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10613)사랑에서 나오는 믿음에 이르러야(삼하 15장 13-23절)

청명하늘 2021. 6. 13. 14:38

사랑에서 나오는 믿음에 이르러야

 

성경: 사무엘하 1513-23(487)

찬송: 335(크고 놀라운 평화가), 320(나의 죄를 정케 하사)

설교: 20210613.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넘치고,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드물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승이라고 하면, 임금 바로 아래의 지위입니다. 요즘이야 개도 반려견이라는 부를 정도로, 개의 지위와 처우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습니다. 하지만 과거엔 가축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정승 집의 개가 죽었는데, 왜 문상객이 많고,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적을까요?

 

정승의 권력이 살아 있느냐, 사라지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처신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정승이 살아 있어, 힘과 영향력이 대단하면,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이용해 정승을 찾아가 만나려 합니다. 그렇게 해야 정승이 가진 권력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승 집 개라 해서 지위와 권력이 대단한 것 아니지만, 그를 빌미삼아 정승에게 얼굴 도장이라도 한 번 더 찍는 게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승이 죽으면, 정승이 가진 권력과 지위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정승이 살아 있을 때와는 영향력이 차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정승이 죽으면, 찾아오는 이가 적습니다.

 

이 말은, 자기중심적이고, 계산적인 사람들의 본색을 잘 보여줍니다. 자기에게 도움이 되면, 개의 죽음마저 슬퍼하는 척합니다. 더 이상 도움이 안 된다 싶으면, 언제든지 돌아섭니다. 정승이 살아 있고, 그 권력의 영향력이 여전하다면, 개가 아니라, 개보다 못한 것마저 슬퍼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이를 보면, 정승 집에 관심을 두고, 여러 일을 돌보는 까닭은 다름 아닌 정승의 권력 하나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승을 존경하고, 정승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순수한 생각은 전혀 없고, 오직 권력, 그리고 권력의 영향력에만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랑과 욕심의 차이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과 욕심 모두 상대에 특별한 관심을 가집니다. 할 수만 있으면 가까이합니다. 별것 아닌 일에도 넘치는 관심과 집착을 드러냅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욕심 이 두 가지를 혼동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몇 가지 점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먼저, 사랑은 상대가 목적이 됩니다. 상대가 잘되고, 상대가 평안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에 반해 욕심은 자신이 목적이 됩니다. 내가 잘되고, 내가 바라는 일들과 마음이 중심이 됩니다.

 

, 사랑은 상대가 목적이 되기 때문에, 상대가 원하는 바에 따라 살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욕심은 내가 목적이 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바에 따라 살려 노력합니다. 만일 상대가 바라는 바와 방향이 나의 것과 다르면, 언제든지 돌아서고 멀어질 준비를 합니다. 사랑은 내 바람을 버리고, 내 삶의 방향을 바꿔서라도, 상대가 원하는 대로 따르려 합니다. 욕심은 상대의 바람과 방향을 내 것에 맞추려 하고, 이게 잘 안 되면, 언제든지 돌아섭니다.

 

신앙생활의 특징과 모습을 설명하는 말들이 많이 있죠?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이라는 표현도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에도 수준과 방향과 의도를 더 분명하게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 상대에게 더 집착하고, 가까이하려는 모습처럼, 나의 욕심과 욕망과 바람을 이루고자 하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하나님을 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 수준과 방향과 내용이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생활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바라시고, 말씀하시는 믿음과 생활이라면, 오히려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마태복음 1624절 말씀처럼, 자신을 위해 주님을 향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위해 나를 바꾸고, 주님의 말씀을 위해 나의 욕심과 욕망을 거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욕심으로부터 나온 사랑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평안과 말씀은 좋아합니다. 이를 싫어하는 신앙인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으로부터 나온 믿음인지, 아니면, 욕심과 욕망을 위한 수단으로부터 나온 믿음인지는 쉽게 구별됩니다. 주님의 말씀과 방향이 부담과 고난으로 주어졌을 때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참된 믿음을 가졌다면, 주님의 말씀이 부담과 고난으로 주어졌을 때조차도 믿고 따르려 애씁니다. 하지만 내 욕심을 더 크게 채우기 위해 주님이 가진 능력과 복을 이용하는 믿음을 포장한 경우는, 주님의 말씀이 부담이 되고, 고난을 받게 되면 언제든지 돌아서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오늘 본문 속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 되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다윗의 셋째 아들인 압살롬이 헤브론에 가서 하나님께 했던 서원을 이루겠다며 허락을 받고 가서,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오늘 본문은, 압살롬의 반역 이야기를 들은 다윗이 행동한 내용들입니다.

 

자기 아들인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다윗은 곧바로 부하들에게 피해를 입기 전에 빨리 피하자며 명령했고, 가족 모두 함께하면서, 후궁 10명만 남기고 피난길에 오릅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있었고, 헤브론은 30km가량 떨어져 있으니 그리 먼 거리는 아니죠? 그래서 더욱 서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의 반역 소식을 듣자마자 성과 백성을 놔두고 피난하는 다윗의 모습이 너무 낯섭니다. 다윗이 어떤 사람입니까? 어른이 되기 전에 골리앗이라는 거인과 싸워 이겼습니다. 이후에도 숱한 전쟁을 치른 사람입니다. 전쟁의 경험과 실력이 검증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싸울 생각조차 하지 않고 피신부터 계획하고 있습니다.

 

압살롬과 함께한 군사가 많거나, 혹은 훌륭한 장수들이 많아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압살롬과 함께한 군사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다윗에게는 많은 군사들이 있었습니다. 전쟁의 경험과 능력이 많은 요압과 같은 장군들이 다윗과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싸우면 다윗 편이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대비책을 세우지도 않고, 무작정 피난부터 서두르고 있습니다.

 

다윗이 왜 이럴까요? 싸우다 질까 하는 염려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 동안 너무 편하게 지내느라 겁이 많아져서 그럴까요? 압살롬을 향한 사랑이 너무 크고, 그래서 자기 아들 압살롬과 싸우는 게 너무 싫어서일까요? 이런 이유도 어느 정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는,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는 죄를 저질렀을 때, 나단 선지자의 예언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하 1210-12절에서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고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전했습니다.

 

다윗은 믿음으로 산 사람입니다. 다윗의 삶은 확실한 믿음을 기반으로 세워졌습니다. 비록 욕심과 욕정에 눈이 멀어,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러나 그 본바탕만은 하나님과 말씀을 확신한 사람입니다.

 

이 믿음이 얼마나 확실한지, 심지어는 자기에게 재앙과 고난과 부끄러움으로 다가올 때마저도 다윗은 이를 그대로 믿고 따랐습니다. 자신이 밧세바와 간음하며, 그 남편마저 죽게 했을 때,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거라는 말씀, 그 징계가 차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임에도, 그 일이 언젠가 자신에게 임할 것임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 때문에, 반역 소식을 듣자마자, 지금이 하나님의 말씀하신 징계임을 알았습니다. 약속된 하나님의 징계로 임했으니, 이를 인정하고, 고난을 감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싸우려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고, 부끄럽고 참담한 모습으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다윗이 반역을 일으킨 압살롬의 세력과 싸우지 않은 두 번째 까닭은, 예루살렘 도성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다윗이 성에 남아서, 싸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윗 쪽에 있는 군사는 전쟁의 경험이 충분합니다. 이에 반해 압살롬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어냈습니다. 양쪽 모두 장단점이 분명했습니다. 이런 상황이면 싸움이 어려워지고, 길어지고, 그만큼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남아서 반역세력과 맞서 싸우지 않고, 곧바로 피난길에 오른 까닭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이 여기저기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칠 수밖에 없습니다. 왕과 그 아들이 맞서 싸우는데, 그에 따라 가족끼리 죽고 죽이는 처참한 일들이 수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친구와 이웃끼리 서로 적이 되어, 칼과 창을 휘두르는 비극이 일어납니다. 다윗은 백성들이 죽고 다치고, 성이 무너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왕위를 유지하는 대신, 많은 백성이 다치고, 죽고, 서로 척을 져야 한다면, 차라리 궁을 버리고 도망해야 하는 부끄러움을 자신이 감내하고자 하는 마음이 다윗에게 가득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과 백성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체면과 지위와 권력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이를 위해 기꺼이 피난을 감수할 만큼 대단했습니다.

 

반역 소식을 듣고, 싸움과 예루살렘 성을 포기하는 이 과정을 보면, 다윗의 믿음이 왜 대단한지, 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많은 복을 주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과 평안을 기대하며 산 사람이지만, 그러나 이보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더 대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을 움켜잡고, 이를 통해 자신이 더 누리고자 하는 욕심보다, 사명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 욕심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말 그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준에 다다랐습니다.

 

만약 다윗이 자기 욕심과 바람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는 사람이었다면, 고난과 아픔으로 다가올 때는 더 이상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돌아서고 말았을 것입니다. 누가 다치고, 죽든지,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자기의 왕위가 굳건하고, 자신이 더 편히, 많이 누리는 일에만 관심을 두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이 모습을 통해, 우리의 생각과 믿음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이라 하면, ‘꼭 그렇게 될 거라는 마음이나 그런 마음으로 버티는 힘의 크기만 생각합니다. 이를 대단한 믿음이라 여깁니다. 이런 믿음도 필요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믿음입니다. 내 뜻과 계획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가진 능력을 이용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나온 믿음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 하나님의 것을 먼저 생각하는 믿음이 참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갖는 믿음은 선택과 기준에서 달리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고난과 징계, 혹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루어질 때조차 인정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는 요한계시록 210절 말씀처럼, 약속이 고난과 징계와 희생으로 주어질 때조차도, 인정하며 따르며 순종하는 이에게 생명과 복이 약속되었습니다.

 

사랑과 욕심 모두 상대에 특별한 관심을 갖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가까이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믿음이 욕심으로부터 나온 것인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온 것인지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상대가 목적이 되고, 자신은 수단이 되는 것마저 감수한다는 점에서 욕심과 차이를 보이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를 앞세우며, 이를 위해 내가 이용되고, 희생되는 것마저 감수할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온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내 계획과 뜻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이용한다면, 욕심으로부터 나온 집착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내가 목적이 되고, 내 욕심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수준이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평안과 복이 약속된 믿음에 이르지 못 합니다.

 

다윗은 인간적인 실수를 적지 않게 지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순전하고, 높은 수준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다윗의 후손을 통해 예수님이 태어나는 복과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헌신할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 때문에 성공과 평안으로 주어진다는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순종한 게 아니고, 징계와 고난으로 주어질 약속마저 믿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복을 통해 자신이 더 누리고, 갖는 데에 마음을 팔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다윗 같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가진 능력과 복을 욕심내는 수준에 멈추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도에 이르러야 합니다. 하나님이 목적이 되고, 우리는 도구임을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이루어져도, 심지어는 정반대로 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인정하며 살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인정하시고, 더 큰 복을 내려 주십니다.

 

다윗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바라시고, 인정하실 만한 수준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고, 따름으로써, 어려움을 극복하고 더 큰 사랑과 복을 받은 다윗처럼,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넘치는 복과 은혜를 누리며 사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