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00705)믿음의 자존심을 가지고 사십시오(삼상 28장 1-14절)

청명하늘 2020. 7. 5. 16:45

믿음의 자존심을 가지고 사십시오

 

성경: 사무엘상 281-14(456)

찬송: 314(내 구주 예수를 더욱; 511), 354(주를 앙모하는 자; 394)

설교: 20200705.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우리가 자주 쓰는 말들 중에, 본래의 의미보다는, 변형된 의미로 더 익숙해진 것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시작돼, 일반 사회에까지 크게 영향을 끼치고, 큰 유행을 끌어낸 긍정이라는 말이 있죠? 이 말은 주로, ‘좋게 여기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실제 이 말은 어떤 생각이나 사실 따위를 그러하거나 옳다고 인정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게 생각한다거나, 잘될 거라 여기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지금의 상황을, 내 판단이나 계산으로 바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 자체가 옳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본래의 뜻으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그저 좋게 될 거라 판단하거나 기대한다는 뜻으로 풀이되곤 합니다.

 

자존심(自尊心)’이라는 말도 비슷한 경우입니다. 본래의 뜻은, ‘스스로의 가치나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으로서,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보다는, ‘지기 싫어하는 마음에 나타내는 고집정도로 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거의 대부분이, 고치거나 버려야 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존심이 잘못된 고집이나 성격 등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자존감이나 자긍심으로 나타기도 하고, 더 크게 보면, 신념이나, 정의를 향한 간절함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확신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존심과 자존감에 따라 행동의 가치와 결과가 달라집니다.

 

먼저, 하찮은 것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자존심이 없다고도 할 수 있고, 자존심의 가치를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대학교를 다닐 때의 일인데, 친구와 함께 학교 뒤편으로 내려가는 길에 있는 어느 집 앞에, 크기로 봐서는, 김치냉장고를 포장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정도의 큰 종이박스가 스티로폼과 함께 놓여 있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종이 박스는 재활용되고, 또 이를 수거하는 분들이 많죠? 종이박스를 가져가려면, 스티로폼까지 처리해 달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70세가량 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지나가다 그것을 보시더니, 박스를 들고 가기 쉽게 접더니, 종이박스만 들고 가시는 겁니다. 그래서 함께 있던 친구가 할머니. 스티로폼까지 가져가시든지, 아니면 박스를 놔두셔야죠? 박스만 가져가시면 어떻게 해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알아요. 저것도 처리할 거요.” 하고, 뒤도 안 돌아 보고 가셨습니다. 당연히 다시 안 돌아오셨습니다.

 

종이 박스가 재활용되는 시세를 잘 몰라서, 몇 백 원, 크고 무거우면 1,000원정도 할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할머니가 1,000원 때문에 양심을 버렸다고 허탈해 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1kg50-60원밖에 안 한다고 합니다. 박스가 1kg까지는 안 나갔을 테니, 그분은 30-40원에 양심을 판 것이었습니다. 자기 삶에 대한 자존심, 자존감, 자긍심이 있었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죠?

 

자존심의 가치를 이보다는 크게 쓰지만, 결국 헛된 경우도 있습니다. 며칠 전 화제가 된 뉴스 중에, ‘딸 결혼식에 986억 인도 재벌 파산 선고라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이에 따르면, 2012년에 자기 딸이 결혼하는 데 986억 원을 쓴 부자가 파산했다는 것입니다. 986억 원이면,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금액이죠?

 

그런데 이 사람이 거액을 딸 결혼식에 사용한 까닭이 있습니다. 자기 형과의 경쟁심 때문이었습니다. 형도 엄청난 부자인데, 딸 결혼식에 700억 원이 넘는 돈을 썼습니다. 동생은 형과의 자존심을 건 경쟁심 때문에, 형보다 딸 결혼식에 더 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몇 년 후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자존심과 자긍심의 가치가 언제나 돈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운 분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일본의 앞잡이 노릇하며, 더 안락하게 살았던 이들도 있습니다. 비슷한 처지에서, 전혀 다른 결정을 내리게 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크게 보면, 이것도 자존심, 자존감의 문제로 볼 수 있습니다.

 

독립 운동하는 분들이라고 해서, 일본이 줄 수 있는 안락하고 부유한 삶을 모를 수 없을 터입니다. 유혹이 안 될 리 만무합니다. 그럼에도 온갖 고난을 겪으며, 목숨까지 내걸고 독립운동을 벌인 까닭은,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신념, 나라를 빼앗은 일본에 절대 무릎 꿇지 않겠다는 자존심이 있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자존심을 어떻게 여기고,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 행동과 삶의 방향이 전혀 달라집니다. 누군가에게는 몇 십 원의 가치도 없는 것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지켜야 하는 가장 큰 목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자존심이 신앙생활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또 우리는 어떻게 나타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신앙의 자존심을 잊거나 잃어버린 두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다윗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계속 쫓기고 있습니다. 게다가 자신과 함께한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이 늘었습니다. 군사만 600명이면, 가족까지 포함해 2-3,000명이 넘었을 것이기에, 좁은 이스라엘에서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도망한 곳이 블레셋 민족에 속한 가드 지역이었습니다.

 

가드는 다윗이 죽인 골리앗의 고향이기도 했고, 앞에서 다윗이 몇 명의 군사와 함께 피한 적이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미친 사람처럼 행동해 위기를 넘겼던 곳입니다. 지난날의 부끄러운 기억이 가득했기에, 웬만했으면 그곳으로 피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다시 가드 땅으로 갔다는 것은, 그만큼 다윗의 처지와 형편이 긴박하고 위급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과정을 신앙의 관점, 믿음의 자존심과 자긍심에서 보면 어떤 것 같습니까? 끊임없이 다윗을 쫓았던 사울도 드디어 포기했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는, 가드의 왕 아기스가 다윗을 자신의 경호대장으로 삼겠다는 약속까지 했습니다. 살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도망치고 숨어야 했던 다윗으로서는 잘되고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겠다 약속하시고, 기름까지 부으신 사람입니다. 아직은 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 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러나 믿음이 좋은 다윗이었기에 이를 붙잡고 견뎌야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를 잘 이겨내지 못 했습니다. 이미 이스라엘 땅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씀을 듣고 들어왔지만, 또 다른 이유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을 향했습니다.

 

그래서 좀 잘된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믿음의 자존심에서 보면, 사실 이건 잘되고 성공한 게 아니고, 너무나 부끄럽고 실패한 일이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웃 나라의 경호대장도 성공하고 잘된 것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당시는 지금처럼 조직이 잘 갖춰진 게 아닙니다. 게다가 가드 왕이라고 하니 큰 나라를 다스리는 대단한 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는 지금과 같은 행정 조직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지역의 이라고 표현되었더라도, 아주 작은 조직의 우두머리밖에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드를 표현할 때도, ‘블레셋의 가드라고 하죠? 블레셋은 나라로 볼 수 있고, 가드는 거기에 속한 다섯 구역들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드 왕이라는 것은, 우리나라로 바꿔 생각해 보면, 크게 보면 도지사, 작게 보면 군수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지사나 군수를 보좌하고, 지키는 직책도 중요하죠?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이 될 다윗이라면 전혀 다르죠? “겨우” “?”라는 반응이 나올 법하고, “좀만 더 기다리지.”라는 말을 해주고 싶은 상황입니다. 왕이 될 사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 적국의 도지사나 군수를 지키는 사람이 된다고 하니, 이 같은 실패와 수치가 없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다윗이 얼마나 어리석어 보입니까?

 

사울 왕의 모습은 어떤 것 같습니까?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서 지금 40년 가까이 왕 노릇 하던 때입니다. 블레셋 민족이 공격해 왔습니다. 전쟁의 승패에 따라서, 모든 것이 바뀔 수 있습니다. 전쟁의 결과를 알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아무런 응답도 안 하셨습니다. 꿈으로도, 제사장이 가진 우림으로도, 예언자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울은 왕으로서 조바심이 생기고, 두려웠습니다. 견디지 못 하고, 결국 무당을 찾게 됩니다.

 

주술사, 신접자, 박수무당 등을 하나님이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이런 이들을 쫓아내라고도 하셨고, 심지어는 죽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가 죽었을 때, 사울 왕 자신이 이런 사람들을 모두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울 스스로 약속을 어기고 무당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래도 부끄러움을 알아서, 다른 사람인 것처럼 변장하고 가서, 이미 죽은 사무엘 선지자를 불러달라 합니다.

 

사울 왕의 이런 모습이 어떤 것 같습니까? 사무엘 선지자의 영혼이 찾아왔습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논쟁거리이기도 하고, 길어질 것 같아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했던 계획대로 되었습니다. 이미 죽은 사무엘 선지자의 입을 통해, 전쟁에서 자신과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의 이 모습을 신앙의 자존심에서 보면 어떤 것 같습니까? 잘되고 성공한 것 같습니까? 줏대도 없고, 왕으로서도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잃어버린 것 같아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사울 자신은 왕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과 은혜를 입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그리고 무당과 주술사 등을 명령만으로도 쫓아낼 만큼 권력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울 스스로 다시 무당 앞에 변장하고 찾아가고, 가서 엎드려 사정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혹 그렇게 해서 무당의 입을 통해 복과 성공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서, 그대로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응답하셔야 응답이 되고, 하나님이 말씀하셔야만 약속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울은 긴박한 상황 때문에, 자신의 손으로 쳐낸 무당을 찾아가 사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서 자존심마저 버리면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윗과 사울은 모두 자존심마저 버리고, 엉뚱한 곳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이 외면하시는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얻은 것들이 사람의 계산법으로 꽤 괜찮은 것이긴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받은 것에 비하면 정말 하찮은 것들 아니겠습니까? 한 나라의 왕이 될 사람이 고작 도지사의 경호대장 되는 것으로 살아야 한다는 게 자존심 상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 나라의 왕이 한낱 무당에게 찾아가 사정하는 것은 너무 천박하고 비참한 것 아니겠습니까?

 

다윗과 사울의 이 모습은, 하나님과 그 약속을 떠난 자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자존심, 자존감을 버리고 보면, 꽤 괜찮을 것처럼 보입니다만,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보장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음 안에 머물러 있으라 하시며, 구원과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고자 죽도록 고생하는 것이 이 땅의 삶 아니겠습니까? 하루 사는 게 마음과 생각을 폭삭 늙게 만들기도 하는 게 세상의 삶입니다. 살기 위해 온갖 고통과 수고를 참지 않아도 되는 것, 이것이 구원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영생도, 죽도록 수고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멀리 있는 다른 사람의 약속이 아닙니다. 옛날 성경 속 인물들에게만 주시는 선물이 아닙니다. 지금 오늘을 사는 우리, 믿음을 품고 사는 우리에게 반드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에 비하면, 세상이 우리에게 줄 수도 있다는 것들은 얼마나 보잘 것 없고, 그러면서도 또 얼마나 많은 수고와 희생을 요구합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님 안에, 약속과 믿음 안에 머무는 게 복되고 성공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있다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보장해 주지 못 하는 영생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모두가 소망하는 바처럼,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약속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에 이제는 믿음의 자존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변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확약을 받은 사람들이니, 그에 합당하게 자존심과 자긍심을 가지고 삽시다. 돈 있다고 목이 굳어지고, 권세 있다고 거드름 피우는 사람들 얼마나 많습니까? 건강하다고, 좀 더 배웠다고 자랑하며 겸손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건강과 돈과 명예와 지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을 가진 사람들이니, 그에 맞게 자존심과 자존감을 가지고 사십시오. 자존심을 몇 푼 안 하는 것들과 바꾸는 사람 되지 말고, 자존감을 헛된 것들에 쓰지 말고, 참되고도 영원한 가치에 자존심과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 되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크고 귀한 것들을 가진 사람들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담대하게 사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을 품은 사람답게, 권력자 앞에서도 당당하고, 하늘의 것을 품은 사람이니, 부자들 앞에서도 멋지게, 기쁘게 사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당연한 자존심과 자긍심을 가지고 사십시오.

 

다윗과 사울은 하나님의 약속과 선물을 이미 받고 살았음에도, 이 가치를 잊고, 세상이 주는 작은 것들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이로 인해 사울은 왕의 위엄을 잊고 무당 앞에 무릎 꿇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왕이 될 거라 약속받았음에도, 자칫 적국의 왕을 지키는 부하로 머물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잊은 사람들의 초라한 결과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약속과 선물을 받은 자들처럼, 세상의 모든 것 앞에서 더 당당하게, 더 과감하게, 떳떳하게, 멋지게 살며, 하나님의 약속 안에 머묾으로써, 자녀들에게 마땅히 베푸시는 크신 은혜와 사랑을 이 땅에서 누리고, 이후에 주어질 영원한 삶을 기대하며 사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