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11205)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인정하는 믿음(삼하 24장 10-17절)

청명하늘 2021. 12. 5. 14:10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인정하는 믿음

 

성경: 사무엘하 2410-17(506)

찬송: 442(저 장미꽃 위에 이슬), 393(오 신실하신 주)

설교: 20211205.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2002년에 MBC 방송국에서 방영한 [네 멋대로 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당시, 시청률로는 최고가 아니었지만, 잔잔한 내용과 아름다운 대사로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까지도 가장 좋은 드라마로 꼽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입니다.

 

이 드라마에서 너 같은 것들은 잡생각이 많아서 믿음이라는 게 뭔지 모르지? 믿음이라는 게 뭔 줄 아냐? 날 속여도 속는 줄 알면서 그냥 다 믿어 버리는 거 그게 믿음이다.”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사실, 이 말은 납득이 안 됩니다.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믿음’ ‘신뢰믿는 마음과 자세를 뜻합니다. 믿음이 가기 위해서는, 대상이 옳고, 변치 않아야 합니다. 누군가가 말을 이리 저리로 바꿀 때, 처지에 따라 행동을 쉽게 바꿀 때, 혹은 앞뒤의 말이 다를 때 믿음이 안 간다.” “신뢰가 안 된다라고 말하죠. 행동이 옳지 않거나, 말이 자주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믿음의 수준을 훨씬 높여 말합니다. 속이지 않아야 믿을 수 있다고 하는 우리와는 달리, 속여도 믿는 정도입니다. 속는 줄 알면, 신뢰를 저버렸다며, 믿음을 깨고 돌아서는 보통의 수준을 넘습니다. 대상이 나를 속이고, 또 내가 속아 넘어가는 줄 알면서도, 상대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줄이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단순히 아무나 아무 말이나 그대로 믿으라는 뜻일까요?

 

지난달에 보이스 피싱에 속아 넘어갈 뻔한 한 남성의 이야기가 뉴스로 보도되었습니다.(https://www.youtube.com/watch?v=5exeXnjhKxk)

 

50대의 한 남성이 농협에 와서, 통장에 있는 3천만 원을 현금으로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요즘은 이처럼 거액을 현금으로 거래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전화통화하면서 현금으로 달라는 모습을 보고, 농협직원들이 보이스 피싱으로 의심된다며 말렸습니다. 그래도 설득이 안 되어서, 경찰을 불렀습니다. 경찰이 와서 사기전화처럼 보인다며, 확인해 보자고 해도, 남성은 계속 거부했습니다. 경찰보다 전화를 건 사기범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결국 경찰이 전화기로 통화하자, 범인이 전화를 끊어서 돈을 잃지 않게 되었습니다.

 

전화를 받고, 3천만 원을 보내려 한 이 남성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끝까지 잘 믿었다고 칭찬할까요? 은행 직원과 경찰의 말보다, 전화를 건 사기범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고 해서,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죠. 전화로 사람을 속여 돈을 빼앗으려는 범인도 욕을 먹지만, 속아 넘어간 사람도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화사기를 조심하라는 말이 수없이 많음에도, 돈거래에 대해서는 전문가인 농협 직원도 믿지 않았고, 여러 사고와 사건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경찰마저 믿지 않았으니, 피해자가 될 뻔한 이 남성도 못지않게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믿음의 수준을 날 속여도 속는 줄 알면서 그냥 다 믿어 버리는 거 그게 믿음이다.”고 말하고 있으니, 단순히 아무나, 아무 말이나 무조건 믿고 따르는 자세와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속는 줄 알면서도, 그냥 다 믿는다는 게 무엇을 뜻하고, 어느 정도 수준을 말하겠습니까?

 

무엇보다 상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이 바탕 되어야만 가능합니다. 상대가 무슨 일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선택과 행동이 옳음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상대의 의중을 알 수는 없으나, 결국은 나에게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상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관계고, 그 동안 여러 과정을 거쳐, 철저한 신뢰를 쌓아 올렸어만 가능한 관계입니다.

 

이는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집니다. ‘믿음이 가진 여러 특징과 의미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그 관계를 삶으로 풀어내는 모양이 신앙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장 높고 친밀한 관계란 어떤 모습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인 성경을 잘 연구하여, 하늘의 신비를 깨닫고 전하는 일일까요?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많은 이적을 일으키고, 많은 업적을 쌓는 모습일까요? 아니면, 기도를 많이 하고, 전도를 많이 하는 일일까요?

 

이런 모습도 필요하고, 중요합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장 높은 수준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인들의 모습은, 하나님이 특히 좋아하셨던 성경 속 인물들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인류에게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만큼 위대한 인물이지만, 아브라함이 이적을 행하거나, 업적을 많이 쌓았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을 뿐, 대단한 업적이나 능력 때문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인정하신 이유는, 그 믿음이 하나님의 기준과 시험에 통과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을 죽여 바치라는 하나님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자기 목숨을 바치는 일은 가능하겠지만, 하나뿐인 아들을 바치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에 지나친 요구처럼 보입니다.

 

성경에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무리 하나님의 요구라 하더라도, 아들을 죽여 바치는 일을 쉽게 받아들였겠습니까? 그럼에도 결국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치러 모리아 산을 향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말 속에서 믿음의 크기와 수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들 이삭이 꽤 성장한 때라, 나무를 지게 하고, 아브라함 자신은 불과 칼을 들고 산을 향합니다. 이삭이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로 드릴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고 답합니다.

 

지금 아브라함의 눈에는, 아들 이삭을 대신해 잡을 어린 양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만 들었을 뿐, 아들 이삭을 대신할 양을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겠다는 약속을 들은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이 이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향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절대 변치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들을 희생시키라 요구하시는 하나님, 너무 무섭고, 낯설고, 너무한 분처럼 여겨지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과정임을 믿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뜻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자신에게서 나온 후손을 통해, 인류를 구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시니, 지금의 고난과 시험마저도 결국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서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의 결국을 알고 믿었기에, 웬만한 담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가장 먼저 택하시고, 그의 후손으로 하여금 구원을 약속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고, 명령하시는 모든 일의 결국이 유익이 되고,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좋은 선물을 들고 서 있는 이를 믿고 따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을 만큼 쉽고 간단합니다. 더 큰 믿음으로, 더 멀리 바라보라며, 지금 당장은 질책과 쓴소리를 쏟아내는 상대를 좋아하고, 믿고 따르기란 쉽지 않습니다. 지금 눈앞에 쏟아지는 불편함과 고통 뒤에 있는 좋은 선물을 기대하려면, 그만큼 상대의 약속을 믿을 만한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단단한 신뢰가 바탕이 되면, 지금 당장의 형편으로 판단하지 않고, 결과를 믿고, 기다릴 줄 알고, 지혜롭게 선택하게 됩니다.

 

이는 오늘 본문 속 다윗의 모습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다윗은 본문 앞에서, 인구의 수를 조사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이는 나라의 안녕과 부흥을 자기가 이루었다는 교만이기도 하고, 더불어 군사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착각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이 죄를 벌하시지 않고, 그대로 지나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다윗은 갈수록 교만해집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라가 부흥되고, 안정될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집니다. 나중엔 하나님마저 무시한 사울 왕과 같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이 죄를 지나치시지 않습니다. 다윗 스스로 죄를 저질렀음을 깨닫고 회개하였음에도, 갓 선지자를 보내셔서, 세 가지 재앙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하십니다. 7년 동안의 기근, 세 달 동안 적에게 쫓기는 고난, 3일 동안 전염병이 드는 재해입니다. 다윗은 3일 동안 이스라엘 땅에 전염병이 생기는 재난을 선택합니다.

 

이 과정에서 왜 다윗의 믿음이 대단한지, 왜 하나님이 그토록 다윗을 좋아하셨는지가 확인됩니다.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하나님께서 벌하신다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14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고통 중에 있도다 청하건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는 말씀을 통해, 다윗이 3일 동안 전염병의 고난을 선택한 이유가, 하나님의 자비를 믿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보면, 다윗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복과 평안과 은혜를 베푸실 때만 믿는 수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고, 죄에 대해 합당한 벌을 내리신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마저도 자신에게 결국 유익이 됨을 인정하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죄에 합당한 벌을 내리시지만, 그러나 자녀들이 망하고 죽을 만큼은 벌하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자비를 알고 믿었습니다.

 

이 정도의 믿음에 이르렀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징계를 내리신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멀리하거나, 의심하거나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사람으로 더 성숙해지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이 복과 평안을 주실 때도 하나님께 감사했지만, 하나님께서 징계와 고난을 주실 때마저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알을 얻기 위해 닭을 키운 지도 어느새 3년가량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닭을 처음 키워본지라, 그 동안 모르던 사실들을 많이 보고 배우고 있습니다. 닭을 키우면서 참 미련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기억력이 좋지 못 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닭대가리라는 말로 놀리는 이유가 이해될 정도입니다.

 

올해 너구리가 죽인 닭만 해도 10마리가 넘습니다. 이 때문에, 주위를 철망으로 둘렀고, 넘어 나오지 못 하도록 위에 그물까지 설치했습니다. 그런데 매일 한두 마리가, 4미터가 넘는 높이에 있는 작은 틈을 통해 밖으로 나옵니다. 나오긴 하는데, 들어가지는 못 해요. 그래서 혼자서, 한 마리를 넣으려 문을 열어놓으면, 그 잠깐의 틈을 이용해 닭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옵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다른 짐승에게 당할까 염려되어, 우리 안에 넣으려 하는데, 매일 보는데도, 이리저리로 도망합니다. 저는 닭을 살리려 우리 안에 들이는데, 닭들은 죽자고 빠져나옵니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 주위를 철망으로 두르고, 위로 그물까지 씌운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닭이 안전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에도 30마리가 넘는데, 자기들을 위한다는 사실을 알고, 따르는 닭은 한 마리도 없습니다. 2년 넘는 닭들도 있으니, 그 동안 수백 번 물과 먹이를 준 주인은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들을 지키고, 유익을 주는 주인을 믿고 따를 정도 되었을 듯한데,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닭의 수명이 30년이나 된다고 하는데, 하는 행동들을 보니, 30년이 아니라, 300년을 살아도 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 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안목의 수준이 닭이나 짐승들의 수준에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당장 눈앞에 무엇이 보이느냐에 따라, 믿음과 불신으로 나뉘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좋은 것을 얻으면, 좋아하고, 잘 믿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죄를 벌하시고, 고난을 주실 때는 멀리하고, 불평하는 수준이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믿음이 아니라, 거래에 불과합니다. “지금 내가 좋아하고, 나를 즐겁게 할 것들을 주세요. 그러면 내가 믿어 주겠습니다.”

 

이 정도 수준에 불과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우상이나 다른 신을 믿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실 수준의 믿음이란,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실 때는 물론, 고난과 아픔을 주실 때마저도, 하나님의 약속과 자비와 은혜를 믿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자녀가 망할 수준으로 징계하시지도 않고, 지금의 고난마저 결국은 우리에게 유익이 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방식을 믿고 따르는 수준에 이르러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 수준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고, 본문 속 다윗도 이런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복과 은혜로 채우시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와 은혜를 기억하고, 결국 모든 일에 좋은 것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고난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복을 날마다 누리며 살아 나아가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