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용서할 줄 아는 믿음
성경: 사무엘상 26장 1-12절(구 454쪽)
찬송: 419장(주 날개 밑 내가; 통478), 453장(예수 더 알기 원하네; 통506)
설교: 20200607.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최근, 유사한 성범죄 사건에 대한 판결이 뉴스로 올라왔습니다. 하나는, 4월 말에 올라온 것인데, 한 남성이 다른 집에 침입해 여성들을 훔쳐봤습니다. 이게 한 번이 아니고, 두 집에 걸쳐 세 번 이런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한 집에 두 번이나 침입해 범죄를 저질렀고, 다른 한 집에서는 한 번 저질렀습니다. 이 사람은 주거침입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 160시간의 사회봉사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집행유예’라는 것은, 일정 기간 동안 형을 집행하지 않고 유예하는 제도입니다. 그래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이라는 것은, 본래 징역살이를 1년 해야 하지만, 3년 동안 큰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징역살이를 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사건은, 지난 달 중순에 나온 뉴스인데, 한 남성이 이웃집에 몰래 침입하려다가, 집안에 있던 사람이 소리를 치자 도망했는데 붙잡혔습니다. 이 사람에게 내린 선고는 징역 8개월입니다. 바로 구속되고 8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두 사건에 대한 재판 결과가 어떤 것 같습니까? 징역 1년이지만, 3년 동안 다른 범죄가 없으면, 감옥살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무조건 8개월 옥살이를 해야 하는 것과 어느 것이 형량이 더 크고 작은 것 같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달리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만, 이 두 사람이 지은 죄의 크기로 보면 분명해집니다.
한 사람은, 총 세 번이나 발각되었는데,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한 번 발각되었는데 집행유예 없이 바로 징역 8개월에 처해졌습니다. 형량이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습니까? 재판 결과가 이해 안 되는 경우야 워낙 많습니다만, 그래도 죄의 크기에 따라 처벌의 수위도 높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또 비슷한 죄이면, 횟수가 많을수록 처벌도 커져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비슷한 죄인데, 한 사람은 3번이나 발각되었으나 집행유예를 내리고, 한 사람은 1번 발각되었는데 징역형을 내렸으니 좀 이상하죠? 선고가 서로 바뀐 것 같죠?
그런데 이렇게 형량이 달리 내려진 ‘양형 이유’가 있습니다. 왜 그런 형량을 선고했는지에 대한 기준입니다. 먼저 3번이나 발각되었음에도,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사람은, 이전에 다른 전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피해자들에게 발각되긴 했는데, 그게 정식 신고가 안 되고, 재판을 받지는 않다가, 이후에 세 번째 발각되었을 때 재판을 받은 것 같습니다.
한 번 발각되었는데, 바로 징역 8개월의 처벌이 내려진 경우는 반대입니다. 이 사람은 이전에도 두 차례 강제추행 전과가 있었고, 아직 집행유예 기간이 채 끝나지도 않았을 때 다시 범죄를 저지르려다 발각되어 처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형법에서 이전에 동종 범죄를 저질렀는지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같은 죄라 하더라도, 이전에 비슷한 전력이 있는 경우엔 더 큰 처벌을 받습니다. 비슷한 전과가 없다면, 더 큰 죄를 저지른 것 같아도 처벌의 수위가 낮다는 것입니다.
법이 이런 양형 기준을 만든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무엇보다도 사람은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또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무조건 죄의 크기와 횟수에 따라 형량이 달라질 것입니다. 죄가 크고 많을수록 큰 처벌을 받고, 작수록 무조건 낮은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를 보면, 죄의 반복 여부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형법에서 해당하는 것만이 아니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삶을 맞춰 살아가야 하는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용서를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잘못을 범한 사람을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지, 일곱 번 정도면 되는지 여쭈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답하시면서, 끝없이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의 믿음과 마음의 그릇이 대단하면 큰 문제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잘못을 저지른 이들을 끝없이 용서할 수만 있으면 고민할 것도 없고, 갈등이 커질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기엔, 우리 믿음의 크기가 보잘 것 없습니다. 용서를 베풀며 살기엔, 우리의 속은 좁고 비뚤어져 있습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씩 용서하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는 용서할 줄 아는 수준, 용서의 흔적이라도 품고 실천하면 좋겠는데, 이것마저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번 용서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힘든 게 있습니다. 반복되는 죄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참고, 참고 또 참고 용서해 주었는데, 상대가 다시 같은 죄를 짓는다면, 그래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믿음과 행함이 대단해 보이고, 하나님이 왜 그토록 다윗을 아끼시고 사랑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계속 쫓기고 있습니다. 다윗은 살기 위해, 다른 나라에 가서 미친 척 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자신은 목숨 걸고 가서 도와주었는데, 오히려 배신당하는 일도 겪었습니다. 죽을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이런 고난과 위협을 겪는 것이라면 할 말 없겠지만, 다윗은 사울 왕에게 그런 죄를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상을 받아도 모자랄 만큼 큰 공로와 업적을 세웠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집과 가족을 떠나 여기저기로 도망쳐야 했으니,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억울했겠습니까? 또 아무 잘못도 없음에도, 자기를 죽이려 끝없이 쫓아다니는 사울이 얼마나 밉고 없애고 싶겠습니까?
그리고 마침 사울을 죽일 만한 때가 찾아왔습니다. 다윗이 부하들과 함께 굴속 깊은 곳에 있는데, 사울이 뒷일을 보려고 혼자 그 굴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자기의 고난과 억울함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자기 삶을 다시 평안과 성공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때 사울을 죽이자고 하는 부하들의 판단과 요구가 분명 맞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라는 이유로 살려 주었습니다. 이 정도만 해도, 다윗의 믿음이 참 대단해 보입니다.
문제는, 사울의 완악함이 고쳐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을 살려준 다윗에게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선으로 갚아주실 것이며, 왕이 될 것이라며 축복도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이 죽을 위기에서 살아났으면, 자기의 죄와 잘못을 깨달아야 합니다. 죄가 없는 다윗을 더 이상 쫓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십 광야에 사는 사람들이 다시 사울에게 찾아와 다윗이 있는 곳을 알려줍니다. 그러자 사울은 다시 삼천 명을 뽑아 다윗이 있는 곳으로 찾아갑니다. 지금 사울이 다윗을 찾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용서받기 전의 모습과 달라진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이 정도 되면, 흔히 쓰는 말로 “죽어도 싸”지 않습니까? 다윗이 참고 참아 살려주었으면, 자신의 행동과 잘못을 뉘우치고, 그로부터 철저히 돌아서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마지막 기회이자 경고임을 깨닫고, 다시는 그런 죄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사울은 용서받기 전과 달라진 게 없습니다. 사무엘상 24장에서 다윗을 죽이기 위해 삼천 명의 군사들을 뽑아왔는데, 오늘 본문에서도 똑같이 삼천 명의 군사를 특별히 선택해 달려왔습니다.
이 정도 되면, 마음이 아무리 넓고, 믿음이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용서하지 못 할 것입니다. 사울은 죽어도 싸고, 다윗은 사울을 죽이는 게 당연해 보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기에서 다시 용서합니다. 한 번의 공격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회고, 또 대신 사울을 죽이겠다고 하는 부하의 요구마저 거부하고 용서하고 돌아섰습니다.
여기에서 다윗의 위대함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왜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 되고, 그 후손까지 대대로 왕의 자리에 올랐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주는 과정에서 크게 두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는,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겼다는 것입니다. 앙갚음에 대한 말들 중에,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게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상대가 내게 큰 피해와 아픔을 주었어도, 내가 직접 되갚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같은 사람이 되고, 같은 범법자가 됩니다. 그래서 법에 맡기고, 절차에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다가는, 문제가 해결되고, 마음이 풀리기는커녕 내 속이 답답하다 못 해 타들어 갑니다. 하지만 내가 직접 나서서 원수를 갚고, 손해를 만회하는 것은 쉽고 빠릅니다.
이를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보응은 멀고, 내 주먹은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당한 피해와 아픔을 하나님께서 즉시로 갚아 주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당장 해결하고 싶고, 원수를 갚고 싶은데, 하나님이 보응하시는 것을 기다리다가는 끝이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내 힘으로 직접 해결하려 합니다. 그래야 좀 시원한 것 같고, 빠른 것 같고, 깨끗하게 해결된 것 같습니다.
다윗의 경우는 특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한 번 사울 왕을 살려 주었습니다. 이것 자체의 결단도 대단한데, 사울은 다시 자신을 죽이러 옵니다. 이 정도 되면,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참고 기다리고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머리로는 내 손으로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이 갚아주실 때까지 기다리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두 번째도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며 살려 주었습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단순히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기에 살려둔 것 자체가 아니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때에도, 다시 나를 죽이러 오는 걸 보면서도,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인도를 바라보고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응을 인정하며, 자신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때를 기다렸습니다.
다윗이 보여준 또 다른 모범은, 신앙과 용서의 수준이 더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한 번 정도 용서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피해와 아픔을 가져다 준 사람을 용서해 준 경험은 누구나 한 번 정도는 있습니다. 내가 입은 피해와 아픔이 대단하지 않아서 그럴 수 있지만, 한 번의 인내와 용서는 대단한 각오와 희생이 없이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반복되었을 때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를 일곱 번 용서하면 되냐고 묻는 것도, 반복되는 죄를 몇 번정도 용서하면 충분하냐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반복되는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 조건을 두지 말로 용서하는 수준에 이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따르고 실천하기 너무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를 직접 보여 주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죽이기 위해 칼을 던지고, 음모를 꾸미고, 이곳저곳을 가리지 않고 쫓아간 사람입니다. 웬만하면 용서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지만, 다윗에게 저지른 사울의 죄는 ‘웬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사울을 용서합니다.
하지만 사울은 다시 다윗을 향해 칼을 들이밀었습니다. 다윗을 향한 미움과 살기가 여전해서, 다윗을 죽일 만한 사람을 특별히 뽑아서 달려 왔습니다. 사울을 살려 주었던 의미와 가치를 도저히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울을 그 누가 옹호하고, 이런 사울을 다윗이 죽였다고 해서 그 누가 비난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사울을 향한 칼과 창을 거둡니다.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모든 어려움과 억울함을 한 번에 풀어줄 만한 기회였음에도, 이 때마저 다윗은 참습니다. 죄가 반복될수록 용서의 폭과 크기가 좁아지고 작아지는 것이 우리 모두의 모습인데, 다윗만은 오히려 더 크게, 더 넓게 용서했습니다. 갈수록 옹졸해지고, 이기적인 게 우리의 모습인데, 다윗은 오히려 더 성숙하고도, 더 크게 용서하고, 과감하게 복수의 손을 거두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끝없이 용서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악한 본성이 가득한지라, 너무 멀고 어렵습니다. 한 번의 용서마저 쉽지 않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겪고, 온갖 고난을 겪었으면서도,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반복되는 죄에 대해서도 처음과 다를 바 없는 큰 용서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통과하자, 하나님이 직접 다윗의 편에 서시고, 원수를 갚아 주셨습니다. 다윗에게 넘치는 복을 주셨습니다.
참고 용서하는 게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지만, 다윗은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억울함을 참았습니다. 원수 갚는 것마저 내 힘과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끄심 대로 믿고 참았습니다. 반복되는 죄마저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고, 비로소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 속에 복과 은혜로 채울 수 있었습니다.
다윗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기억하고, 철저히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며, 용서의 수준에서도 더욱 성숙함으로써,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넘치는 복을 받은 다윗처럼, 삶 가운데 하나님의 특별한 인정과 보호하심 가운데, 더욱 복되고 기쁜 사람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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