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질서 안에만 복이 있습니다
성경: 열왕기상 1장 11-21절(구 508쪽)
찬송: 315장(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400장(험한 시험 물 속에서)
설교: 20211226.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인류에게 고통을 주는 여러 질병이 많습니다만, 암도 대표적인 질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암이라는 질병은 그 시작이 언제인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오래되었습니다. 발견할 만한 지식과 기술이 부족해서 그렇지, 그 역사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길고, 또 엄청난 고통과 피해를 안겨다 주었습니다.
그 동안 인간이 쌓아온 지식이 크고, 또 의료 장비들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죠. 이런 속도로 가면, 점차 암이라는 가장 무서운 질병조차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암 환자는 과거에 비해 훨씬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더불어 앞으로도 정복하기 어렵고, 환자는 더 많아진다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암은 노화와 관련이 큰데,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수명이 길어지면서, 그에 따라 암의 발병율도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정복하기 어렵고, 치료도 어려운 질병이라, 무엇보다 예방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암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건강검진을 정기적으로 받고, 8시간 정도로 잠을 자고, 스트레스를 줄이고, 비만이 되지 않아야 되고, 금주, 금연을 하고,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한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식사에 주의해야 하는데, 가공식품처럼 설탕과 지방이 든 음식을 피해야 하고, 고기와 소금의 양도 줄여야 한다고 합니다.
예방법들을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어떻게 저기에 맞춰 사나?’는 생각도 들고, ‘이것 저것 모두 빼면, 도대체 무엇을 먹고 살 수 있나?’는 생각도 들죠. 예방법이 맞다 하더라도, 그에 맞춰 살지 못 합니다.
이처럼 방법이 좋고, 옳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에 맞춰 살지 못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집니다. 하나는, 질병이 확률로 오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를 겪고 확인하기까지는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방법을 철저히 지켰더니, 단 한 사람도 병에 걸리지 않고, 반대로 예방법을 하나라도 지키지 않으면, 모두 병에 걸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예방법에 어긋나는 모두를 철저히 피하겠죠. 먹지 말라는 음식을 마치 독약처럼 대하겠죠. 죽기를 각오하지 않는 이상, 예방법을 철저히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반드시’라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확률로 질병에 걸립니다. 건강관리를 아무리 열심히 하고, 예방법을 하나 어기지 않더라도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평생 술을 물마시듯 하고, 줄담배를 피워도 별다른 질병 없이 장수한 분들도 많습니다. 이처럼 질병은 확률로 주어집니다.
이게 바로 확률의 무서움입니다. 법칙처럼 예외나 변칙 없이 반드시 일어난다면, 모두가 어긋남을 알고 멀리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 합니다. 규칙이라 말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고, 확률도 그리 높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방법을 외면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가리지 않고 먹게 됩니다.
무서운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지키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검증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몇 번 과음했더니, 몇 시간 뒤에 병에 걸린다면 어떨까요? 담배를 몇 갑 피웠더니, 몇 시간, 혹은 며칠 뒤에 발병한다면 어떨까요? 기름지고, 단 음식을 며칠 먹었더니, 며칠 뒤에 병에 걸린다면 어떨까요? 그렇게 되면, 예방법이 맞다 인정하고, 어기지 않으려 죽을힘을 다하게 됩니다. 금세 나타나고, 죽을 수도 있는데, 그 누가 예방법을 어기겠습니까? 누가 먹지 말라고 하는 음식을 먹겠습니까?
그러나 병을 막기 위해 여러 수칙을 행하고, 그 행동에 따라 결과가 나타나기까지는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몇 달도 아니고, 수십 년일 수 있습니다. 게다가 확률로 주어지니, 질병 예방법이 맞는지, 그대로 하면 정말 무서운 병에 안 걸리는지 확인하기도 어렵고, 믿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는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신앙인들을 바라보는 세상에서는,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는지 증명해 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어떻게 신앙인들이 힘들게 살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잘살고, 행복하게 사느냐?”고 질문합니다. 믿음이 약한 신앙인들이 던지는 질문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끌어 가시는 모든 과정을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지만, 이에 대한 답도, 암 예방 수칙을 지키지 않는 이유로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확률로서 세상이 이루어진다며, 하나님의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규칙에서 벗어나, 맘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합니다. 그래도 잘 사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도 실패한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약속대로 산 사람들의 결과와 열매를 확인하기까지는 많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누군가에게는 며칠이나 몇 달에 불과할 만큼, 비교적 빨리 결과를 얻는 경우도 있으나, 대분은 많은 시간과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확인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사느냐가 믿음이고,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규칙이 복과 평안의 길로 이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길이 믿음이고, 이 믿음에 따라 참고 기다리는 과정이 신앙생활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도,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난 선택하고 살았던 다윗이, 어떤 결국을 마주하게 되는지 알려 주시고 있습니다.
평생 전장에서 이름을 떨치고, 왕으로서도 수많은 업적을 쌓은 다윗이 늙어, 자기 몸 하나 간수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부하들이 다윗의 연약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아비삭이라는 젊은 처녀를 품게 하는 어리석은 방법을 이용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 했습니다.
다윗은 용맹하고, 신실했지만, 이상하리만치 자녀나 부하에게는 방관하는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제나 비극과 고통뿐이었습니다. 다윗의 잘못된 선택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아들끼리 왕위를 놓고 싸우고, 이로 인해 나라 전체가 둘로 나뉘게 되는데, 이렇게 만든 원인이 있습니다. 다윗이 여러 아내를 두었다는 점입니다.
첫째와 둘째 아들이 죽고, 다른 아들들이 있었지만, 다윗은 솔로몬을 왕으로 앉힌다고 약속했습니다. 아도니야도 모를 리 없겠지만, 위에 두 형이 죽어서, 자신이 왕에 오른다고 생각하고, 이를 준비합니다. 다윗의 군대장관인 요압을 포함해서, 아비나답이라는 제사장까지 끌어들였습니다. 솔로몬이 공식적으로 왕에 오르기 전에, 자신이 왕에 오르기 위해 잔치자리를 마련하고, 사람들까지 끌어들이고, 그곳에서 왕이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아도니야가 마치 왕이 되기 위해 여러 가지 작업을 서두를 때, 가장 반대하던 이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솔로몬의 친어머니입니다. 또 나단 선지자도 역시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솔로몬이 왕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나단은 밧세바에게 늙어 판단력이 흐려진 다윗을 찾아가,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솔로몬을 왕의 자리에 앉히는 작업을 서두르도록 이야기하라고 조언합니다.
이때의 이스라엘과 다윗 가정의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하나뿐인 왕의 자리를 위해, 아도니야 편과 솔로몬 편으로 나뉘었습니다. 군대장관인 요압과 왕비인 밧세바가 서로 등졌습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다윗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던 이들도 두 편으로 갈라섰습니다. 아비아달은 아도니야 편에 섰고, 나단은 솔로몬 편에 섰습니다. 여러 관리와 백성들까지 둘로 나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다음 장인 2장에서, 왕이 된 솔로몬이 형 아도니야를 죽이는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이때는 이미 다윗도 죽은 후였으나, 가문으로서 보면, 세 아들이 비참하게 죽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다윗으로서는 세 아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게다가 둘은 아래 동생들한테 죽임을 당했고, 다른 하나는 자기 부하의 손에 죽임을 당했으니, 다른 어떤 상황보다 더 힘들고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왕으로서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많은 업적을 쌓았다고 하지만, 서로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 가족끼리, 형제끼리 서로 죽고, 죽이고, 해치는 일이 몇 번이나 되풀이되었으니 과연 다윗이 행복했다고, 잘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로서는 자녀들이 서로 죽이고, 왕으로서는 신하와 백성들이 둘로 나뉘어 서로 잡아먹을 듯 하게 된 비극이 왜?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다윗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다윗 자신이 너무 많은 아내와 첩을 두었습니다. 많은 여자를 두고, 이들로부터 많은 아들들이 나왔으니, 한 자리뿐인 왕위를 놓고 서로 경쟁하고,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사무엘하 3장에는 다윗의 아내들 다섯 명이 기록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역대상 3장에도 아내들이 기록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아내들이 있었고, 첩들도 많았습니다. 첫 번째 아내인 미갈은, 사울 왕의 딸로서, 신앙과 인격에서 큰 문제를 보여서 버림받았습니다. 미갈은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다윗은 너무 많은 아내와 첩들을 두었습니다. 다윗이 겪은 가장 큰 아픔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를 증명하듯, 왕위 때문에 큰 갈등을 보인 네 형제 모두 어머니가 다릅니다. 첫째인 암논은 배가 다른 여동생을 범했다가, 여동생의 친오빠인 압살롬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문제 역시 어머니가 다른 데서부터 시작되었죠. 압살롬이 위의 형인 암논을 죽인 이유도 역시 다른 어머니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 다윗의 허락도 받지 않고, 먼저 왕처럼 행동하다, 결국 이를 빌미로 죽임을 당하는 아도니야도 솔로몬과 배가 다릅니다. 아도니야가 먼저 왕 행세를 할 때, 밧세바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다윗에게 알리고, 약속대로 솔로몬을 왕의 자리에 앉히라 재촉한 이유는, 솔로몬이 자신의 친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배에서 나온 친형제들이었으면, 다윗이 겪은 가장 큰 비극과 아픔들 중 상당수는 겪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중심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남녀가 한 가정을 이루도록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당연한 이 질서를, 타락할수록 당연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신실한 삶으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준 이들조차도, 이를 지키지 못 한 경우가 많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집니다. 다윗의 믿음과 용기가 얼마나 대단합니까? 거인 골리앗과 싸울 만한 용기를 가졌고, 자신을 죽이려 드는 원수인 사울 왕마저 두 번이나 용서했습니다. 그 누구도 흉내조차 내기 힘든 일들을 다윗은 믿음으로 해냈습니다. 참 대단합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여자 문제에 대해서는 나쁜 쪽을 선택했습니다. 당시 권력에 따라 많은 여성을 얻는 문화가 널리 퍼졌다고는 하지만,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던 다윗이, 하나님의 질서를 모를 리도 없습니다.
다른 누구보다 신실하게 살아온 다윗이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무너뜨림으로써, 가정과 나라에 큰 비극을 가져온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무엇보다도, 많은 여인을 얻어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라는 계산 때문이고, 그 결과를 직접 겪기까지 시간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아내를 많이 둘수록 반드시 문제가 커지고, 또 그 문제가 당장 쉽게 눈에 드러났다면, 다윗이 이처럼 어리석게 선택하지는 않았겠죠. 당장은 아내를 한 명 더 얻었더니 어려움과 문제보다는 기쁨과 이익이 컸습니다. 한 명 두 명 더 들여 문제가 생겨도, 자신이 충분히 감당하고, 해결할 수 있어 보였겠죠.
그러나 하나님이 질서를 세우셨듯이, 사탄은 질서를 무너뜨립니다. 하나님은 질서를 통해 복과 평안을 주시고, 사탄은 파괴를 통해 혼란과 고통을 줍니다. 이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반복해 주시는 말씀이고, 믿음의 선조들이 삶으로 알려준 모습입니다. 사탄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혹하는 함정이고, 이에 넘어간 이들이 비참한 삶으로 이를 증명해 줍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과 질서를 지킨다고 해서, 한순간에 삶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어긴다고 해서, 한순간 죽음이나 실패를 겪지도 않습니다. 이를 이용해 사탄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함정으로 이끕니다. “그래도 괜찮다. 다른 이들도 그렇게 살아도 괜찮았다.”는 말로 유혹하며,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에서 벗어나, 욕망대로 살라 합니다. 이 유혹이 얼마나 크고 강한지, 다윗 같은 사람도 아무런 저항 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질서는 지금 당장 이루어지 않지만, 다윗이 그 삶의 마지막을 통해 알려주듯, 선택한 대로, 행한 대로, 그 열매를 마주하게 됩니다. 유혹의 시작은, 당장은 몇 방울에 불과해, 충분히 막을 수 있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은 한순간에 무너진 봇물처럼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고, 돌이킬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삶의 과정에서, 우리가 기억하며 살아야 할 길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질서와 계명과 말씀 안입니다. 이 안에 머물러 살면, 늦어도 성공하지만, 하나님의 질서와 계명을 깨부수고, 벗어나 바깥에 머물면, 빨라도, 늦어도 반드시 실패합니다. 하나를 얻으면, 전체를 잃는 어리석은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신실하고, 용맹하고, 지혜로웠지만, 절제하지 못 함으로써, 잠깐의 쾌락과 권력을 얻었지만, 결국 가정과 나라를 분란과 죽음의 현장으로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고 말았습니다. 악의 유혹의 무서움, 선택에 따라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엄격하심을 기억하고,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과 길대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와 평안으로 삶을 채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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