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가 주어질 때 잡으십시오
성경: 사무엘상 28장 15-25절(구 457쪽)
찬송: 373장(고요한 바다로; 통503), 401장(주의 곁에 있을 때; 통457)
설교: 20200712.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청개구리 이야기 아시죠? 청개구리가 왜 부모의 말을 안 듣는 것을 대표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학교에서는 배우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도, 대부분 잘 알고 있습니다.
엄마 청개구리가 자신이 죽으면 강가에 묻어달라고 한 까닭이 무엇인가요? 아들 청개구리가 날마다 반대로만 했기 때문이죠? 이쪽으로 가라 하면, 저쪽으로 가고, 저쪽으로 가라 하면 이쪽으로 가고... 밥 먹으라 하면 나가 놀고, 나가 놀라 하면 집으로 오는 등 반대로만 했습니다. 그래서 엄마 청개구리가, 자신이 죽었을 때 물가에 묻어 달라 했습니다. 엄마 청개구리가 정말 원하기는 산에 묻히는 것이죠?
하지만 아들 청개구리는 다른 때는 거꾸로 했지만, 엄마의 마지막 소원이라며, 엄마의 말대로 물가에 묻어 줍니다. 물가에 묻었으니, 비가 오면, 물이 많아져 무덤이 휩쓸릴까 염려되어 운다는 이야기입니다.
재미와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지어졌겠지만, 엄마 청개구리가 본래 원하는 대로 산에 묻히지 못 하고, 물가에 묻힌 까닭이 무엇일까요? 아들이 갑자기 말을 들었기 때문인데, 이것을 아들의 행동이 일관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들 청개구리가 거꾸로 해왔던 대로, 마지막도 그랬으면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터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전과는 정반대로 행동해서, 결국 끝까지 말 안 듣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무작위, 혹은 갑작스런 의외의 행동이 주는 어려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상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행동이 일관되어서,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지 예측하면, 충분히 대비할 수 있습니다.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큰 어려움도 겪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해석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까닭이 바로 의외성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고 바르게 해석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중 하나가, 다른 본문과의 일관성입니다.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성경도 질서와 일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어느 쪽에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는데, 다른 쪽에서는 갑자기 헌신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 일관되지 못 하는 것이지요?
질서의 하나님이시라는 뜻이 이렇습니다. 수천 년 전에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수 천 년이 지난 후에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도 이런 점에 조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곳곳에 통일성을 찾기 어려운 곳들이 있고, 오늘 읽은 본문도 그러합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은 40년을 왕으로 나라를 다스렸고, 오늘 본문의 일은 사울이 죽기 하루 전날입니다.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이 부하들과 함께 블레셋의 가드라는 지역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블레셋 민족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준비한 것입니다. 다윗이 삼손을 죽였을 때도,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이었는데, 이제 다시 두 민족이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달라진 점이라면, 전에는 다윗이 이스라엘 편에서 싸운 것이고, 이번에는 블레셋 편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사울은 블레셋 군대를 보고 겁을 먹었습니다. 싸워 이기기 힘들 것 같아 두려움이 컸습니다. 두려움이 더 큰 까닭은,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도 사울에게 아무 말씀도 안 하신다는 점이었습니다.
공포심에 휩싸인 사울은 결국 무당을 찾아갑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죽었을 때, 사울은 전국에 있는 모든 무당과 신접한 사람들을 없애도록 명령했습니다. 무당들과 신접한 자들은 모두 살기 위해 그 동안 해오던 것들을 버리거나, 알려지지 않게 숨어서 해왔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숨어 지내던 무당을 찾아가서, 이미 죽은 사무엘 선지자를 불러 달라고 사정합니다.
그리고 사울이 바라던 대로, 사무엘 영이 올라와서, 하나님이 사울에게 어떤 것으로도 말씀하시지 않는 까닭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래서 다음 날 싸움에서 사울이 그 아들들과 함께 죽게 될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신학적으로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몸은 사라지지만, 영은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됩니다. 이미 죽은 사무엘이 영으로 나타나 말하는 게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이런 경우가 나온 적이 없는 것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무당이 이미 죽은 사무엘 선지자의 영혼을 불러들였으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해야 하는지로 의견이 나뉩니다.
하나는, 사울과의 대화창을 닫고, 아무말도 안 하시는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사울에게 말씀하시기 위해서 사무엘 선지자의 영혼을 보내셨다고 봅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계속 말씀하셨고, 기회를 주셨지만, 사울은 계속 불순종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포기하시고, 대화창을 모두 닫으셨습니다. 사울이 사정해도 어떤 방법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다 되었습니다. 다음 날이면, 사울은 전쟁터에서 아들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마지막 기회와 말씀을 주시기 위해, 사무엘의 영혼을 보내셨다고 보는 주장입니다. 이렇게 보는 까닭은, 사무엘의 모습을 한 영혼이 하는 말들이 모두 맞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버리셨습니다. 또 다음 날 전쟁에서 아들들과 함께 죽는다고 했는데, 다음 장에서 사울은 아들들과 함께 죽게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사무엘 선지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귀신의 거짓에 불과하다고 보는 입장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외에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무당이나 신접한 사람에 부름에 따라 올라온 경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의견 중에 어느 쪽이 맞다 생각하십니까? 무당이 불러낸 영이 말한 것들이 모두 거짓이고, 잘못되었으면 간단하죠? 그런데 그 영이 한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같았고, 또 예언대로 일이 이루어졌다는 점 때문에 혼란을 겪습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탄과 귀신들의 능력과 특징을 고려해야 합니다. 사탄과 귀신들이 단순하고 미련하다고 말하는 신앙인들도 간혹 있지만, 잘못된 평가입니다. 그렇게 단순하고 미련한 존재가 하나님과 맞설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그랬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심판이 끝날 때까지 하나님을 대적할 정도면,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교활하고 간사할 것입니다. 계산과 판단과 능력까지 대단한 존재입니다.
이 정도로 능력과 계산이 좋은 사탄과 귀신이, 누구나 쉽게 보고 알 수 있을 만큼 미련하고 단순한 방법으로 현혹시키겠습니까? 사탄이 언제나 거짓말만 하고, 틀리게 가르쳐 준다면, 거기에 넘어가는 사람이 없겠죠? 사탄이 단순해서 언제나 정반대로 말하고, 거꾸로만 가르쳐 준다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이 없겠죠? 사탄이 “이렇게 해라”고 하면, 저렇게 하면 되고, “저렇게 해라”고 하면 이렇게 하면 모두 해결되겠죠? 사탄이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 먹으라 할 때는 안 따먹으면 됩니다. 세상에 이처럼 쉽고 간단하고 분명한 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지만 사탄과 악령들이 이를 모를 리 없기에 사용하는 방법이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곳곳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무당을 통해 올라온 영이 진짜 사무엘인지를 놓고 혼동을 겪고, 의견이 나뉘는 것 자체가 이미 신앙인과 신학자들까지 이에 혹하게 되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앙과 신학에서 볼 때, 본문처럼 사탄의 능력에 속했는지, 하나님의 능력에 속했는지 논쟁이 되는 경우도 드물 것입니다. 그만큼 사탄의 교활한 술수에 이미 어려움을 겪고, 또 이에 넘어가는 이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설교를 준비하다가, 문득 이것이 사탄의 속임수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만 애쓰는 것 자체가 이미 손해고, 혼란을 겪고 있는 거라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사탄이 오늘 본문을 이용해, 우리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해서,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 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무당을 통해 죽은 사람의 영혼이 돌아올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죠? 이것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배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본문에서 무당을 통해 사무엘의 영혼이 정말 올라왔는지, 아니면 사탄이 이를 악용했는지를 분별하지 않아도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마지막 순간의 상황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믿고, 어떻게 선택하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고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첫 번째 왕으로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사울이 죽기 하루 전날의 일인데, 모습이 어떤 것 같습니까? 모두가 부러워할 만합니까? 아니면 오히려 불쌍하고 안타깝습니까? 왕으로서 위엄도 없고, 자존심마저 잃은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울은 누구보다도 크고, 멋진 외모를 가졌지만, 이를 감추느라 초라한 행색으로 바뀌었습니다. 전쟁을 앞두고 근심하느라 안색은 창백하고, 눈은 충혈되었을 터인데, 게다가 무당과 귀신 앞에 엎드렸으니, 왕으로서 마땅한 고귀함과 위엄을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울이 왜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최고의 자리에 있는 사울이 왜 이처럼 비참하고 초라한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의 자리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위기마다 해결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말씀과 약속에 따라 살기만 하면, 왕의 자리를 대대로 이어가게 하시겠다 약속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럴 능력을 가진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사울이 이 땅에서 잘되고, 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왕으로서의 책임만 다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이것 하나를 제대로 못 했습니다. 다윗에게 괜한 시기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복과 은혜의 자리를 차버렸습니다. 힘쓸 것을 저버리고, 버려야 할 것에 목숨 걸었습니다. 사울이 이처럼 하나님을 버리고, 욕망에 따라 살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울의 바람처럼, 더 잘되고 성공했습니까? 원하는 대로 이루고, 왕위를 아들에게 이어줄 수 있었습니까? 그렇지 못 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뒤로하자, 인생의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그것도 너무나 안 좋은 쪽으로만 바뀌었습니다. 본문 앞 5절에서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는 말씀처럼, 블레셋 군사들을 본 사울은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단순히 군사 수가 많고, 강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자리에서 벗어나 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벗어난 사람이 겪게 되는 또 다른 특징은 악령에 쉽게 휘둘린다는 것입니다. 본문 14절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의 모양이 어떠하냐 하니 그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더라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는 말씀을 보면, 사울은 영혼을 보지 못 했습니다.
사울이 한 나라에서 가장 높은 왕이면서도, 얼굴을 땅에 대고 영혼에게 절하는 까닭은 단 한 가지입니다. 무당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무당이 거짓말을 한 것인지, 진실을 말한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무당이 영혼이 올라온다고 거짓말 하고, 사무엘을 본 적 없음에도, 그저 흰옷을 입었다고 거짓말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신의 눈으로 사무엘의 영혼을 본 것도 아니고, 무당의 말만 듣고, 그 앞에서 쩔쩔맵니다. 엎드려 절합니다.
이를 보면,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비참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악령을 의지하는 것이고, 사탄의 거짓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왕으로서 위엄과 존귀함마저 하나 남지 않고, 무당에게 구걸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울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어떻게 살고, 어떻게 믿으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까? 유행어처럼 쓰였던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잘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실 때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경고하실 때 돌아설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 생각과 판단을 앞세우며 살면, 사울의 마지막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녀로서 삼아주신 은혜도 사라질 것이고, 소망도 사라질 것이고, 악령에 이리저리로 휘둘려 살다가, 비참하게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을 수 있을 때 마음에 새겨야 하고, 말씀대로 살 수 있을 때 행동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곁에 계실 때, 우리의 삶과 행동을 살피고, 고치고, 살아나야 합니다.
사울은 좋은 기회를 많이 얻고, 구원의 말씀을 전해 들었음에도, 하나님을 떠나 살았습니다. 그 결과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은혜와 복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었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아무것도 남기지 못 했습니다. 사울의 이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탄의 교활함도 알아야 하고, 지금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기억하고, 지혜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좋은 것을 지켜 행하고, 나쁜 것은 모양이라도 철저히 버림으로써, 복과 은혜로 채우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 땅에서도 은혜와 복이 넘치게 사시고, 구원의 손길을 힘입는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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