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주인 삼고
성경: 사무엘하 15장 24-37절(구 488쪽)
찬송: 446장(주 음성 외에는), 393장(오 신실하신 주)
설교: 20210620.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2019년 말에 목사직을 가진 한 사람이 “하나님 꼼짝마.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는 발언을 해서 충격을 주었습니다. 상식과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비록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런 발언을 안 하죠? 못 합니다. 이 사람은 우리와는 교단이 다르지만 목사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때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였던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경박하기 짝이 없는 이 발언을 목사직을 가진 사람이 내뱉었다는 사실도 충격인데, 이에 대한 교인들과 기독교의 반응은 더 역겨울 정도로 납득이 안 됩니다. 이런 발언을 듣고도 여전히 동조하며 따라다니는 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교회와 사회에서 믿음과 덕망으로 칭찬을 받는 이들 중에서도, 그런 정신 나간 소리를 내뱉는 이가 좋다며 따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기독교 단체에서도 마찬가집니다. 터무니없는 발언을 못 하도록 반드시 바로잡아야 합니다. 인간인지라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의 실수로 여겨 넘어갈 수 있는 실수가 있고, 반복되지 못 하도록, 철저히 규명하고, 회개와 반성을 요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의 입에서만 나올 수 있는 그런 발언은 철저히 조사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기독교 내에 있는 수많은 언론기관, 교회, 단체들까지도 유야무야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간혹, 정치인들이나 방송인들이 특정 계층이나 지역에 대한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경우들이 있죠? 누가 어떤 발언을 할 때는, 발언의 취지와 상황까지 살펴야 합니다. 그럼에도 모두 빼고, 한두 마디나 단어 하나만으로 잡아먹을 듯 공격합니다.
언젠가 한 정치인이 ‘삼천포’라는 말을 사용해서 큰 곤욕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일이 예상과 계획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는 경우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모두에게 익숙해져서 속담이나 격언처럼 많이 사용됩니다. 삼천포 지역민들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삼천포를 비하하거나 무시하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한 정치인이 이 말을 사용했더니, 수많은 언론과 정치인들이 득달같이 공격했습니다.
이에 반해, 앞선 사람의 발언은 의도는 분명하고, 용서의 범위를 너무도 분명하게 넘어갔습니다. ‘그럴 수 있는’ 한 순간의 실수로 볼 수도 없고, 그리 보이지도 않는 발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속한 통합측에서도 이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부적절한 용어’를 사용한 경우로 볼 뿐, 이단으로 규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경우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의도와 범위입니다. 무슨 의도로 했는지, 그리고 발언이 적절한지, 잘못되었으면 어느 정도 벗어났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런 발언을 한 의도는 분명합니다. 자신이 높아지고, 주인공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높이기 위해 하나님을 낮췄습니다. 자기가 주인공이 되려고, 하나님마저도 자신의 권위와 능력 아래에 있다고 발언했습니다. 온전한 정신과 상식과 믿음에서 나올 수 없는 내용입니다. 이해와 용서의 수준에 포함시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합니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이들이 여전히 목사, 그것도 능력과 위엄이 있는 목사로 믿고 따릅니다. 믿음이 대단한 목사로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믿음과 능력이 대단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과 위엄이 대단해서 그런 말을 내뱉은 게 아닙니다. 그 동안 ‘하나님’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은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포장했지만, 본바탕은 미신에 지나지 않았고, 그 본모습이 그 입을 통해 직접 드러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성경과 찬송가를 쓰고, 우리와 같은 ‘교회’의 모습인데, 우리는 왜 믿음이고, 왜 저들은 미신에 불과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저들이 믿고 따르는 대상은 왜 우상입니까? 믿음과 미신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상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지난 주 설교에서 사랑과 욕심의 차이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사랑과 욕심 모두 상대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진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사랑에서 나온 헌신과 관심인지, 아니면 욕심에서 나온 집착인지를 구분하지 못 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과정과 목적에서 상반된 모습을 보입니다. 이를 통해 참된 사랑으로부터 나온 관심과 배려인지, 아니면 자기 욕심과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집착인지가 구분됩니다. 사랑은 언제나 상대가 목적이 됩니다. 자신은 기꺼이 수단과 도구가 되는 일을 꺼리지 않습니다. 상대의 행복과 기쁨을 위해, 자신을 더 낮추고, 필요하면 목숨까지 바쳐 희생할 줄 압니다.
사랑의 이런 특징은, ‘사랑장’이라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 5절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라는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기독교의 믿음과 구원을 가장 대표하는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면 정반대입니다. 자기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상대를 희생시킵니다. 자기가 잘되고, 자기가 더 높아지기 위해 상대를 낮추고, 심하면 언제든지 없앨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자기 성공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상대를 이용할 계산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목적이고, 상대는 도구에 지나지 않기에, 상대가 더 이상 도움이 안 되거나 손해가 된다 싶으면 언제든지 돌아서거나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인지, 우상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인지를 구분하는 방법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또 다른 표현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인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못 되고, 나 자신의 성공과 자랑과 높아짐이 기준이 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되 하나님 자체(?)를 사랑하면 믿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아닌, 그 외의 모든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 아닌 그 어떤 상징이나 상징물을 사랑하는 것도, 또 이런 것 자체에 능력이 있다고 여기면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고, 십자가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교회가 구원의 방주를 상징하지만, 그러나 성경이나 십자가나 교회 자체에 능력이 있다고 여기거나, 이들만을 붙잡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를 철저히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계획하시는 대로 하실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 과정이 내가 원하는 바와 정반대로 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이시기에 그러실 수 있음을 인정하며 따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는 데 자신은 도구가 될 수 있으며, 그에 순종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고, 미신으로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주인이 되고, 자신의 계획과 성공이 가장 먼저입니다. 자신의 목적과 성공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을 이용합니다. 이들은 하나님마저도 자기 뜻과 계획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고 여기며,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바르게 믿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셋째 아들인 압살롬이, 준비하고 계획한 대로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비록 자신의 아들이지만, 이제 왕위를 놓고, 싸워야 하는 적이 되었습니다. 싸움의 능력과 충분한 경험을 가진 다윗이기에, 싸워 이길 수 있음에도, 다윗은 피난길에 오릅니다. 이 고난이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임을 인정하고, 또 자기 자리보다 백성들의 생명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급하게 피난길에 오를 때, 제사장들이 다윗의 뒤를 따라 가겠다며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언약궤를 본래 있던 자리로 돌려 놓으라 명령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다시 돌아와 하나님의 궤를 볼 수 있을 거라 합니다.
긴박한 이 순간에 보이는 다윗의 믿음이 어떻습니까? 다윗이 누구를 믿고, 어떻게 믿었습니까? 다윗이 자신의 능력을 믿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믿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언약궤 자체를 믿었습니까? 다윗은 자신의 뜻과 계획을 앞세웠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앞세웠습니까?
하나님의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상징하는 거룩한 물건이었습니다. 사무엘상 4,5장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궤를 어떻게 여겼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당시 블레셋과의 전쟁을 벌이다 패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약궤를 싸움이 벌어지는 곳까지 가져왔습니다. 언약궤만 있으면 블레셋을 물리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지금 급하게 피난길에 올라야 하는 다윗에게 가장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온 까닭도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만 있으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생각도 있고, 더불어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하신다고 선전할 수도 있습니다. 싸움의 과정을 다윗에게 유리하게 이끌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언약궤를 성읍에 남겨 두라고 명령합니다. 다윗은 왜 언약궤를 성읍에 두라 명령했겠습니까? 본문 25,6절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언약궤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믿었습니다. 언약궤에서 특별한 능력이 나온다고 여기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능력이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고,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상징하지만, 그럼에도 언약궤 자체를 믿고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했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 혹은 자신이 원하는 바인지, 그렇지 않는지 하는 등의 기준으로 나누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따랐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보다는, 언약궤 자체를 믿고, 집중하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언약궤를 이용해, 자기들의 뜻을 이루고자 했던 사람들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다윗의 믿음은 이 정도로 크고 확실하고, 또 성숙했습니다. 자기의 계획과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과 상징물을 이용하지도 않았고, 자기 뜻대로 되는 걸 능력으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의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다른 사람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성숙하고, 온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데, 하나님께서 복과 평안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생활도 이런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되, 사랑하는 수준과 마음에서 믿어야 합니다.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 자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목적 삼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와 수단으로 낮출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고 따라야 합니다. 내 목적과 욕망을 이루는 데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이 능력있고, 복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되기로 다짐하고, 따라 사는 사람이 능력자이고 복됩니다.
하나님이 가진 능력과 복과 평안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상징하거나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고, 하나님을 상징하거나 신앙생활과 관련된 것들, 흔히 ‘성물’이라 부르는 것을 믿고 따르는 것은 미신이고,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지, 교회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고, 복과 평안으로 이끄는 게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지만, 성경 자체가 능력과 구원을 베푸는 건 아닙니다. 성경 속에 담긴 말씀대로 사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복 주신다고 약속하셨지, 성경만 들고 다닐 뿐, 상관없이 살면 의미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사건을 상징할 뿐, 십자가 자체가 구원을 베풀지 않습니다. 크고 화려한 십자가를 높이 달고, 또 화려하게 치장해 봤자 아무 소용없습니다.
다윗은 예수님 훨씬 이전의 사람이라, 믿음의 수준이 낮은 시대에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미신의 수준에서 벗어났습니다. 하나님을 우상처럼 믿고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고 따라 살았습니다. 이 수준으로 믿었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과 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우리가 약속된 복과 평안을 누릴 길도 마찬가집니다.
다윗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성숙하고, 온전한 믿음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준으로 믿고,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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