아올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열심히 해결하고 이겨내기 위해 노력한 게 잘 해결되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의 계획과 노력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오늘 본문에서 향한 곳은 바로 가드라는 곳이었습니다.

 

문제는 가드라는 지역이 이스라엘에 속한 게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의 적국인 블레셋에 속한 곳이라는 점입니다. 게다가 더 심각한 것은, 사무엘상 174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는 말씀처럼, 거인 골리앗이 바로 이곳 출신이었다는 점임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가드라는 지역으로 피신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당시 다윗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긴박하고, 위급했는지 알 수 있죠? 그럼에도 절대 가서는 안 되는 지역 아니겠습니까? 골리앗은 가드 지역에서 최고 영웅이었을 텐데, 그런 영웅을 죽인 다윗이 골리앗의 고향으로 피신한다는 게 도저히 납득이 안 되죠? 가드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다윗이 얼마나 싫겠습니까? 또 그런 것을 아는 다윗 본인이 직접 피신했으니 절대 반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다윗을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만한 상황입니다.

 

다윗이 그곳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생명을 지키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문 문짝 위에 아무렇게나 낙서도 하고, 수염에 질질 침을 흘리며 미친 척했습니다. 그나마 다윗의 이 작전이 잘되어서 다윗은 죽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만, 처지가 얼마나 비참합니까?

 

다윗이 어떤 사람입니까? 가축을 지키기 위해, 곰과 늑대 같은 맹수들과 싸우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거인 골리앗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워 이긴 사람입니다. 수천 명의 군사들을 다스리던 장수였고, 이스라엘 왕의 사위이기도 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살기 위해서 비참하고도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야 했습니다. ‘없었던 일로 치거나 잊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과거를 뜻하는 흑역사’(黑歷史)라는 말을 사용하곤 하는데, 오늘 본문 속 이 모습이야말로, 다윗의 일생에서 가장 부끄럽고 비참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살고자 하는 이유 하나만을 위해 이렇게 원수의 땅으로 간 것을 보면, 당시 다윗의 전술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삼십육계 줄행랑을 준비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계획하고, 애썼음에도 그럼에도 안 된다 싶으면, 하나님의 뜻과 방법을 뒤로하고 세상을 향해, 원수의 땅을 향해 가고자 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계획대로 다윗은 목숨은 유지할 수 있었지만, 어떻게 이것을 성공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 앞에서도 아니고, 적들 앞에서 자신의 가장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야 할 만큼 비참한 일이었습니다. 그 동안 신앙과 자존심으로 살아온 사람이라 할 수 있는데, 이제는 신앙과 자존심이 적들의 발에 철저히 짓밟혔으니, 몸은 살았지만,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을 최후의 도피처로 계획했던 다윗의 전술이 철저히 실패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신앙생활의 과정 중에서 세워야 하는 전략은 삼심육계 줄행랑이 아니라, ‘배수의 진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다 안 되면, 하나님의 방법을 뒤로하고, 세상을 향해 가려는 계획은 안 됩니다. 한 걸음만 뒤로 물려도 죽는다는 영적인 배수의 진을 치는 길만이 참된 복과 영생으로 이끌어 줍니다.

 

그런데 신앙인들 중에는, 본문에서 다윗이 보인 모습과 비슷한 계획을 세우고, 믿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앗처럼, 시작조차 못 하는 신앙생활은 아닙니다. 돌밭과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앗처럼, 어느 정도는 싹도 나고, 꽤 자라기도 합니다. 하지만 고난과 염려의 시간이 자기 바람만큼 쉬이 지나지 않을 때가 문제입니다. 이럴 때는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서, 혹은 나중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하나님의 자리가 아닌, 원수의 자리인 세상을 향해 피하려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얻지 못 한 것을 세상에서는 얻을 거라 생각합니다. 믿음 안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아픔과 어려움이 세상에서는 해결될 거라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신앙생활 중에 갖지 못 했던 것들을 교회 밖 세상에서는 꽤 즐길 수 있을 것 같고, 그 동안 채워지지 않았던 빈자리가 채워질 거라는 꿈을 품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고, 오산입니다. 다윗의 계산처럼, 겉보기엔 세상이 꽤 그럴듯해 보이고,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 거대해 보일지 모르지만, 세상이 훨씬 더 안전하고, 좋아 보이는 것은 겉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힘들고 어렵다며 죽겠다는 표현들을 많이 하죠? 이런 소리를 신앙인들이 더 많이 하는 것 같습니까? 아니면 교회 밖에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이 하는 것 같습니까? 신앙인들이 모두 온전하고 완성된 믿음으로 사는 것은 아니죠? 그럼에도, 좀 부족한 믿음을 가졌음에도, “힘들어 죽겠다.” “못 살겠다와 같은 표현을 훨씬 적게 하지 않습니까? 교회 밖 세상이 훨씬 더 좋고, 안전하고, 누릴 것이 많다면 왜 이런 모습이 보이겠습니까? 초라하고, 부족하고, 위태로워 보이는 교회에서는 왜 오히려 감사하는 일들이 훨씬 많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이 본문에서 보이는 계획과 행동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깨끗이 지워야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해결된 것 같아도, 결국 그 시간들은 우리를 가장 부끄럽게 할 것입니다. 우리 삶을 통틀어 가장 잊고, 가장 지우고 싶은 흔적으로 남고 말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세우고 실행해야 하는 전략이란 곧 배수의 진을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차라리 죽음까지 각오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 아니면, 눈길조차 주지 않겠다는 각오로 싸워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10절에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을지언정 변치 않고 하나님의 것을 붙잡고 사는 자녀를 하나님은 반드시 도우십니다. 이것만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만한 승리의 길입니다.

 

계획한 대로 되지 않고,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세상을 최후의 보루로도 여기지도 말고, 어떤 상황에 있든지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고,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더불어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녀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자녀들, 오직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