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10704)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시다(삼하 16장 5-14절)

청명하늘 2021. 7. 4. 13:43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시다

 

성경: 사무엘하 165-14(489)

찬송: 430(주와 같이 길 가는 것), 446(주 음성 외에는)

설교: 20210704.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2,3년 전에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조문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여러 친구를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 교회와 기독교의 앞날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왔습니다. 요즘은 전염병으로 인해, 기독교와 교회가 사회로부터 많은 질타와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당시엔 이런 문제는 없었지만, 이외의 일들로 평가와 분위기가 안 좋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려움이 더 많아지고, 위축되고, 감소될 거다. 결국 교회들이 가장 먼저 선교비를 삭감해서 현장에 나가 있는 선교사들에게도 어려움이 훨씬 커질 수밖에 없다는 데 의견이 대부분 모아졌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한 친구가 좀 격하게 반발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입을 통해 나오는 대로 행하시는 분인데, 목사들이 앞날을 좋게 보고, 좋게 말하지 못 하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친구는 먼 외국에 나가 선교 중에 있었습니다. 현장에 있고, 또 본인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인지라, 그렇게 반응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교회와 선교 현장이 어려우질 거라는 예측은 대부분 동의하는 내용입니다.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우리의 입술을 통해 고백하는 대로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고 고백하는 대로 하나님이 이루어 가신다는 생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해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나왔습니다.

 

가나안 지역을 살피라고 열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돌아온 이들의 보고는 두 가지로 갈렸습니다. 가나안 땅이 기름지고, 크고 아름다운 열매를 낸다는 데에는 의견이 같았습니다. 하지만 열 명은 그곳 사람들이 워낙 강해서, 이길 방법이 없다고 했고, 두 명만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들의 땅과 재산이 오히려 좋은 자양분이 된다고 설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가지 보고 중에서, 10명의 보고가 맞다 여깁니다. 그래서 자기들을 이끌고 온 모세와 아론을 죽이려 하고, 다른 지도자를 세워 종살이 했던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 수많은 능력과 기적을 보여주셨고,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베푸셨는데, 백성들은 끊임없이 반역하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더 이상 참지 않으시고, 백성들을 벌하십니다. 정탐하고 기다린 시간이 40일인데,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해 40년을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고, 20세 이상 백성들은 죽게 된다는 벌을 내리십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민수기 1427,28에서 말씀합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말씀을 확대 해석하고 적용합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는 말씀을 우리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이 행하신다는 뜻으로 풀이했습니다. 말하는 대로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고, 행하시니 저주와 원망과 불평을 줄여야겠죠. 당연히 좋은 말을 사용하고, 긍정적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게 확장되어 긍정의 힘이 나왔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는 말하는 대로, 선포하는 대로라는 구호입니다. 좋게 말하고, 생각하면 좋은 일이 일어나고, 말하고 선포하는 대로 이루어지니, 좋은 것만 보고, 좋게 말하는 게 믿음이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모습처럼 말합니다. 말하는 대로 되니, 좀 더 크게, 더 화려하게 말하고 선포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무엇이든 좋은 말만 하고, 무작정 크고 원대하게 말하고, 선포하는 게 좋습니까?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벌하신 까닭과 방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에 있습니까?

 

먼저, 이런 주장의 근거가 되는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는 말씀의 본뜻은 전혀 다릅니다. “너희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너희가 말한 대로 벌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백성들을 벌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수없이 체험했으면서도, 인간적인 안목을 앞세우고 하나님을 믿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벌하시는 방법이 수없이 많겠지만, 이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한 대로 벌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어떻게 했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징벌과 죽음이 아니라, 복과 은혜를 입었을까요? 무작정 잘될거다.” “다 이루어질 것이다는 등의 좋은 말을 많이 하면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보고 겪었으니, 그 믿음으로 미래를 바라보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았으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원하셨지, 여전히 하나님은 뒷전이면서도, 말만 번지르르 하는 모습을 원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노력과 반성은 전혀 없으면서, “그 땅은 우리의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와 같은 거창한 발언과 선포를 바라신 게 아닙니다.

 

좋게 말하면, 일이 잘되고,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사실 성경을 통해 주시는 믿음과는 전혀 별개의 일입니다. 이 정도 수준과 내용이라면, 신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 심지어는 가장 미개하고 천박한 미신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복을 빌어주는 축복을 아무리 많이 해도, 복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안 주시면, 축복은 빈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주도 마찬가집니다. 사람으로부터 아무리 많은 저주의 소리를 얻어들어도, 하나님의 기준에 저주할 만한 일이 아니면, 절대 저주로 임하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축복과 저주를 이야기하면서, 두 식물을 비교해 키운 이야기가 진실처럼 널리 전해졌습니다. 양파 두 개를 똑같이 준비하고, 하나에는 칭찬과 축복만 하고, 다른 하나에는 욕설과 저주와 비난만 쏟았더니, 큰 차이를 보였다고 합니다. 좋은 말만 한 양파는 튼실하고 크게 성장했고, 저주와 욕만 들은 양파는 시들하고 제대로 성장하지 못 했다는 이야깁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고, 그래서 무조건 좋은 말, 축복, 칭찬이 우리의 삶을 평안과 복으로 이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미신에 불과합니다. 진리,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검증이 필요합니다. 똑같은 실험을 수없이 반복해도,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실험은 검증 절차가 빠졌습니다. 어느 사람이 똑같은 실험을 했더니, 두 양파에서 전혀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떤 경우는 좋은 말을 많이 한 양파가 오히려 성장이 더디고 안 좋은 결과를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믿음이란 복과 저주를 결정하시는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심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람의 입술을 통해 나오는 것에 따라 복과 저주가 나뉜다 믿는 것은 미신에 불과합니다.

 

이런 부분을 감안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믿음이 얼마나 성숙했는지, 또 그런 믿음 때문에 어떻게 행동하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다윗이 아들의 반란 때문에 피난길에 올랐는데, 시므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다윗에게 온갖 저주를 쏟아냅니다. 시므이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 왕 집안사람입니다. 사울 왕의 혈육은 므비보셋 하나만 남았지만, 집안 사람들은 여전히 사울 왕가의 부흥과 재건을 기대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다윗 왕의 힘이 강할 때는, 아무 소리 하지 못 하고, 숨은 듯 조용히 지내다가, 다윗이 위기와 곤란에 빠지자 이 기회를 틈타 불만과 저주를 쏟아냅니다.

 

시므이가 다윗을 향해 쏟아낸 저주의 내용이 8절에 분명하게 기록되었습니다. 좀 쉽게 풀이된 새번역 성경에서는 네가 사울의 집안사람을 다 죽이고, 그의 나라를 차지하였으나, 이제는 주께서 그 피 값을 모두 너에게 갚으신다. 이제는 주께서 이 나라를 너의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 주셨다. 이런 형벌은 너와 같은 살인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재앙이다.”고 풀이했습니다.

 

이 발언이 얼마나 심한지, 다윗 곁에 있던 장수 하나가 시므이를 처치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오히려 분노하는 장수를 진정시키고, 시므이의 저주를 참고, 피난길을 재촉합니다.

 

여기에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저주와 억울한 험담을 들으면서도, 다윗이 참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복과 저주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복과 저주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뉜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복이 사람의 입술에서 나오는 소리에 달려 있다고 여겼다면, 다윗이 어떻게 했을까요? 그러면 시므이를 당장 해치웠겠죠. 저주라는 독이 시므이의 입술을 통해 나와 자신을 죽이고 멸망시킬 수 있다고 믿었으면, 당장 시므이를 죽여 저주를 내뱉지 못 하도록 했을 겁니다. 아니면 붙잡아 고문해서라도, 저주를 취소하고 축복과 칭찬만 하도록 했겠죠?

 

하지만 그럴 필요 없었습니다. 다윗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시므이라는 자의 입술에서 나온 소리에 따라, 저주가 자신에게 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 하는데, 뭣 하러 시므이를 처치하려 하겠습니까? 안 그래도 긴박한 피난길에 올라야 하는데, 괜히 시간과 정신적 건강을 빼앗길 필요를 느끼지 못 했습니다.

 

복과 저주를 하나님만이 결정하신다는 다윗의 믿음은 12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는 말씀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자신은 저주의 말을 들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원통함도 살피시고, 좋은 것으로 갚아주실 거라 믿었습니다.

 

요즘 많은 신앙인들마저 잘못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대로 받고, 이루어진다는 믿음과는 정반대죠? 시므이의 저주를 받았으나, 하나님으로부터 오히려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으니, 요즘 말하는 대로 되고, 선포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과는 그 차이가 너무 큽니다. 수천 년 전에 살았던 다윗이 이런 수준과 크기의 믿음이라는 점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다윗이 그토록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과 복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배울 다른 모습도 있습니다. 복과 저주는 오직 하나님만이 결정하시니, 그 누구의, 어떠한 저주와 질책도 신경쓰지 말고 살면 되는구나.’ 할 위헙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 역시 오늘 본문 속 다윗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가를 강제로 빼앗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가를 없애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사울 왕의 교만과 욕심 때문에 온갖 고난을 겪었고, 그럼에도 자기 손으로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가에 있던 사람들 중에는 시므이처럼, 다윗이 강제로 사울 왕위를 빼앗아 왕이 되었다 생각하고, 증오하며 복수할 기회를 기다리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다윗으로서는 시므이의 주장과 저주가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본문 10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는 말씀을 보면, 다윗은 이 일을 그냥 억울한 누명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일로 지나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의 행동과 삶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그 동안 왕이 되기까지, 혹 그 동안 자신도 모르게 사울 왕가를 향해 복수와 저주의 칼을 휘두르지 않았는지, 시므이가 내뱉은 저주를 받을 만한 일을 행하지 않았는지,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을 만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는지 살펴보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자신이 사울 왕가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잘못한 일이 전혀 없다면, 시므이의 저주가 날카롭게 날아들어도 참는 다윗이지만, 그러나 그런 고난마저도 삶을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비춰보는 거울로 삼을 줄 알았습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억울한 누명을 씌운다며 분노하고, 복수를 다짐하게 만드는 상황이고, 충분히 복수할 수도 있음에도, 다윗은 오히려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거울로 삼았습니다.

 

이게 억울한 누명과 저주의 비난을 들을 때 우리가 취해야 할 모습입니다. 요즘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사회의 눈총이 따갑고, 비난이 거셉니다. 이럴 때, 저들을 향해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우리의 사정과 형편을 알아달라고 하기보다는, 본문 속 다윗이 보이는 모습이 더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통해 우리를 책망하시고 경고하시는지 살피는 일입니다.

 

만약 교회가 저들의 저주와 비난받을 만한 일을 행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억울함을 아시고, 복으로 바꿔 주실 것이니, 그냥 참고, 하나님의 말씀과 방향에 따라 살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에 크게 벗어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들의 입술을 도구로 이용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일 수 있음을 알고, 지난날을 다시 돌아보고, 잘못된 것을 철저히 버리고, 더 조심하고, 더 신실하고, 더 확실하게 믿고,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대로 살려 노력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귀에 들려오는 저주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받고 살아갈 생명의 길입니다.

 

억울한 비난과 조롱과 저주를 들었음에도, 오직 하나님만이 복과 저주를 결정하신다는 주권을 철저히 인정하며, 더불어 이런 기회마저도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는 계기로 삼은 다윗처럼,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능력과 기준과 말씀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날마다 복과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