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00621)하나님의 눈으로 보기(삼상 26장 17-25절)

청명하늘 2020. 6. 21. 15:36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

 

성경: 사무엘상 2617-25(455)

찬송: 430(주와 같이 길 가는 것; 456), 434(귀하신 친구 내게; 491)

설교: 20200621.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아주 오래 전에 봤던 TV 프로그램의 내용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워낙 오래된지라, 언제 어느 방송국에서 나온 것인지, 프로그램 이름이 무엇이었는지조차 기억에 남지 않았습니다만, 그 내용만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생활에서 꼭 필요한 발명품들을 소개하고 평가받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어렵고 복잡한 발명품보다는, 우리 일상을 편하게 하고, 안전하게 하는 것들을 발명한 사람들이 나와서 소개하면, 100명 정도의 사람들이 평가합니다. 둘 중 더 높은 평가를 받으면,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해의 마지막 시간이 되어, 한 해 동안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두 가지 발명이 최종 단계에 올랐습니다. 한 가지는, 가정에서 많이 쓰는 가스통의 안전장치이고, 다른 한 가지는, 동안의 비결 즉, 나이에 비해 나이가 덜 들어 보이도록 하는 비결이었습니다. 이것을 발명이라고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발명품을 평가하는 곳에 나오는 게 옳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하튼 당시 그렇게 나왔습니다.

 

요즘은 가스통이 폭발하는 경우가 적어졌죠? 자료를 찾아보니, 2007년에서야 가스통에 압력조정기를 부착된 게 공급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이 장치가 없어서, 폭발해서 피해를 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 방송에 나왔던 안전장치가 현재 사용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당시에 가스통 폭발 사고가 워낙 많았기에 꼭 필요한 것이었고, 그만큼 높은 평가를 받고 최종 단계에 올랐습니다.

 

이의 경쟁 상대로서 최종 단계에 오른 동안 비결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얼굴을 씻을 때 물의 온도와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가지고 발명으로 가지고 나온 사람은 당연히 아주 동안이었습니다. 나이를 알려주지 않으면, 10년은 적게 볼 만할 정도였습니다.

 

가스통 안전장치는 통 하나에 100원가량이면 장치할 수 있다 했습니다. 돈의 가치도 바뀌는지라, 당시 100원이 현재 어느 정도 되는지 확정하긴 어렵습니다. 그래도 당시 가정용 가스 20kg2만원이었고, 지금은 3만원입니다. 그래서 당시 100원을 지금으로 계산하면 150원가량 될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당시 두 가지 발명을 평가하는 자리에 있었다면,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저는 그걸 볼 때, 당연히 가스통 안전장치를 발명한 분이 최종 승자로 인정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 하게, 20표 차이로 동안 비결을 소개한 분이 최종 승자가 되었습니다. 그 해에 소개된 많은 발명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발명으로 인정된 것입니다.

 

만약, 요즘처럼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자들의 평가와 비평이 활발했다면, 비난이 거셌을 것입니다. 우리의 피부는 그렇게 쉽게 바뀌거나 좋아지지 않습니다. 망가지기는 쉽습니다만, 무엇을 어떻게 바르는 정도로는 쉽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단순히 물의 온도와 세수하는 방법을 달리한다고 해서 얼굴이 예뻐지고, 잘 생겨질 수 있겠습니까?

 

가스통의 안전장치는, 생명에 관한 발명입니다. 당시 가스통 폭발로 인한 피해가 적지 않았음을 생각해 보면,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수하는 방법으로 젊어 보인다는 것은,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혹시 그렇다고 하더라도 좋은 방법은 아니죠? 젊어 보인다고 해서, 실제 젊어지고 오래 사는 것은 아니죠? 둘을 같은 위치에 놓고 평가하는 것도 잘못되고, 결과도 어리석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를 통해, 각자 중요시하는 기준과 방향에 따라 선택이 전혀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활을 안전하게 하고,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줄 만한 좋은 장치를 선택하는 게 당연할 것 같음에도,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보기 좋은 것, 예뻐 보일 수 있다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지 여부조차 생각하지도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선택만 그런 게 아니고, 이후 선택의 기로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경우가 분명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마다, 전혀 다른 선택을 내린 두 사람이 계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울 왕과 다윗입니다. 이 두 사람은 초반에는 함께하는 사이였습니다. 사울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다윗이 구해 주었습니다. 골리앗이라는 거인 적장에 막혀, 모든 백성과 함께 꼼짝 못 하고 숨어 있을 때 구해준 사람이 바로 어린 다윗이었습니다. 사울이 악령에 휘둘려 고통에 몸부림칠 때도, 악기를 연주해 살려준 사람도 역시 다윗이었습니다. 또 다윗은 경호대장으로서 사울의 생명을 지키고 보호해 주었습니다. 아주 착하고 충실한 부하였고, 사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신보다 다윗을 높이는 백성들의 반응 하나 때문에 다윗을 수없이 죽이려 했습니다. 만사를 제쳐 두고, 다윗이 도망하는 곳까지 찾아가 죽이려 했습니다. 책에 기록된 내용을 읽는 것만으로도 사울의 어리석음과 사악함에 몸서리치는데, 다윗 본인은 얼마나 힘들고 또 사울이 미웠겠습니까? 당장이라도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복수의 기회를 두 번이나 얻었지만, 모두 살려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라는 이유였습니다. 세상에 다윗과 같은 사람이 실제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 번 정도야 어떻게라도 참고 용서하고 넘어갈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고 여전히 자신을 죽이려 혈안이 된 원수를 두 번이나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만이 아닙니다. 두 번이나 살려주었음에도, 사울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처음 살려 주었을 때의 모습을 사무엘상 24장에서 보면, 사울은 자신을 살려준 다윗에게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합니다. 하지만 26장에서도 다시 다윗을 죽이려 삼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찾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또 살려주었습니다. 이 정도 되었으면, 티끌만한 양심이라도 있으면 사울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다윗에 대한 증오와 협박을 멈춰야 합니다.

 

오늘 본문 21절에서는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사울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다윗에게는 죄가 없음을 알고 포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다윗에 대한 사울의 미움과 증오심이 모두 사라졌을까요? 안타깝게도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음 장을 보면, 다윗은 사울의 위협이 계속될 것을 알고, 이웃 민족에게 망명합니다. 4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꿔 생각해 보면, 다윗이 이웃 나라로 망명하지 않고, 이스라엘 영역 안에 있으면, 다시 쫓아가고자 하는 계획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사울과 다윗은 비슷한 상황에서 이처럼 전혀 달리 선택하고,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습니까? 사울은 왜 죄가 없는 다윗을 죽이려 혈안이 되었고, 그것도 두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자기의 잘못을 인정했음에도, 여전히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미움과 계획을 계속 품고 있습니까? 다윗은 왜 자신을 죽이려 하는 사울을 두 번이나 용서하고 있습니까?

 

사울의 성향을 잘 아는지라, 두 번이나 살려주었음에도, 사울이 다시 다윗 자신을 향해 칼과 창을 드리울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원수를 자기의 손으로 갚으려 하지 않고, 용서하고 돌아선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이 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정반대로 행하도록 만들었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사울은 사악하게 행동하고, 다윗은 너무 순진하게 행동합니까?

 

그 무엇보다 두 사람이 삶을 만들어 가는 기준이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울은 왕이 되고 초반까지는 겸손하고 능력도 있는 괜찮은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커지고, 자기 권력이 커지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는 제사를 본인이 직접 나서기도 하고, 아말렉의 모든 사람과 가축까지 없애라는 하나님의 명령까지도 거부한 것을 보면, 사울은 세상을 기준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의 기준이 되고, 목표가 되자, 사울의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방해하거나 위협하는 것이면, 그 누구든, 그 무엇이든 용납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이든, 자신을 왕으로 기름 부었던 선지자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여전히 자신의 앞날을 막고 방해할 것으로 판단되면, 자신을 한 번 살려 준 사람이든, 열 번 살려 준 사람이든, 죽이려 끝까지 쫓아다닐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우리들 보기에 너무도 어리석어 보일 정도로 다윗이 사울을 살려둔 까닭은, 판단과 선택의 기준을 세상에 두지 않고, 하나님께 두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셈법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살려줄 만한 사람을 살려주어야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주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살려줄 만한 사람을 구해 주어도, 오히려 억울하고 답답한 일 겪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물며 사울 왕을 살려줄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울이 왕으로서 책임을 다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한 것도 아닙니다. 인간적인 도의를 다한 것도 아닙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울을 살려둘 가치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원수처럼 자신을 괴롭히고, 누명을 씌우고 죽이려 하는 사울마저도 하나님의 기준으로 봤습니다. 웬만한 사람이면, 한 번 살려준 것만으로도, 뉘우치고 새로워지겠지만, 사울은 웬만한 사람의 범위 안에 들어가지 못 한다는 것을 다윗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기준을 하나님께 두었기에, 악랄하기 그지없는 사울마저도 다시 살려둘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봤다는 뜻입니다.

 

사울에 대해서만 그런 게 아닙니다. 19절에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사람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 하는 까닭이 하나님의 판단이고 이유이면, 자신이 기꺼이 죽음으로써 제사로 드려질 수 있는 제물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사울은 철저히 이 땅의 것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었지만, 다윗은 하늘의 것에 목숨 거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모든 것의 중심에 자신을 세웠지만, 다윗은 모든 것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셨습니다. 사울은 자기 속에 있는 욕망이 원하는 대로 살면서, 악령이 이끄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매일 매순간 확인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보기에 미련하고, 손해만 가득한 것 같았음에도,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 주었습니다.

 

이렇게 전혀 다른 것을 기준으로 삼고 살았던 두 사람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울은 40년 동안 왕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니, 그 동안에 갖고, 누리고, 먹은 것들로 따지면 가장 성공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이, 언제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귀신에게 휘둘리는 영적 고통까지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전투에서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으니, 어찌 복되고,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도 모든 신앙인들이 악하고 어리석은 왕으로 욕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다윗은 까닭 모를 고난을 겪고, 억울함이 끝없이 계속될 것 같았음에도,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고, 자기 손으로 원수를 갚지 않자, 하나님께서 한 순간에 모든 것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다윗 본인이 직접 사울을 해치거나 싸웠다면, 사울의 편에 있던 사람들은 반드시 반발하고, 다윗에 맞서 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처럼 끝까지 참고 양보하고 기다리고,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사울 왕을 죽게 하셨으니, 모든 백성이 다윗을 인정하고, 높여준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어디에 눈을 두고 있습니까? 무엇을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까? 사울처럼 이 땅의 것에 눈을 고정하느라, 하늘의 것을 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윗처럼 하나님의 것을 중심에 두고 살면서, 고난과 억울함마저도 인내하며 살고 있습니까? 까닭 모를 고난마저도 하나님이 선하신 뜻대로 이끌어 가실 것으로 믿고 참고 있습니까?

 

우리는 아직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아직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는 것처럼, 온전한 평안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까닭 모를 고난이 우리를 짓누를 수 있습니다. 답답함에 한숨과 탄식이 가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다윗과 비슷한 여정을 거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우리가 먼저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참고 기다리면, 다윗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우리 삶에도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누구를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과 목표와 자세가 달라집니다. 사울처럼 세상을 중심에 두고 살면, 처음만 편하고 쉬운 것처럼 보일 뿐, 그 뒤는 사울이 보여준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살고자 노력하면, 처음만 어렵습니다. 그 고비만 넘기면, 영생과 복으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13,14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울과 다윗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이들이 살아간 기준과 목적과 방법과 그 끝을 함께 기억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선하게 살고, 지혜롭게 참고 기다림으로써, 다윗에게 넘치게 베푸셨던 하나님의 복과 은혜와 사랑을 누리며 사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