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11121)하나님이 감사의 가장 큰 이유입니다(합 3장 16-19절, 추수감사절)

청명하늘 2021. 11. 21. 12:39

하나님이 감사의 가장 큰 이유입니다

 

성경: 하박국 316-19(1305)

찬송: 591(저 밭에 농부 나가), 589(넓은 들에 익은 곡식)

설교: 20211121. 주일낮예배(추수감사절)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여러분은 기억 못 하시겠지만, 5년 전부터는, 주제보다 본문을 정해 설교하고 있습니다. 설교자에 따라, 주제를 정해 놓고, 그에 맞는 본문을 찾아 선택해 설교합니다. 또 본문을 이어가며 주제를 찾고 설교하기도 합니다. 저도 처음엔, 주제에 맞는 본문을 찾아 설교를 준비하다가, 본문을 이어가며, 주제를 찾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특별한 절기나 상황이 되었을 때는, 그에 맞게 다른 본문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개인적으로는, 설교 준비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만, 절기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이 특히 힘들고 어렵습니다. 신년감사,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은 매년 돌아오는데, 그에 맞는 주제와 본문을 맞춰 준비하는 과정이 어렵습니다.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지만, 주제는 물론, 선택할 수 있는 본문마저 한정된 상황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추수감사절로 드리는 오늘의 말씀을 준비하는 과정도 마찬가집니다. ‘추수감사절로서 한 해 동안 거두고 얻을 수 있음에 감사하자는 주제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으로 올 한 해 감사의 조건으로 삼을까?’에 대한 답을 말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혹은 말만으로도 감사하자 할 수 있습니다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습관에만 머물러 있는 신앙이 바람직하지 못 한 것처럼, 진심을 담지 못 한 감사 표현도 옳지 않습니다. 감사의 참된 의미를 찾지 못 하고, 절기에 따라 예배만 드리다 보면, 자칫 교회 재정을 모으기 위한 수단에 그칠 수 있습니다.

 

감사할 조건들이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전보다 무엇이 나아졌을까?’ ‘작년보다 무엇을 더 얻었을까?’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나?’ 등 여러 가지를 감안하고 고민해 봐도, 쉬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손에 확실하게 잡히는 감사의 조건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2년 연속 전염병의 고통을 크게 겪고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 ‘위드 코로나’ ‘생활 수칙등 생소하거나, 일상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던 말들이 이제는 익숙해지다 못 해 지겨워졌습니다.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하려 해도, 다른 무엇보다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이런 시간을 2년 이어 겪고 있습니다.

 

교회를 봐도 마찬가집니다. 그렇지 않아도 적은 교인 수가 전혀 늘지 못 했습니다. 오히려 연세가 많아지고, 편찮으셔서 예배 참석마저 어려운 분들이 느는 형편입니다. 교회 재정도 아직 결산하지는 않았지만, 줄면 줄었지, 늘 만한 조건이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물론, 형편이 이전보다 더 나아지고, 좋아진 분도 계시겠지만, 어려워지고, 나빠진 분들이 더 많으실 듯합니다. 작년보다 적어지지 않고, 나빠지지 않은 형편 자체가 감사할 정도입니다. 올해 작년보다 더 많이 수확하셨습니까? 이전보다 형편이 더 나아졌습니까?

 

이렇게 추수감사절을 맞아, 작년과 올해의 형편을 살피고 고민하다, 문득 내가 조건에 따라 감사하려 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감사의 조건이 있어야 감사하고, 조건은 이전보다 좋아진 형편과 상황입니다. 바라는 대로 이루고, 원하는 대로 가지면 감사할 수 있겠다는 계산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을까요?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언제나 실패하고, 뒷걸음질을 계속하지는 않으셨죠? 바라는 수준만큼은 아니더라도, 간혹 성공하고, 잘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저는 낚시를 많이 하지도 않고, 그리 좋아하지도 않습니다만, 낚시로 예로 들어볼까요? 낚시하러 가는 분들은 모두 기대치가 있죠. 낚시하러 가는데, 한 마리도 안 잡아야겠다는 계획으로 가는 분들은 없습니다. 모두가 원하는 어종을 잡고 싶고, 더 큰 고기를 더 많이 잡고 싶은 바람과 계획을 가지고 갑니다. 이를 위해, 좋은 장비를 준비하고, 효과가 좋다는 여러 정보에 따라 준비합니다.

 

낚시하다 보면 어떻습니까? 언제나 원하는 어종이나 분량을 잡지는 못 하죠. 그렇다고 언제나 한 마리도 잡지 못 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기대하지 못 한 고기를 잡기도 하고, 바라던 이상으로 더 많이 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패할 때가 있지만 다시 낚시하러 갑니다. 만약, 언제나 실패하고, 수십 번, 수백 번 가서도 한 마리도 잡지 못 한다면, 그 안에 이미 낚시를 포기했겠죠.

 

이와 마찬가지로, 살아가다 보면, 기대하고, 원하는 이상으로 얻고, 이룰 때가 있습니다. 안 되고, 실패하고, 물러서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만, “언제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비율이 다르고, 정도가 다르긴 하지만, 분명 잘되고, 성공하고, 앞으로 나아갈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일이 잘되고, 성공하고, 많이 거두었을 때 어땠습니까? 그때는 더 감사했습니까? 더 기뻐했습니까? 그때 하나님의 은혜로 얻었다고 감사했습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인정하며 더 감사했습니까?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이루면, 더 감사하겠다는 기준은 그래서 잘못되었습니다. 우리가 각자 살아온 세월의 길이와 방향이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이점에서는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살아온 삶의 자취들을 조용히 돌아보면, 도저히 이를 부인할 길이 없습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 고향 가까운 바닷가에서 김을 많이 양식했습니다. 농수산물은 시세가 크게 변하죠. 그런데 80년대 중후반에, 다른 지역의 김 양식이 크게 실패했는데, 고향 바닷가에서는 풍작을 이루었습니다. 당연히 가격이 폭등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김을 양식하면서, 성공해도 조금 더에 그치고, 실패해도 조금 덜에 그쳤습니다. 그런데 다른 모든 곳은 모두 실패했고, 한 지역만 풍작을 이루었으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말 그대로 벼락부자가 되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수억 원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수준으로 벌어들인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그 주변의 경제 수준이 급등했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렇게 평생 바라던 대로,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인 수억 원을 벌어들인 후 무엇이 가장 크게 변했을까요? 많이 거두게 되었다고 감사하는 사람들이 많았을까요? 앞날을 발전시키고, 준비하기 위한 모임과 기관이 많아졌을까요? 감사하며 가치 있는 일을 위한 노력들이 많이 보였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길 하나를 두고, 좌우로 상점들이 있는 작은 소재지인데, 가장 먼저, 가장 큰 변화는 술집과 다방이었습니다. 술집과 다방이 한 곳만 있어도, 손님이 없을 만큼 작고 좁은 곳인데, 무려 10곳 정도 들어섰다고 합니다.

 

작은 동네에 술집과 다방이 그렇게 여러 곳 들어섰다는 의미는, 그만큼 찾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작은 소재지에 술집과 다방이 그렇게 많이 들어섰으면, 몇 년 후의 모습이 어떨지는 뻔하죠. 기대하고 바라는 수준 이상으로 벌자, 감사와 만족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탕주의가 생겨서, 지금 먹고, 마시고, 노는 데 막 써도 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 막 써도, 언제든지 다시 벌 어 들일 수 있다는 착각에 빠졌습니다.

 

우리의 바람대로 되고, 많이 거둘수록 만족하고, 감사한다는 우리의 계산과 기준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확인됩니다. 바람대로 안 되고, 기대와 계산만큼 거두지 못 해서, 만족하지 못 하고, 감사하지 못 한다는 계산과 기준 역시 마찬가집니다. 우리 각자가 걸어오고, 살아온 과정을 돌아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족할 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는 본성을 감추고, 핑계거리로 삼기 위한 거짓에 불과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박국 선지자가 전해준 말씀인데, 당시 상황은 말 그대로 아무런 희망이 안 보이던 때였습니다. 나라는 혼란에 빠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좋은 왕은 전쟁 중에 사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율법은 무너지고, 불의한 자들은 잘되고, 정직하고, 의로운 이들이 오히려 악인에 의해 협박을 당했습니다. 세상을 만드시고, 뜻에 따라 이끄신다는 하나님의 통치 방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해야 하는 선지자인 하박국이 하소연을 넘어, 하나님께 항의하듯 1장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2장의 하나님의 응답을 듣습니다.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 하고, 불의하고, 남을 억압하는 자들은 모두 그에 합당한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고, 그에 대한 심판이 곧 이루어진다고 말씀합니다. 더불어 24절에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합니다.

 

답답하고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대해, 불만과 불평과 원망 가득 담아 하나님께 하소연하던 하박국도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오늘 읽은 본문의 이야기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도 열매가 없고, 올리브나무에도 딸 것이 없고, 우리에는 양이 없고, 외양간에는 소가 없어도, 즐거워하며, 기뻐한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기준으로 보면, 하박국의 이런 고백을 들으면, ‘어떻게 살까?’ ‘무엇을 먹고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당장만 어렵고 힘든 게 아니라, 앞으로 거두고, 얻을 게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양도 없고, 소도 없는데, 언제 사서, 기르고, 언제 번식시켜 먹을 수 있겠습니까? 최소 몇 개월, 혹은 몇 년 동안은 기대와 희망을 갖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럼에도 하박국 선지자가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이유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지금 아무것도 없고, 앞으로도 기대하기 어렵지만,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뜻은, 조건에 따라 감사와 만족을 달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더 많이 가지면, 더 감사하고, 덜 가지면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무엇을 가지든, 얼마를 가지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그 어떤 조건에 휘둘리지 않고 감사하고, 기뻐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구원한다 약속하셨고, 하나님의 약속은 한 번도 틀리지 않고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가장 절망스럽고, 그 무엇도 기대할 수 없던 하박국이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만족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말할 필요조차 없죠. 지금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박국이 처한 상황만 합니까? 정말 우리의 논밭에 얻을 곡식과 수확이 전혀 없습니까? 거둘 만한 기대가 앞으로 몇 개월, 몇 년 동안 전혀 없습니까? 그렇지 않죠.

 

지금 전세계에서 계속되는 전염병의 위협 중에도, 우리나라는 백신 접종률이 최고 수준입니다. 전염병에 대한 대처도,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6,70년 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나라였지만, 이제는 세계 열 손가락 안에 들 만큼 부유한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영화와 음악과 드라마에서, 심지어는 음식에서까지 한류가 전세계에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1,20년 전만 해도, 우리 스스로도 상상하기 힘들 만큼, 우리 모두는 풍족하고, 안정되고, 좋은 곳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죠. 이 모든 조건과 기준이 하나 없어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 여전히 이 땅의 형편을 아시고,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심판하겠다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지금도 이 땅에, 우리의 삶에 유효합니다. 재산과 권력의 크기에 따라, 심판하겠다고 하시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을 결정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고, 기대할 만한 게 하나 없어도,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십니다. 전염병의 위협이 아무리 거세고, 오래되어도, 하나님의 약속이 변치 않는 한, 우리의 소망과 기대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올 한 해, 손에 쥘 수 있는 게 변변치 않아도, 하나님의 구원이 믿음에 따르는 한, 우리에게는 감사와 기쁨의 조건이 여전합니다. , 앞으로 몸은 더 약해지고, 혹은 죽음을 맞이한다 할지라도, 지금 호흡할 수 있고, 지금 움직일 수 있고, 지금 예배하고, 지금 믿음을 갖는 자체가 감사고, 기쁨이고, 만족입니다.

 

어린 학생일 때, 시험 성적표를 부모님이 보시면, 칭찬과 격려보다는 꾸중과 재촉을 더 많이 하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저보다 못한 아이들이 훨씬 많은데...” 하는 말로 불만을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사는 삶의 수준과 분량에 대해서는, 부모님께 내세웠던 기준보다, 부모님의 기준에 훨씬 더 가깝게 살고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이룬 것들에 대해서는 감사와 만족은 보이지 않고, 덜 가지고, 이루지 못 한 것들만 나열하며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저만 그렇겠습니까? 우리 모두의 모습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욕심의 그릇을 조금만 줄이고 보면, 원망 대신에 감사가, 불평 대신에 기쁨이 가득할 만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믿음의 자녀인 우리에게 곧 이루어집니다. 조건과 형편에 따라 휘둘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가져도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인생의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우리와 외양간에 양과 없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어느덧 11월도 기울어 갑니다. 어느덧 올 한 해도 한참 기울어졌습니다. 한 해 동안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셨는데, 기대만큼 거두거나 이루지 못 해 더 힘든 시간을 보내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공의로 이끄시며, 자녀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부족하고, 어려운 형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소망입니다. 이 소망을 품으면,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어떤 처지든지 참된 소망과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 했으나,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기쁨과 소망과 감사로 삶을 채운 하박국 선지자의 믿음을 기억하고, 어렵고 힘든 시기를 잘 이겨냄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와 평안을 날마다 누리며 사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