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품는 지도자
성경: 사무엘하 23장 8-39절(구 504쪽)
찬송: 490장(주여 지난밤 내 꿈에), 436장(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설교: 20211114.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올 3월에 5년간 도피생활을 했던 조직폭력배 한 사람이 잡혔습니다. 우리나라의 치안은 모두가 인정할 만큼, 세계 최고 수준으로 잘 되어 있습니다. 바꿔 보면, 죄를 짓고 도피생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조폭은 5년 동안 잡히지 않았으니 아주 오랫동안 도망 다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5년 동안 잡히지 않고 생활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보다, 지적장애가 있는 20대 여성을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이 여성에게 성매매를 시키고, 거기에서 나오는 모든 돈을 빼앗았습니다. 빼앗은 돈으로, 자기와 함께하는 3명의 생활비로 쓰고, 휴대전화나 자동차를 다른 사람의 명의로 이용하며, 전국의 여러 곳으로 도망 다녔습니다. 조폭은 가해자고, 강제로 성매매를 하고, 돈까지 빼앗긴 여성은 피해자죠.
그런데 이 남자가 경찰에 잡히자, 피해자인 여성은 펑펑 울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판단으로는, 그 동안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흘리는 감사와 안도의 눈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남성이 경찰에 잡혀, 감옥에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슬퍼했습니다. 그러면서 가해 남성이 자신에게는 가족보다 더 가까운 관계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여성은 피해자입니다. 지켜줄 가족이나 보호자가 없어서, 이 남성에게 협박을 받았습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거기서 나오는 모든 돈은 남자가 가져가 자신의 생활을 위해 썼습니다. 남성은 여성을 이용한 가해자이고, 여성은 이용당한 피해자입니다. 그럼에도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에게 동조하고 믿고 따릅니다. 이를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합니다.
1973년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에서 강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강도가 은행직원 4명을 6일 동안 인질로 잡아 가두고 고문했습니다. 결국 범행은 실패하고, 범인은 구속되었습니다. 6일 동안이나 인질로 잡히고, 고문을 당한 후 범인이 잡혔다면, 피해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범인에게 더 큰 벌을 내려 달라 하거나, 정신과 몸에 가해진 상처와 피해를 배상해 달라고 하겠죠?
하지만 이때 인질로 잡혀 있던 4명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범인을 체포하려는 경찰을 향해 오히려 적대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재판이 진행되는 중에도, 범인을 변호해 줄 변호사를 구하기 위해 모금활동까지 펼쳤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진 상식과 기준에서 너무 먼 모습이죠?
너무 엉뚱하고, 말이 안 되는 이런 현상이 사실 적지 않습니다. 가장 흔하게는 가정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가정 내에서 폭력이 일어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을 제재하거나 처벌하려 하면, 피해를 당한 배우자나 자녀들이 오히려 감싸고돕니다. 남녀가 사귀는 중에도 비슷한 모습이 최근엔 사회 문제가 됩니다.
이런 모습은 가까이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쉽게 눈에 뜨입니다. 그러나 워낙 크게 일어나서 쉽게 알아채지 못 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지도자들과의 관계입니다.
교통수단과 통신수단이 발달함에 따라, 소속되는 단체가 점차 많아집니다. 소규모의 친목 모임부터 크게 보면, 국가에 속하게 되고, 모임마다 지도자가 있습니다. 좋은 지도자를 선택하면, 모임의 분위기는 좋아지고, 더 발전합니다. 잘못된 지도자를 택하면, 모임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고, 모임 자체가 무너져 내리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지도자가 좋은 지도자고, 나쁜 지도자입니까? 지도자의 어떤 점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까요?
우리나라의 대선이 몇 개월 앞으로 다가와서, 대선 후보로 나선 이들 있고, 당에서 후보를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나라의 최고 지도자는 대통령이니, 좋은 대통령을 꼽으면, 나라가 안정되고, 발전됩니다. 나쁜 대통령을 뽑으면, 나라가 혼란스럽고, 발전이 더디거나 후퇴하게 됩니다.
좋은 대통령을 뽑기 위해서는, 역대 대통령의 통치하는 과정을 되살펴 보는 작업도 필요합니다. 좋은 점들이 많고, 나쁜 점이 적은 후보를 선택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역대 대통령을 평하는 여러 기준들 속에서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린 이들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대통령으로서 법에 규정된 권력의 한계를 벗어나, 자기 목적과 목표와 이익을 위해 거침없이 일하는 대통령이 지도력이 있다고 평합니다. “그때가 살기 좋았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 ‘지도력,’ ‘정치력’은 곧 법이 정한 한계를 벗어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이루려는 자세를 뜻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20년 가까이 독재하다 죽은 사람을 위인이라 평하고, 지금까지도 숭배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는 중죄인임에도, 지도력과 업적은 따로 평가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칩니다.
이런 주장을 여러 가지로 평가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바로 ‘스톡홀름 증후군’의 한 모습입니다. 비리와 불법과 독재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은, 감금하고 폭력을 휘두른 범인이 좋은 사람이고, 그래서 처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지키고 함께 하려 하는 피해자의 모습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 속 다윗을 통해, 지도자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는 동안에, 함께하며, 다윗을 도왔던 뛰어난 장수들이 여러 명 포함되었습니다. 특별한 장수 세 명이 있었고, 이들보다는 못한 30명의 장수가 있었습니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는, 무술이 뛰어난 소수가 끝없이 밀려오는 상대를 무찌르곤 합니다. 하지만 재미를 위해 허구와 과장을 섞어서 그렇지, 현실에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다윗이 아무리 싸움을 잘 해도, 다윗 혼자 적들을 모두 상대할 수 없습니다. 사무엘하 21장에서, 다윗이 싸우다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아비새가 구해주고, 왕에게 다시는 전장에 나가지 말라고 하는 장면(삼하 21:15-17)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위의 수많은 적들로부터 이스라엘과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돕고 함께하는 장수들이 필요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았다는 의미는 바로 이런 점도 포함됩니다. 다윗에게는 능력이 뛰어나고, 충성심까지 갖춘 장수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때문에 다윗은 전장에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위협이 가득한 전장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전쟁을 맡기고, 다윗 자신은 더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는 일을 담당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이처럼 좋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복을 받았을까요? 다윗이 거인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등 유명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사울 왕의 시기와 위협 속에서도, 죽이지 않는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일까요? 이런 모습도, 많은 사람이 머물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지만, 가장 큰 이유를 오늘 읽은 본문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많은 장수들 중에서도, 요셉밧세벳, 엘르아살, 삼마 세 명은 충성과 전투력이 아주 특별했습니다. 이들이 이룬 업적이 본문 8-12절까지 나오고, 이어서 13절부터 이들이 다윗에게 충성한 일화가 기록되었습니다.
블레셋과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적들은 베들레헴 성에 있고, 다윗의 군사들은 맞은편에 자리 잡았습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기도, 이후에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기도 합니다. 본래 이스라엘 땅인데, 블레셋과 싸우면서, 베들레헴을 빼앗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쟁 중에 자기 고향을 보면서, 다윗의 마음도 복잡했겠죠. 꼭 되찾아야겠다는 마음도 들고, 적에게 고향을 빼앗겼다는 생각에 마음이 많이 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누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나에게 길어다 주어, 내가 마실 수 있도록 해줄까?”라는 말을 내뱉었습니다.
다윗이 베들레헴 우물물을 말한 이유는, 목이 마르거나 물이 필요해서가 아니죠. 아무리 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한 나라의 왕인 다윗이 마실 물이 없는 상황은 납득이 안 됩니다. 고향을 적에게 빼앗긴 아픔과, 되찾고자 하는 간절함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다른 장수와 병사들은 다윗의 말을 듣고도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면, 다윗의 말을 모두 이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충성스런 세 장수가 다윗의 말을 듣고 적진 한복판을 향합니다. 다윗이 말한 베들레헴에 있는 우물물을 떠와서 다윗에게 바쳤습니다. 부하들이 목숨 걸고 떠온 물을 받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됨됨이와 본성이 드러납니다.
만약 다윗이 자기 자신의 권력을 자랑하고, 부하들의 충성심을 시험하려 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부하들이 목숨 걸고 떠온 우물물을 들어 자랑했겠죠. 스치듯 흘린 말 한 마디에 부하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적진에 뛰어들 만큼 자기 권력이 대단하다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왕을 기쁘게 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다녀온 세 장수처럼 충성해야 한다며, 모두에게 본받으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말 한 마디에, 목숨 걸고 우물물을 떠온 세 장수를 보고 정반대로 행동합니다. 하나님께 부어 드리면서, 목숨 걸고 다녀온 세 용사의 피라서 마실 수 없다는 이유를 말합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다윗의 반응을 보면, ‘아차’ 싶었을 듯합니다. 자신이 무심코 내뱉은 말이, 가장 충성스럽고 뛰어난 세 장수를 죽게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실감케 되었습니다. 그렇게 베들레헴 우물물을 마신다 해서, 싸움이 끝나거나 땅을 되찾는 것도 아닙니다. 싸움 중에 부하를 잃어도 큰 아픔인데, 싸움에 하등에 도움이 안 되는 일에 좋은 장수를 잃으면 손해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다시는 쉽게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다윗이 왜 뛰어난 지도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좋은 장수들이 곁에 머물렀는지, 어려움마다 목숨을 걸고 다윗을 지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생각과 행동이 훌륭했기 때문입니다. 부하의 희생과 생명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자기 사소한 이익과 욕심을 위해, 다른 이의 희생을 마땅히 여기는 독재자가 아니었고, 폭군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사울 왕은 다윗과 전혀 달랐습니다. 골리앗을 죽인 다윗을 백성들이 더 높이 찬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윗을 향해 죽음의 창을 던진 왕이었습니다. 자기 권력을 위해서는, 그 누구의 목숨까지도 가벼이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마저 거부했습니다.
이처럼 폭력적이고, 교만하고, 어리석은 사울 왕을 여전히 좋아하고, 높이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사울 왕이 그렇게 교만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비참하게 죽었음에도, 이후에도 사울만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라며, 사울의 통치를 돌이켜 보는 이들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이를 빌미로, 기회만 되면, 다윗을 향해 불만과 불평을 쏟아냈고,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이스라엘을 불화와 미움의 싸움터로 만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울의 어리석고 사악한 통치마저도 좋아하고, 위대하다고 칭송하는 이들은 ‘스톡홀름 증후군’을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처럼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켜도 여전히 좋아하고 높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의 통치방식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이익과 자랑과 성공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고, 희생시키는 일을 ‘지도력’이라 하지 않으시고 “악하다” 하시며 버리셨습니다. 권력과 직위가 조금 더 크고 높다고, 자기보다 힘없고, 낮은 직위에 있는 이들을 괴롭히며, 희생을 강요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지도자, 우리가 선택하고 기억해야 할 지도자는 바로 다윗과 같은 사람입니다. 권력과 직위의 크기에 따라 달리 보지 않고, 모두에게 하나님이 생명 주신 귀한 존재로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뿐인 자기 생명이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하듯이, 다른 이들의 생명도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함을 인정하는 지도자가 참됩니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기뻐하시는 지도자입니다.
직위로는 낮은 이들이지만, 다윗이 그들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자세로 이끌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좋은 일꾼들을 많이 보내주셨습니다. 꼭 필요할 때, 필요한 곳에 꼭 맞는 이들을 보내심으로써, 죽음의 위기에 빠진 다윗을 건지게 하셨고, 나라를 더 안정되게 이끌 수 있게 하셨습니다.
부하들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등불로 여기며, 더 충성했습니다. 자기 생명도 하나고, 다윗의 생명도 하나지만, 그러나 다윗을 위해 자신의 죽음마저 각오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뛰어나고 선한 지도력을 통해, 선순환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필요한 지도자, 선택해야 하는 지도자도 마찬가집니다. 가정이나 동네나 교회, 각 모임에서 지도자가 되었을 때, 향해야 하는 목표입니다. 힘으로 무릎 꿇게 하면, 비극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받고, 좋은 일꾼들을 얻고, 발전시키려면, 다윗처럼 사랑과 겸손과 자비로 이끄는 지도자가 되어야 하고, 이런 지도자를 선택하고 세울 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기틀을 닦고, 발전을 이룬 좋은 왕입니다. 싸움을 잘 해서, 권력을 크게 휘둘러서 좋은 왕이 아니라, 부하들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비로 지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도 여러 모임에서 이끄는 자리에 있을 때는, 다윗과 같은 모습으로 일하며, 모두를 존중하며, 사랑하고, 지도자를 뽑을 때는, 다윗과 같은 이를 선택함으로써, 이 땅을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로 채워 나아가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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