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00524)더 중요한 것들을 가진 사람이 되십시오(삼상 25장 1-22절)

청명하늘 2020. 5. 24. 19:36

더 중요한 것들을 가진 사람이 되십시오

 

성경: 사무엘상 25장 1-22절(구 451쪽)

찬송: 390장(예수가 거느리시니; 통444), 490장(주여 지난 밤; 통542)

설교: 20200524.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올 3월말은 전염병 때문에 가장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기였습니다만, 이런 중에 우리에게 더 큰 충격과 황당함을 가져다 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렌터카 사망사고’라 불리는 사건입니다.

 

3월 29일 대학교 개강을 앞두고 학비를 벌기 위해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한 청년이 한 차량에 의해 치여 사망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교통사고와 사망 사고야 매일 일어나는 것입니다만, 이게 논란을 일으킨 까닭이 있습니다. 사고를 낸 운전자가 13세 중학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중학생 나이밖에 안 되는 13세가 운전했다는 것은 당연히 무면허로 운전했다는 뜻이죠? 더군다나 더 황당한 것은, 이들이 14세 미만이라는 이유로 형사적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세상에 무슨 저따위 법이 있나?’ 하는 생각도 들죠? 또, ‘저런 아이들에 의해 피해를 입고, 다치고,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억울할까?’ 하는 연민의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고를 일으키고, 사람을 다치게 하고, 죽이고도,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연령이라는 이유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취지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좀 극단적으로 예를 들어 보면, 2-3살의 아이가 남의 물건을 훔쳤습니다. 남의 것을 훔치는 것 자체는 잘못이고, 처벌을 받아야 하는 일이죠? 하지만 2-3살 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정도면 용서하고 고치도록 기회를 계속 주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의 실수에 대해서는 다시 기회를 주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도 그랬으면 하는 좀 유칙한 생각이 들곤 합니다. 컴퓨터 게임처럼, 실수를 고칠 수 있고, 크게 일어난 사건을 되돌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길로도 살아보고, 일도 이것저것 해서 나에게 꼭 맞고, 좋은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시간을 되돌릴 수 없고, 아무리 크고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나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만, 일단 시간이 흐르고, 일이 일어나고 나면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좋든 싫든, 선택하면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고, 선택에 대한 책임을 본인이 직접 져야 합니다. 그래서 어른으로 산다는 것이 어렵고 힘겹습니다. 모든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고, 책임의 연속입니다.

 

이 때문에 여러 가지를 시도하지 않고, 가장 확실해 보이는 것으로 살아갑니다. 가장 많기로는 재물을 의지하며 삽니다. 때로는 힘을 가진 사람의 줄을 부여잡고 삽니다. 재물과 사람의 줄이 언제나 정답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의 눈에 가장 많은 기회와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부 소수만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 살아갑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선택한 것을 번복할 수도 있고, 고칠 수도 있고, 결과를 바꿀 수 있다면야, 이것저것 해보고, 그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며 살면 됩니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 일직선입니다. 흘러간 시간을 돌릴 수 없기에, 하나만을 선택하고, 그 결과에 따라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게 역사를 알고, 우리 앞에 산 사람들의 발자취와 그 결과를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각자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떤지도 역시 우리에 보여줍니다. 그래서 내가 반복할 수 없는 길을, 앞선 사람들을 통해 보고 배우는 게, 한 번뿐인 기회를 가장 지혜롭게 선택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산 세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나발이고, 두 번째 다윗, 세 번째는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기는 중에, 많은 사람들이 다윗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여성과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을 제외한 청장년층만 해도 600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전체 수로 보면, 2-3,000명가량 되었을 것 같습니다. 사울에게 쫓겨 황무지나 광야 등에서 살아야 하는지라 먹는 것이 언제나 부족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근처에서 가장 큰 부자라고 할 수 있는 나발이 양털을 깎는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양털을 깎는다는 것은, 농사로 보면, 수확하고 타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풍성하게 거두는 것에 감사하며, 또 이웃과 음식을 나누고 잔치를 벌이는 게 전통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부하들을 보내어, 음식을 달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유명한 장군이었고, 왕의 사위라는 신분만 생각하면, 창피해서 부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함께하는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에 아주 정중하게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나발은 이 이야기를 듣고, 음식을 나누기는커녕 오히려 다윗을 무시하고 조롱했습니다. “도대체 다윗이 누구냐?”고 하며, “요즘은 종들이 모두 주인에게서 도망치는 시대가 되었다.”고도 말했습니다. 다윗을 주인에게서 도망친 종이라는 비하했습니다. 다윗이 나발의 이 반응을 듣고 참지 못 하고, 400명 군사를 데리고 공격하러 갑니다.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이 이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심각함을 깨닫고, 다윗과 군사들을 진정시킬 만한 음식을 가지고 가서 해결하게 됩니다.

 

먼저, 나발은 평생 무엇을 위해 산 사람일까요? 그렇게 엄청난 부자가 된 과정을 알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돈으로 따지면, 크게 성공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나발은 본문 2절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생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이므로” 라고 소개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부자였다는 것입니다. ‘부하다’라는 말 정도로는 부족해서 “심히 부하여”라고 소개된 것처럼, 엄청난 재물을 가졌습니다.

 

돈은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만, 그렇다고 돈이 언제나 선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언제나 좋은 면만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영향력이 큰 만큼, 우리에게는 큰 유혹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죄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돈을 모으고, 돈이 영생과 일상생활에서 유익하게 사용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더불어 돈 이외의 필요하고 좋은 것들을 갖추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그러나 나발은 이런 부분에서 철저히 무능했습니다. 돈을 모으고, 돈을 불리고, 돈을 누리는 데에는 유능했을지 모르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하고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나발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보면, 재산이 아주 많았다는 점 외의 모든 것들은 부정적인 것들뿐입니다. 심지어 자기 아내로부터도 인정을 받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집착했던 돈을 모두 쓰지도 못 하고, 충격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나발의 이 모습은, 돈만을 따라 사는 사람의 과정과 결말을 보여줍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돈에 집착하고, 돈에 휘둘려 사는 것을 보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의 결말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더 벌고, 더 갖고, 더 누리기 위해 애쓰면서도, 넉넉히 베푸는 인정도 없고, 상황을 판단할 만한 안목도 없고, 영생을 위한 아무런 대비도 없으면, 그 마지막은 예상치 못 한 때 올 것입니다. 뒤늦은 후회를 품고 순식간에 죽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두 번째 모형은, 다윗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 동안 나발의 양과 염소가 근처에 있어도 전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법과 규칙이 발달하지 못 했을 때입니다. 힘이 있으면 빼앗는 경우가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나발의 하인들과 짐승들을 잘 보호해 주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아주 잘 한 것이죠?

 

그런데 자신이 보낸 부하들을 나발이 무시하고, 조롱하자, 다윗은 즉시 400명의 군사들을 동원해 득달같이 달려왔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나발에 대한 다윗의 분노의 이유와 크기가 충분히 이해됩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을 보인 이가 다름 아닌 다윗이라는 점이 좀 의아합니다.

 

다윗이 어떤 사람입니까? 멀리서도 아니고,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이유 없이 자기를 죽이려 하는 사울 왕이 무방비로 굴속으로 들어왔을 때에도 죽이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옷자락 조금 벤 것만으로도 괴로워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자신을 무시하고, 은혜를 갚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죽이러 달려온다는 게 좀 이상합니다. 그것도 자신의 군사 2/3를 데리고 달려왔습니다. 나발이 아무리 부자여도, 군사를 수백 명씩 두지 않았을 것을 생각해 보면, 정도를 넘어선 분노라 할 수 있습니다. 그토록 철저히 절제하고, 인내했던 이전의 모습과는 크게 다릅니다.

 

1절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사무엘 선지자는 단순한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될 거라 자신에게 기름을 부었던 선지자였고,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다윗 자신이 받는 까닭모를 고난을 끝내주거나, 견딜 수 없을 만큼 지칠 때마다 위로하고 격려해 줄 사람이었습니다. 그 동안 사무엘 선지자가 살아 있었기에, 사울을 살려주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를 보면, 다윗은 믿음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 자체를 믿는 것보다는, 사무엘이라는 사람의 끈을 통해 확인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토록 의지하고, 확인했던 사무엘이 어느 날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윗의 고난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왕이 될 거라는 약속은 여전히 멀어 보입니다.

 

이 때문에 나발이라는 어리석은 사람의 도발에 절제하지 못 하고, 그 동안의 모습과는 전혀 달리 행동하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행한 일들을 보면, 사울에 비하면 나발은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 없는 다윗을 죽이려 하는 사울의 죄는 아주 크지만, 반면에 자기의 음식을 나누어 주지 않겠다는 나발의 행동을 죽을죄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 속 다윗을 통해서, 신앙인들이 쉽게 저지르는 잘못과 실수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자체를 믿지 못 하고, 도구에 불과한 사람을 보고 믿는 것입니다. 열심히 충성하고, 믿는 것 같은데, 그 뿌리가 하나님만을 향한 믿음에 있지 않고, 목회자나 능력자를 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오직 하나님만을 향해야 합니다. 목회자와 능력자가 아무리 뛰어나고, 큰일을 해낸다 하더라도,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것 자체를 봐야 하고,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믿음으로 삶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윗의 경우처럼, 어느 순간 사람의 줄이 끊기게 되었을 때, 어느새 하나님과 멀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세 번째 나오는 사람은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입니다. 이 여인에 대해서 3절에서 “그의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비가일은 완고하고 악한 나발을 남편으로 둔 여인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신약시대에도, 여성은 남성이 가진 사회적 지위에 비해 아주 낮았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훨씬 더 심했습니다. 아비가일도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위가 나발의 아내가 전부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자기 남편이 다윗이 보낸 부하들을 모욕하고 보내서, 다윗이 군사들을 데리고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히 음식을 준비하고,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 다윗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철저히 낮은 자세로 용서를 구하고, 분노로 가득 찬 다윗을 지혜로운 말로 진정시킵니다. 아비가일의 빠른 판단과 지혜가 없었다면, 아비가일뿐만 아니라, 모든 재산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또 다윗도 절제하지 못 한 것에 대해 뒤늦게 후회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28절부터 31절까지는 아비가일이 나발의 집안을 파괴하기 위해 득달같이 쫓아온 다윗을 진정시키는 내용입니다. 이 속에 아비가일의 지혜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왜 나발을 해칠 필요가 없는지를 설명하고, 또 그러면서 절마다 반복해서 “여호와”를 말하며, 다윗으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을 생각해 절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아비가일은 완고하고 어리석은 나발의 아내로 지낼 수밖에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지혜로운 언행을 통해 사람을 살리는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이후에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아비가일의 뛰어난 안목과, 사람을 살리고 유익을 주는 언행을 배워야 합니다. 아비가일이 가진 재산보다 아비가일이 가진 안목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비가일이 가진 뛰어난 외모보다 사람을 살리는 언행을 가지려 애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들인데, 외모가 어떻든 그게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도 있고,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임을 기억하며 산다면, 매순간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더 큰 복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보고 따라야 하는 모습은, 돈만 쫓다 허무하게 삶을 마친 나발과 같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보다 도구인 사람을 의지하고, 믿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오직 아비가일처럼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아는 안목이 필요하고, 사람을 살리고 유익하게 하는 지혜와 언행이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정말 중요하고 좋은 것을 향해 나아가고, 삶의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써, 아비가일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삶의 모든 과정에서 받고 누리며 사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