튼튼한 터전 위에 삶을 세워야
성경: 열왕기상 2장 10-25절(구 512쪽)
찬송: 382장(너 근심 걱정 말아라), 204장(주의 말씀 듣고서)
설교: 20220116.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지난주에 광주에서 건축 중이던 아파트의 외벽이 무너져 내리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고로 현장에서 일하던 6명이 실종되었고, 한 겨울이라 시간이 급한데, 붕괴 위험 때문에 수색과 구조 작업조차 제대로 못 하고 있습니다.
건축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요? 건축물의 크기나 용도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안전이 가장 중요합니다. 건축 중에도 안전이 가장 먼저고, 건물이 완성된 이후에도 그 무엇보다 안전이 중요합니다. 작은 창고처럼 막 지을 수 있는 건물조차도, 건축 중이나 이후에 무너지면 안 됩니다. 무너질 바에야 차라리 짓지 않는 게 낫습니다.
사람이 들어가 생활하는 주거 시설에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사람이 들어가 사는 건물에서는 특별하다 할 만큼, 그 무엇보다 안전이 중요합니다. 건축 과정에서도 사고 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완성된 이후에도 그 어떤 사고도 일어나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한 부분이 무너진 건물은 아파트입니다. 완성되면 그 안에서 수백 명이 쉬고, 자고, 생활해야 하는 공간입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실수와 부실공사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 공사를 맡아 담당하는 기업입니다. 작년 6월에 광주에서 철거 중 건물이 붕괴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건물이 붕괴되면서 도로에 다니던 버스와 자동차 등을 덮쳐 9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때 철거 사업을 받아 다른 회사에 하청을 준 곳이 이번에 붕괴된 아파트를 세우는 건축사입니다. 당시 기업의 총수가 나와 사과까지 했는데, 채 1년이 안 돼 다시 대형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건물은 크고 높을수록 짓기 어렵죠. 작은 건물은 어느 정도 경력과 지식이 있으면 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파트처럼 높고 큰 건물은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웬만해서는 지을 수 없고, 또 지어도 안 됩니다. 감당할 수 있는 재정도 문제지만, 특별히 안전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십 층의 건물을 지을 수 있을 만큼 기술과 자격을 갖춘 기업이, 1년이 채 안 돼 두 번 연속 대형사고를 일으킨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주당 근로시간이 52시간으로 제한되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아마, 특정 대통령 후보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의 의견이든지, 아니면 이를 지지하기 위해 기자가 지어낸 말일 듯합니다. 완공 기일을 맞추기 위해 서둘렀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완공 기일까지 공사를 마무리하지 못 하면, 기업의 손해가 매일 5,000만원 발생한다고 합니다. 공사가 늦어지면, 아파트를 지어 얻어야 하는 기업의 이익이 그만큼 줄어들고, 더 심해지면 아예 손해를 입게 되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일까지 공사를 마치려 한다는 의견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시간과 기다림이 필요한 공정이 있습니다. 콘크리트가 굳으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기온이 낮은 때는 특히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지금이 연중 가장 추울 때라는 점을 감안하면, 시공사는 이 시간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콘크리트가 완전히 굳어 단단해질 때까지 기다리면, 매일 수천 만 원의 이익이 줄고, 손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계산 때문입니다.
결국 이 기업의 유일한 목적은 돈이었습니다. 돈을 아끼기 위해, 철거하며 반드시 지켜야 하는 지침과 절차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주당 52시간 이상 일을 시킬 수 있어야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견도 마찬가집니다. 매일 5천 만 원의 손해와 이익 사이에서, 이익을 위해 충분히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목적인 돈을 위해 마땅히 지켜야 하는 과정과 법규와 안전까지 버렸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번에 일부 붕괴된 아파트는 조사 후 안전이 보장되지 못 하면, 철거 후 다시 지어야 합니다. 광주광역시에서는 이 건축사가 건설 중인 모든 작업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또 이 기업과 건축을 준비 중이던 곳들이 보류하거나, 계약을 해지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 기업이 가진 주식의 가치도 크게 떨어졌습니다. 몇 억 원의 돈을 아끼려다, 수천 억, 혹은 그 이상의 손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자선사업이 아닌 이상, 기업은 당연히 이익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수익이 안전과 의무에 앞서면 안 됩니다. 안전과 의무마저 뒤로한 채 수익만을 위하면, 건물은 무너지고, 기업은 흔들리게 됩니다. 잘못된 기준을 삼은 결과가 어떠한지를 이 건축사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 삶을 만들고, 세워 가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집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과 내용이 크게 달라집니다. 좋은 기준을 세우고, 그 위에 삶을 하나씩 세워 나아가면, 안정되고 부흥하고 풍성해집니다. 반대로, 어리석게 욕심으로 기준 삼고, 그 위에 삶을 세워 가면, 수고와 노력이 클수록 오히려 빨리 무너지고, 망가집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는 두 사람의 삶이 대조되어 드러나고 있습니다. 솔로몬과 아도니야입니다. 이 둘은 다윗의 아들들이고, 이복형제입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서, 큰 업적을 쌓은 다윗이 나이 들어 죽고, ‘지혜의 왕’으로 유명한 솔로몬이 뒤를 이었습니다. 이를 본문 12절에서 “솔로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왕위에 앉으니 그의 나라가 심히 견고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간의 서열로 보면, 솔로몬보다 위인 아도니야의 결국은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매 그가 아도니야를 쳐서 죽였더라”는 말씀처럼 죽음을 맞이합니다.
아버지 다윗 왕의 죽음이라는 똑같은 상황을 맞아, 솔로몬은 나라를 크게 강하고 만든 반면, 아도니야는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왜 같은 상황에서, 한 사람은 더 잘되고, 성공하는데, 다른 한 사람은 정반대로 실패하고 죽게 되었습니까? 무엇이 이 둘을 정반대로 이끌었을까요?
먼저, 본문 12절 “솔로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왕위에 앉으니”라는 말씀에서, 솔로몬이 자기 아버지 다윗의 삶을 기준 삶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정의 여덟 번째 아들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삶을 만들어 갔습니다. 죄가 없음에도, 왕에게 미움을 받고, 죽음의 위협을 계속 받는 중에도, 하나님의 뜻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이 믿음으로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둘로 나뉘어, 다윗은 헤브론을 중심으로, 나라의 1/6만 다스려야 하는 중에도,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모습은 변치 않았습니다. 이 믿음과 기준을 통해, 결국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었고, 헤브론에서의 재위 기간을 포함하면, 40년 동안 왕으로서 다스렸습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이런 믿음을 기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인정해 주시고, 40년 동안 왕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알았고, 그 기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다윗의 믿음을 보시고, 엄청난 복을 주신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믿음과 기준을 보시고, 복을 주셨고, 이로 인해 나라가 안정되고, 확고해졌습니다.
아도니야는 이 점에서 달랐습니다. 아버지 다윗이 살았을 때, 아도니야는 스스로 왕이 된다며 자랑했고, 왕처럼 많은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또 직접 왕에 오르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주요 인사들과 형제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다윗이 솔로몬을 왕에 앉히자, 아도니야와 함께한 모든 사람들은 살기 위해 도망했습니다. 아도니야도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행동에 따라 결정하겠다며, 죽이지 않고 집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그 사이에 다윗이 죽고, 솔로몬의 왕권은 더 강해지고, 나라는 확고히 서 가게 되었습니다.
이 중에 그 동안 집에서 머물렀던 아도니야가 갑자기 엉뚱한 행동을 벌입니다. 왕의 친어머니인 밧세바를 찾아가,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달라고 요청합니다. 아비삭은, 다윗이 나이 들어 몸이 차가워지자, 따뜻하게 하도록 들인 젊은 여자입니다. 비록 다윗이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관계로 보면, 다윗의 첩이고, 아도니야에게는 서모라 할 수 있습니다.
아도니야가 갑자기 아버지의 첩인 아비삭을 아내로 달라고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문화에서는, 앞선 왕의 아내나 첩을 차지함으로써, 왕으로서의 지위와 권위를 선포하곤 했습니다. 아도니야도 이를 의도했습니다. 아버지의 첩을 차지함으로써, 왕위가 본래 자기 자리였다고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이는 본문 15절 “그가 이르되 당신도 아시는 바이거니와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라는 말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또 본문 앞장 1장 5절 “그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라는 기록에서도 확인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아도니야는 당시 관습과 욕심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형제들 사이에서 장남에게 큰 권리와 재산이 주어지고, 순서로 봐도 솔로몬보다 자신이 위입니다. 아버지를 이어 자신이 왕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생각과 기준을 가졌습니다.
아도니야가 바른 기준을 가지고, 상황을 제대로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조심’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죽을힘을 다해 자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도니야는 잘못된 기준을 가졌고, 욕심에 눈이 멀어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벌입니다.
아도니야의 말과 요구를 전해들은 솔로몬은 더 이상 참지 못 하고, 당장 부하를 보내 아도니야를 죽였습니다. 스스로 왕이라는 생각을 가졌고, 죽음의 위기를 넘긴 후에도, 여전히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으니, 살려 두어 봤자 문제만 커지고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아도니야의 모습을 보면, ‘죽고 싶으면 무슨 짓을 못 하겠나?’는 말이 떠오를 만큼, 어리석은 선택과 행동이었습니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어떻게 해야 선택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깨달아야 함에도, 그렇지 못 했습니다. 왕위가 자기 것이라 생각하는 판단도 어리석었고, 이를 드러내는 방식도 죽어 마땅할 만큼 나빴습니다.
솔로몬과 아도니야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아버지 다윗의 죽음이라는 같은 상황에서, 한 사람은 더 잘되고, 유익하고, 나라를 살리는 왕이 된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왜 죽음을 맞이하는 계기가 되었겠습니까?
무엇보다 삶을 세워가는 기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이 살아온 과정을 기억하며, 방향과 기준을 같이했습니다. 세상의 기준과 욕심을 뒤로하고, 복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이로 인해,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고, 왕위까지 받았습니다.
반면 아도니야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기준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아도니야가 내세운 기준은 오직 자기 욕심과 욕망, 그리고 세상의 관습과 방식뿐이었습니다. 이들에 눈이 멀어, 상황을 살피지 못 했고, 스스로 자제하지도 못 했습니다. 가만히 있었으면, 왕자로서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넉넉하고, 풍족하게 누리며 살았을 텐데, 스스로 기름을 지고 불길에 뛰어드는 꼴이 되었습니다.
솔로몬과 아도니야가 보여준 선택과 기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큰 가르침을 줍니다. 무엇을 향하고,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선택과 기준에 따라 삶이 어떻게 나뉘고, 바뀌는지 지금 당장 드러나지 않지만, 그 결과는 이 둘의 모습에서처럼 극명하게 갈라집니다.
복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방식과 기준을 마음에 담고, 그 기준에 맞춰 따라 살면, 우리 삶을 통해 우리 자신은 물론, 가족과 이웃과 교회까지 유익을 주고, 잘되게 하고, 성공하게 만드는 이유가 됩니다. 서열상 아도니야보다 밑이라는 불리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솔로몬은 오히려 왕에 올랐고, 나라를 살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방향과 기준을 뒤로하고, 세상의 길대로, 욕심에 따라 삶을 세워 가면, 그 결과는 아도니야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더라도, 세상의 욕심과 욕망으로 기준 삼으면, 그 끝에서는 결국 실패와 절망과 죽음과 패망만을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로서는 복과 성공과 은혜를 스스로 만들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갈림길이 우리 앞에 있고,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장차 손에 쥐고 누릴 수 있는 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길을 선택하며, 따라 살아가면 복과 성공을 받습니다. 욕심으로 세상이 주는 욕망의 길을 선택하며, 따라 살아가면 저주와 실패를 마주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 삶에서 어디를 향하고,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분명합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이 그 누구보다 큰 복과 은혜를 누리며 산 이유를 알고, 하나님의 방식에 따름으로써 왕위에 올랐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도니야는 아버지 다윗이 걸어온 기준과 선택에 관심이 없고, 오직 세상 욕심에 눈이 멀어 결국 죽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복과 평안이 약속된 길과 기준이 무엇인지, 저주와 죽음으로 가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고, 언제나 바른 지혜로 판단하고, 믿음으로 선택해 행함으로써, 나날이 복되고, 기쁨과 은혜가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주의 복된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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