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20109)‘신앙’ 그리고 ‘생활’(왕상 2장 1-9절)

청명하늘 2022. 1. 9. 14:09

신앙그리고 생활

 

성경: 열왕기상 21-9(511)

찬송: 428(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539(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설교: 20220109.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우리나라 기독교가 보이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기도원 문화입니다. 점차 크기와 횟수가 줄고 있긴 하지만, 20-30년 전만 해도 기도원마다 최고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국 곳곳에 기도원이 있었고, 수많은 집회가 치러졌습니다. 또 집회마다 전국에서 몰려든 수많은 교인들로 가득했습니다.

 

돌아보면 이때가 우리나라 기독교가 가장 크게 성장한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원 때문에 교회가 성장했는지, 반대로 교회가 성장해서 기도원 집회마저 커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둘 사이엔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큰 영향을 주고받아 성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한국 기독교에 큰 영향을 주었던 기도원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기도원에 참여하는 교인들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줄었고, 그만큼 집회의 횟수도 크게 줄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저 나름으로는 크게 두 가지로 봅니다. 하나는, 은사 자체를 목적과 목표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오늘 본문과 연결해 볼 문제인데, 신앙인들이 세상에 나가 살도록 회복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고, 기도원 자체를 향한 집회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집착하는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열매와 다른 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는 신앙인들의 의무이자 목표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만 하나님이 그 믿음을 인정하십니다.

 

열매를 얻기 위해 심은 나무가 몇 년째 열매를 맺지 못 하면 어떻게 될까요? 보고 즐기는 자체를 목적으로 심고 가꾸는 나무는 괜찮지만, 열매를 얻기 위해 심은 나무가 아무것도 맺지 못 하면 주인은 싫어합니다. 상황에 따라, 주인이 참고 기다려 줄 수는 있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맺지 못 하면 결국 베어버립니다. 유실수를 심는 목적은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9가지 열매는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9가지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삶의 여정들을 통해 이를 맺는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지금은 참고 기다리시지만, 그러나 끝까지 변화가 없다면, 결국 외면하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21절에 주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목표도 아니고, 목적도 아닙니다. 은사의 유일한 목적은, 고린도전서 127절의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처럼,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기도원은 은사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은사를 받아야만, 믿음과 구원의 약속을 받은 것처럼 집중했습니다. 성령의 열매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은사에 대한 관심에 집중했습니다. 요즘은 기독교 신문끼리 서로 합의해서, 집회 광고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기독교 신문을 보면, 지면의 절반 이상이 집회 광고였고, 그 많은 집회들이 내세운 목표는 모두가 은사들뿐이었습니다.

 

기도원이 신앙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나, 이제는 많은 힘을 잃게 된 두 번째 이유는, 참석자들에게 기도원 중심으로 신앙 생활하도록 이끌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도원을 가서, 문제와 고민에 대한 답을 얻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믿음과 답을 가지고 나와서, 일상 속에서 그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기도원의 목적은 그 안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나아갈 만한 힘과 답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기도원에 갈수록, 자주 갈수록, 어느새 기도원 안이 목적이 되고 맙니다. 더러운 세상에 나가서, 물들고 사는 것보다, 기도원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고민 없이 사는 게 좋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기도원은 절대 목적지가 아닙니다. 목적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원은 병원과 같습니다. 살다가 다치고 병들면 병원에 입원하죠. 입원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병이 낫고, 건강해져서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병원에 계속 입원해 있기 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몸이 아프고 힘들어서가 아니라, 그곳이 익숙해지다 못해 편해졌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주고, 1년 내내 추우면 따뜻하게 해주고, 더우면 시원하게 해주니, 그곳을 아예 터전으로 삼으려 합니다. 오죽했으면 일정 기간 입원하지 못 하도록 법으로 정하고 막아놨겠습니까?

 

이런 점은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교회는 신앙생활의 목표도 아니고, 목적지도 아닙니다. 교회에 모여 예배하고, 신앙 교육을 하는 까닭은, 교회 안에서만, 교인끼리만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듣고, 또 교육을 통해 가르침을 받아, 밖으로 나가 그에 따라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오늘 본문 속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제 나이가 많아 죽음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유언은 어느 시대 누구나 가장 진지하게 받아들이죠. 삶을 마감하기 전에 남기는 뜻인지라, 그 속에는 평생 살아오면서 겪고, 느끼며, 만들어 놓은 삶의 여러 지혜가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 누구보다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그만큼 보통 사람이 갖지 못 한 특출한 지혜와 안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어려운 형편에도 처했고, 가장 풍성한 수준에도 처했으니, 자녀에게 남기고픈 말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다윗은 솔로몬에게 가장 먼저 본문 3,4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명령과 계명을 잘 지켜 행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윗 자신의 삶 속에서 이것만큼 확실하고 분명한 길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복과 은혜를 받았는데, 비결은 한 가지였습니다. 최선을 다해 말씀과 계명을 지키고 행하는 방법입니다.

 

다윗의 유언이 여기에서 끝났다면, 하나님의 약속과 계명만 잘 지켜 살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요압과 바르실래, 시므이 세 사람에 대한 처우까지 덧붙여 당부합니다. 이들은 모두 다윗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요압은 다윗의 조카인데, 군사령관으로서 중요한 역할들을 많이 해냈습니다. 다윗의 세력이 약했을 때, 또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할 때도 다윗과 함께했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동시에 다윗의 명령을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하는 모습도 몇 차례 보였습니다. 두 편으로 갈린 이스라엘이 통합을 앞두고 있을 때, 상대 진영의 군사령관을 두 차례나 살해했습니다. 또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가 반역을 준비할 때도, 반역 세력에 가담했습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달아날 때, 시므이는 다윗에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벌하신다며 모욕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왕에 올랐음에도, 사울 친족인 시므이는 자기 멋대로 해석하며 저주했습니다.

 

다윗에게 아픔을 준 두 사람과는 달리 바르실래는 다윗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할 때, 워낙 긴박한 상황이라,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 했습니다. 자기 아들의 반역을 피해 도망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절망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바르실래는 다윗과 함께한 군사들이 먹고 생활할 만한 필수품들을 챙겨 가져왔습니다. 왕이지만 군사도 얼마 안 되고, 아들을 피해 도망해야 하는 입장이라, 그 누구도 쉽게 나서서 맞이하지 못 할 때, 바르실래만은 계산하지 않고 다윗을 섬겼습니다.

 

다윗으로서도 이때 바르실래가 얼마나 고마운지, 바르실래가 가져온 물품들을 사무엘하서 1728-29절에서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여기에서 다윗이 이 세 사람을 행적에 따라 처우하라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요압과 시므이에 대한 미움이 크고, 바르실래에게는 감사한 마음이 컸기 때문일까요?

 

물론 이도 한 가지 이유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때도 아니고, 인생의 가장 중요한 말을 최대한 축소해야 할 때라는 점을 감안하면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약속된 복과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과는 연결고리를 찾기 쉽지 않습니다.

 

만약 다윗이 3,4절만 유언으로 남기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말씀과 계명을 잘 지켜 살라는 말만 유언으로 남기면, 솔로몬은 자칫 믿음은 있는데, 생활이 없는 왕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하고, 계명과 율법을 연구하는 일에만 집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좋은 왕이 되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왕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성경을 연구하는 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법과 질서에 따라 나라를 이끌고, 공평하게 처리하고 이끄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제사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일은 전문가들이 해야 하고, 왕으로서 할 일은 이와 다릅니다.

 

다윗이 유언하면서, 세 사람의 행적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그에 따라 어떻게 처우할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그에 따라 복을 받는 사람은 세상 밖에 머물며, 다음 세상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과 동떨어진 채, 구원과 영생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신앙만 있고, 생활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준과 약속을 신앙으로 가지고, 그에 따라 삶을 만들어가는, 말 그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과 약속을 잘 지키며 행하라는 유언만 들으면, 솔로몬 자칫 믿음만 신경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왕으로서 해야 할 일에는 관심이 없고, 제사장이 할 일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율법과 계명을 지킨다는 게 무엇인지를 세 사람의 실제 사례를 통해 이야기해 줍니다. 왕으로서, 그들의 행위에 따라, 상과 벌을 정하고, 행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무시하고, 왕을 무시하고, 저주한 요압과 시므이는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자기 유·불리에 따르지 않고,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에 따라 세워진 왕을 인정하고, 힘써 섬긴 바르실래는 보상을 받아 마땅합니다. 다윗 자신은 형편상 이를 마무리하지 못 했기에,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따라 이들을 처우하도록 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죠. 이는 엄밀히 따지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기준을 배웁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무엇을 싫어하시는지를 배웁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지, 어떻게 살면 벌을 내리시는지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을 간략하게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우리가 영원히 거하고, 진리와 목표로 삼아야 할 곳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듣고, 배우는 이유도 아닙니다. 교회에서 듣고, 보고, 읽고, 깨달은 사실을 우리들의 삶 속에서 기억하며, 실천하며 사는 게 목표입니다. 이 둘이 합해져야만 비로소 신앙생활이 됩니다.

 

다윗이 유언이라는 가장 진솔한 이야기, 농축된 이야기로 솔로몬과 자손에게, 또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음으로 간직하며, 그 기준에 따라 삶으로 풀어가는 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삶에 적용하며 실제 행하며 사는 모습이어야만 비로소 신앙생활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만 있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끼리만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지금 우리가 딛고 사는 이 세상을 등진 채, 다음 세상만을 바라보며 사는 모습도 원하시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듣고 보고 배우는 삶의 기준을, 각자의 가정과 삶의 터전에서 적용하기를 원하십니다. 함께 마주하며, 함께하는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이 길이 하나님의 영원하고, 변치 않는 진리고, 우리와 후손까지 영원히 복과 평안과 은혜를 누리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다윗은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복이 약속된 길을 유언으로 남깁니다. 더불어 어떻게 적용하며 살아야 하는지 더 구체적으로 실례를 들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다윗이 간절하게 유언으로 남기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기억하며, 이를 삶으로 옮겨 실천하는 모습을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사실을 마음에 기억하고, 이에 따라 행하며 삶으로써,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복과 평안을 누리며, 후손들에게까지도 전하는 주의 백성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