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10530)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삼하 14장 25-33절)

청명하늘 2021. 5. 30. 13:50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성경: 사무엘하 1425-33(485)

찬송: 428(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293(주의 사랑 비칠 때에)

설교: 20210530.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동계올림픽 종목들 중에 피겨스케이팅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큰 인기를 끌지 못 했다가, 김연아 선수가 등장해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부터 큰 관심과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미국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예전부터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특히 여자 피겨스케이팅의 인기는 다른 종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인기가 한 순간에 주저앉게 된 사건이 있습니다.

 

1994년 당시 미국 국가대표 선수들 중에서 두 선수가 좋은 성적을 냈습니다. 그런데 올림픽대표를 뽑는 경기를 앞두고, 한 선수가 괴한으로부터 습격을 당해서 국가대표를 뽑는 경기를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선수가 부상이나 다른 사정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부상을 당해 경기를 포기하는 일도 놀라운 일이죠? 더 충격적인 사실은, 부상을 입힌 사람들이 다른 선수 쪽에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조사 결과는 이렇습니다. 한 선수가 그 동안 가장 잘 하고, 그만큼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기보다 뛰어난 선수가 등장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과 칭찬이 상대 선수에게 쏠리자, 이를 참지 못 했습니다. 실력으로 이기면 되는데, 실력으로는 이길 수 없고, 인기는 더 많이 누리고 싶으니, 결국 최후의 방법을 사용합니다. 자기보다 뛰어난 선수가 경기를 못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운동 경기에는 상대를 이기려는 목표가 있습니다. 싸움도 마찬가집니다. 지기 위해서 싸우는 경우는 없죠? 그럼에도 경쟁이 싸움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정당당함과 상대에 대한 존중이라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경쟁은 정해진 규칙 안에서 정정당당하게 겨루며, 승리가 목표지 상대를 해치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싸움은 이기려는 목적에서는 같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기기 위해 상대를 해치기도 하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더 많은 인기와 사랑을 받기 위해서, 상대 선수에게 위해를 가한 선수는 운동으로 경쟁한 게 아니고, 운동으로 싸움을 벌인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운동선수가 정정당당한 경쟁이 아니라, 싸움을 벌였으니, 그 끝은 성공이 될 수 없습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상대 선수를 해친 선수는 이후에 선수 자격이 박탈되었습니다. 선수생활을 할 수 없으니, 이후엔 돈을 벌기 위해 권투를 하거나 격투기 시합까지 해야 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욕심에, 경쟁자를 해치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런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를 만한 능력과 자격은 없으면서도, 자신이 누리고 있는 자리에 감사하지 못 하고,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리다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모습이 너무 어리석어 보이죠? 그런데 이런 못된 습성이 이 선수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사탄이 인간에게 심어놓은 못된 본성으로 우리 모두의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지내고 있었죠?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곳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가장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살 모든 조건과 환경을 완성하신 후에야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부족하거나 불편한 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때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합니다. 하나님께서, 먹으면 죽는다고 절대 먹지 말라고 하신 열매를 먹으라 합니다. 그리고 하와가 먹고, 아담에게도 줘서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것도 큰 죄입니다. 그러나 유혹에 넘어간 이유가 더 큰 문제이고 죄입니다. 그 열매만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거라는 미끼를 던졌고, 아담과 하와는 거기에 넘어갔습니다. 이때부터, 능력과 실력은 터무니없으면서도 최고의 자리에 있고자 하는 본성을 모든 사람이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습성은 사탄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탄은 본래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장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천사, 그것도 우두머리 천사라면, 얼마나 대단한 자리입니까? 그런데 그 수준에 만족하지 못 하고,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심에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고, 이에 성공한 후 지금까지 우리를 똑같은 방법으로 유혹합니다. 각자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라고 합니다. 모든 일을 자기중심으로 판단하라 합니다. 지금 이 순간과 이 수준에 만족하지 말고, 더 높은 자리, 더 부하고 누릴 만한 삶이 있다며, 욕심과 욕망에 따라 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사탄의 유혹과 정반대입니다. 세상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니, 각자 주인노릇 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안에서 살라고 말씀합니다. 불편하고 어려운 일들이 분명 있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감사하고,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계산으로는, 원하는 것들을 갖고, 하는 일들이 잘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감사와 기쁨이 생길 것 같은데, 오히려 만족과 감사가 먼저라고 말씀합니다. 욕심의 그릇을 맘껏 키우고, 이를 채울수록 우리의 만족과 감사가 커질 것 같은데, 하나님의 말씀은 욕심의 그릇을 줄여,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만으로, 또 살아 있음 자체만으로 만족하라 말씀합니다.

 

이 땅에서 여러 어렵고 험한 일들을 겪느라, 우리로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서 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누구의 말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압살롬을 통해서도 욕심의 그릇을 키울수록 행복하다는 사탄의 유혹이 틀렸고, 작은 것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맞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앞에서, 다윗의 자녀들 사이에 여러 문제가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먼저는, 암논이 이복누이인 다말을 범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 때문에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자기 외가가 있는 다른 나라로 피신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다윗도 압살롬을 보고 싶어 합니다. 국방장관인 요압이 이를 알고, 한 여인을 내세워 연극을 해서, 다윗이 압살롬을 이스라엘 땅으로 불러들이도록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자기 형제를 죽인 죄 때문에, 다윗은 압살롬이 왕궁에 오거나,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까지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2년이 지나자, 잠잠하던 압살롬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먼저 중간에서 자리를 놓아준 요압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요압도 압살롬의 속셈을 훤히 알고, 또 자신의 입장이 곤란해질 것을 염려해 거부합니다. 그러자 압살롬이 자기 밭 근처에 있는 요압의 밭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 때문에 요압이 압살롬에게 항의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압살롬은 자기 계획대로 2년 동안이나 아버지 다윗 왕을 만나지 못 한 일을 항의해서, 다윗과 압살롬이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이처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앞서, 25-27절까지 압살롬의 외모와 형편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압살롬의 외모는 흠잡을 데 하나 없을 만큼 완벽했습니다. 머리는 얼마나 무성한지, 1년에 한 번 머리를 깎는데, 무게가 2kg이 넘었습니다. 당시는 머리와 수염이 위엄과 영광을 상징했기 때문에, 압살롬을 보는 사람마다 외모에 반할 정도였습니다. 또 자녀 넷을 낳았는데, 그 중에서도 다말이라는 딸이 무척 예뻤습니다. 다말이라는 이름은, 압살롬 누이의 이름이기도 한데, 아마 외모가 예뻐서 자기 딸에게도 같은 이름을 붙여주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멋진 외모에다, 예쁜 자녀를 넷이나 두었으면,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하죠? 게다가 압살롬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아들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니, 압살롬은 이스라엘의 왕자입니다. 순서로 보면, 세 번째지만, 첫째 왕세자인 암논을 죽였으니, 그 위로는 형 하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남은 형 아비가일의 특별한 언행이 기록되지 않은 것을 보면, 정치와 왕위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점들을 보면, 압살롬은 갖지 못 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외모도 특출났고, 자녀도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또 왕자로서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대우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잘되면, 아버지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정도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야 맞는 것 아닌가요? 더 이상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 아닙니까? 그런데도 압살롬은 거기에 만족하지 못 하고, 불만과 불평만 쏟아냅니다. 외가로 피신해 3년 있다가 겨우 이스라엘로 돌아왔지만, 2년이 지나도록 자기 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못 봤다고 요압을 압박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압살롬의 얼굴을 못 본 까닭이 무엇인가요? 압살롬 자신의 죄 때문입니다. 자기 친여동생을 범했다는 이유로, 2년을 준비해서 암논을 살해했습니다. 그런데도 고국으로 돌아와 2년 동안 자기 아버지 얼굴을 못 봤다며, 불만을 드러냅니다. 드러낸 정도가 아니라, 요압이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해주지 않고 피한다며, 요압의 밭에 불을 질러 오게 만들었습니다.

 

요압에게 불만을 쏟아내며, 차라리 피신해 있던 곳에서 돌아오지 않은 게 나았을 거라고 말합니다. 외가지만 3년이라면, 압살롬으로서도 마냥 편할 수는 없죠. 하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왕자이고, 서열로도 몇 손가락 안에 들기에, 편하고 좋은 것을 얼마든지 누릴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국방장관의 밭에 불을 내도 괜찮을 만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보면, 압살롬의 됨됨이가 어땠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가지고 누리는 것에 감사하기보다, 더 갖지 못 하고, 누리지 못 하는 것들을 들어 불만과 불평만 쏟아냅니다. 지금 갖고 누리는 것이 얼마나 크고 좋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고, 당연히 감사할 줄도 모릅니다.

 

왕자가 아니었다면, 압살롬은 사형을 당해 마땅합니다.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2년을 준비해서, 다른 형제들 앞에서 살해했습니다. 압살롬이 왕의 아들이 아니라, 일반 사람이었다면, 사형을 당해 마땅하죠? 그런데도 압살롬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3년 동안 피신했고, 돌아와서 아버지 얼굴을 못 보는 것 외에는 이전처럼 여전히 누리고 즐길 수 있습니다.

 

압살롬이 정말 아버지의 용서를 받고,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형제를 살인하고 도망한 압살롬이 아들이라며 보고 싶어 하고, 들어오도록 허락한 다윗이라면, 용서를 구했을 때 당연히 받아들였겠죠. 하지만 압살롬은 그러한 노력은 전혀 기울이지 않고, 불평과 불만만 쏟아냅니다. 자기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고, 남에게 피해 주는 일까지 서슴지 않고 저지릅니다.

 

이처럼 가지고 누리는 것들에 기뻐하고, 감사하기보다는, 갖지 못 한 것들, 더 누리지 못 하는 것들만을 들어 불만과 불평을 쏟아내는 압살롬은 사탄의 특징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세상에 압살롬만큼 태어나면서부터 모두 갖춘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평생 애써도 하나 얻기도 힘든 것들을, 압살롬은 태어나면서부터 선물로 모두 받았습니다. 인물과 재물과 지위와 명예와 자녀의 복까지 다 갖추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압살롬은 조금 덜 가진 것들을 더 갖기 원하고, 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의 이런 본성은 오늘 본문 뒤에서 그대로 드러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돌리고,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이 서자 반역을 일으킵니다. 아버지 다윗이 왕인데, 반역을 일으켰으니, 결국 자기 아버지를 향해 창과 칼을 들이대는 일이었습니다.

 

압살롬의 이런 모습을 보면, 만족과 감사는 조건과 상황에 따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압살롬처럼 모든 것을 갖춘 사람도 여전히 불평과 불만 가득 차 살아간다면, 그 누가 더 갖추고, 더 가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 중에 그 누가 압살롬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누릴 수 있겠습니까? 아니, 더 정확히는 압살롬이 누린 것들 중에 단 한 가지만이라도 그만큼만이라도 가질 수 있겠습니까? 평범한 우리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욕심의 그릇을 조금씩 줄여가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이 즐거울 리 없지만, 그러나 고된 훈련을 통해, 우리는 작은 것에도 감사할 만한 사람이 됩니다. 남이 보기엔 우스울 만한 것들에도 기뻐할 만한 사람이 됩니다. 이게 같은 여건에서 살면서도,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큰 것들을 허락하실 만한 자녀의 모습입니다. 더 복되고 기쁜 삶을 살아갈 만한 길입니다.

 

지금 호흡할 수 있는 것, 지금 말하고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생각할 것을 생각하고, 잊을 것을 잊을 수 있다는 것마저도, 여기저기 아프고, 여러 고민과 어려움이 있어도, 그럼에도 지금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도, 결코 사소하거나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면, 이런 것들을 잃고서야, 비로소 당연하게 여긴 일들이 사실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면, 당연한 일이 없고, 감사와 기쁨이 더욱 커지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지역만이 아니라, 전국 모두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는 다른 어느 곳보다 안전한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어려움은 있고, 아픔도 있겠지만, 그러나 욕심의 그릇을 조금씩 줄이고, 감사와 기쁨의 폭을 늘려 가면, 더 풍성하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가졌어도, 여전히 사탄의 유혹에 따라,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 가운데 살았던 압살롬의 어리석은 모습을 기억하고, 가진 것이 조금 적어도, 원하는 수준에 다다르지 않더라도, 감사의 훈련을 통해, 감사할 줄 아는 자녀가 되시고, 이를 통해, 작은 것에 감사하고 충성한 자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와 사랑과 복을 날마다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