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11031)고난에서 구하시는 하나님(삼하 22장 1-51절)

청명하늘 2021. 10. 31. 15:09

고난에서 구하시는 하나님

 

성경: 사무엘하 221-51(501)

찬송: 412(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337(내 모든 시험)

설교: 20211031.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성경에 등장한다고 해서, 모두가 훌륭하고 좋지는 않습니다. 용서받기 어려울 만큼 악하고, 어리석은 이들도 수없이 많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악을 저지르면, 그 끝이 어떠한지를 기억하고, 죄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대로 믿음과 삶에서 본받아야 하는 훌륭한 위인들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복 주실 만한 삶을 배워서, 그런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여러 위인들 중 다윗은 신앙인들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인물 중 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신앙인들에게는 물론, 이스라엘의 기반을 다지고, 부흥시킨 인물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존경하고 인정합니다.

 

다윗은 존경과 사랑을 받을 만한 여러 모양을 갖췄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골리앗이라는 거인 앞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두려움에 숨어 있을 때, 청소년에 불과한 다윗이 나가 무찔렀습니다. 지금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는 말로, 절대적으로 불리하고, 어려운 싸움을 표현할 만큼, 감동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과의 우정과 사랑으로 모범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왕이 될 수 있음에도, 하나님께서 다윗을 세우셨음을 인정하고, 왕위를 양보한 요나단의 사랑과 희생이 더 크고 놀랍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이 사람들이 가장 욕심내는 왕위마저 양보할 정도면, 다윗 역시 그만한 능력과 자질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끝까지 자신을 죽이려 드는 사울 왕을 해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다윗이 보인 용서의 크기와 너비가 대단하기도 하지만, 이유도 대단합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라는 한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인정하시고, 복을 주신 까닭들입니다. 다윗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을 잘 보여줍니다. 이를 증명하듯 다윗은 두 번째 왕이 되었고, 400여 년 동안 왕조를 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라의 발전과 부흥을 이루었고,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화를 누렸습니다.

 

다윗은 정치와 신앙에서만 특별한 능력을 보인 게 아닙니다. 음악과 예술성도 아주 뛰어났습니다. 시편에는 150편의 시가 포함되었는데, 이중 78편을 다윗이 지었습니다. 다윗이 지은 시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감사와 찬양 시가 많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시작되는 23편도 역시 다윗이 지은 작품입니다. 이 표현처럼 다윗에게는 부족함이 없어 보일 만큼, 많이 갖고, 누리며 살았습니다. 원하는 만큼 갖고 누렸으니, 하나님께 감사하고, 당연히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 보입니다.

 

문득 다윗의 실제의 삶은 어땠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사무엘상 1512절에서 다윗의 외모를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때가 성경에 처음 등장할 때입니다.

 

이후에 다윗은 거인 골리앗과 싸우게 되는데, 이때 사울 왕이 자기 갑옷과 무기를 다윗에게 줍니다. 하지만 다윗에게는 너무 커서 결국 모두 거부하고, 자신에게 익숙한 무릿매를 가지고 나갈 정도로, 나이도 어리고, 덩치도 작았습니다. 그럼에도 거인 골리앗을 이겼으니, 다윗의 초상화를 그린다면, 멋지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질 만한 대목들입니다. 다윗이 아름다운 시를 수십 편 짓고, 악기로 아름다운 찬양을 드린 이유가 당연해 보입니다.

 

그런데 실제 다윗의 외모가 우리의 추측만큼 단정하고, 화려하고, 멋졌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았다고 봅니다. 우리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다윗의 멋진 외모와 화려한 삶은 다윗이 걸어온 과정과 처한 상황들을 세세히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다윗은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우리 머릿속에는 목동의 삶이 낭만적이고, 평온해 보입니다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처럼 소나 돼지나 염소를 기르는 기술과 장비가 발달했어도, 얼마나 힘듭니까? 하물며 들에서, 산에서 양과 염소를 기르던 시대에는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매일 시끄럽고, 말귀를 알아듣지 못 하는 짐승과 지내는 과정도 고난이지만, 매일 들에서 짐승과 함께 자야 합니다. 제대로 씻지도 못 하고, 쉬거나 잠잘 수도 없습니다. 길을 모르는 짐승이 위험한 곳에 가면, 목자는 산길, 숲길, 가시넝쿨을 가리지 않고 가서 구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골리앗과의 싸움이 가장 잘 알려졌지만, 사실은 처음 싸움일 뿐, 다윗은 수없이 많은 싸움을 벌였습니다. 오늘 본문 앞장인 21장에서도 다윗이 전장에서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아비새가 구해주었고, 이를 계기로 부하들이 다윗에게 다시는 전장에 나가지 말라고 당부하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어렸을 적에, 친구들끼리 모여 자주 한 놀이 중 하나는, 막대기 칼싸움이었습니다. 나무인지라 찔리거나 맞아도 크게 다치지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몇 번 휘두르고 놀다 보면, 어느새 다치는 일이 잦았습니다. 재미를 위해 하는 행동에서도 의도치 않게 여기저기 다치는데, 하물며 서로 죽이려 드는 전장에서의 싸움은 어땠을까요? 수없이 많은 싸움을 치른 다윗의 몸에는 상처가 수없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상처 없는 곳을 찾기가 훨씬 힘들고 어려울 정도입니다.

 

몸에 새겨진 상처만이 아닙니다. 다윗은 여덟 형제 중에서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요즘이야 막내로서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고 살지도 모르지만, 가정 내에 서열이 엄격했던 시대에는 불리하고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사무엘이 기름을 부으러 갔을 때조차 다윗 혼자만 들에 남아 양을 지켜야 했습니다. 사무엘이 다윗 아버지의 집을 방문하는 일이 간단하거나 자주 있는 일이 아닙니다. 왕이 생기기 전까지 이스라엘 전체의 지도자였으니, 요즘으로 보면, 전직 대통령이 방문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윗의 집안의 경사정도가 아니라, 인근의 지도자들이 환영하고, 인사할 만한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위로 일곱 형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 혼자만 들에 남았습니다. 다윗이 그 동안 부모와 형들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여겨졌다면, 이웃 사람에게라도 양을 맡기고 다윗을 참석시켜야 했습니다.

 

어려운 과정을 잘 이기고, 나라의 영웅이 되어, 인정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 기간이 길지 못 합니다. 사울 왕에게 억울하게 미움을 받습니다. 다윗은 미움을 받을 만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만, 욕심에 눈이 먼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끊임없이 시도합니다. 다윗이 죽일 수 있는 두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사울을 용서했음에도, 사울은 여전히 다윗을 미워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다윗은 이를 피해 다른 민족에게로 가서, 미친 척하기도 하고, 산과 들에서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사울 왕이 죽어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는, 이후에는 요압이라는 인물이 다윗에게 큰 짐이 되었습니다. 요압의 권력이 워낙 커서, 다윗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요압은 다윗보다 더 오래 살았습니다. 죽는 날까지 쉽고 편한 날들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다윗이 겪은 상처와 어려움 등을 보면, 우리가 먼저 기억하는 부와 명예와 평안한 삶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멉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다윗이 표현한 말들을 보면, 다윗이 걸어온 거칠고 험한 삶의 여정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반석, 요새, 방패, 구원의 뿔, 높은 망대, 피난처, 구원자... 모두 고난과 위험을 겪는 이가 필요로 하는 구원의 손길이나 피할 수단들입니다.

 

5,6절에서는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고 합니다. ‘스올무덤이나 죽음의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죽음의 위협과 위기가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죽음의 문턱에 이를 만큼 험난한 과정을 잘 드러냅니다.

 

만약 다윗의 고백이 여기에서 끝났다면, 믿음이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40년의 통치로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이루었다는 점 때문에, 존경과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믿음에서 특별한 사람은 될 수 없습니다. 그저 좀 업적이 많은 사람에 그칩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기에서 오히려 하나님께 수없이 감사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찬양합니다. 다윗이 기록한 시들 속에는, 고난과 탄식의 말들도 많지만, 찬양과 감사는 훨씬 더 많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이유를, 다윗이 받고 누린 은혜와 사랑이 많기 때문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나도 다윗만큼 받고, 누리면, 날마다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삶과 우리 각자의 삶을 비교해 보면, 이런 생각과 기준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쉽게 확인됩니다.

 

다윗은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우리는 다윗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쏟아냅니다. 다윗은 숱한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이 구해 주시고, 지켜 주셨음을 인정하고, 감사합니다만, 우리는 몇 가지 어려움만 겪으면, 주저앉고 포기합니다. “하나님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기에, 돕지도, 구해 주지도 않으시냐?”며 원망의 말들을 쏟아냅니다.

 

우리 모두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에서 적지 않은 어려움과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를 책으로 기록한다면, 수십 권, 수백 권의 분량이 될 만큼, 각자 어깨에 져야 하는 짐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 짐들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불평과 원망의 마땅한 이유와 원인으로 내세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겪어온 자취들에 비교해도, 내가 겪은 짐과 고난이 크고 무겁다고 할 수 있습니까? 누군가에게 무시를 받고 소외된 경우들이 있겠지만, 그러나 다윗처럼 가족에게서조차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 한 적이 있습니까?

 

아무리 억울하고 답답하다 한들, 다윗이 감내해야 했던 억울함에 비교할 수 있습니까? 아무 까닭 없이 죽음의 위협을 받고, 사망의 문턱까지 이른 적이 있습니까? 다윗처럼, 내가 죽이지 않으면, 다시 나를 죽이려는 달려들 원수를 용서한 적이 있습니까? 원수를 용서했더니 그 원수가 다시 나를 향해 칼과 창을 휘두른 적이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각자 하고픈 말들, 하소연 하고픈 일들이 많겠습니다만, 그러나 그 크기와 심각성을 비교해 보면, 얼마나 사소하고 하찮은 일들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원망과 불평은 다윗보다 클 뿐만 아니라, 바라는 수준은 훨씬 크다 못 해 터질 지경입니다. 다윗이 겪은 시험과 고난은 감내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다윗이 고난 뒤에 받은 복만을 욕심냅니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언제부터 그 정도를 바라고, 받을 만한 사람이었습니까? 언제부터 당연히 더 좋은 것, 더 맛있고, 더 많이 가져야 하는 사람이었습니까?

 

다음 달부터는 위드 코로나라고 해서, 16개월가량 계속되었던 여러 가지 제한들이 점차 풀리게 된다고 합니다만, 그 동안 교회에서 공동 식사를 금지해서, 밖에 나가 식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매주 갈 식당을 고르는 일이 꽤 귀찮기도 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모두가 만족하고 돌아온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두 번만 반복해서 가면, “처음 먹었을 때보다 못하다는 평을 내립니다. 몇 번 반복하면, 반찬의 종류와 맛을 평가하곤 합니다. 먹어도 또 가고 싶은 곳은 아직까지 없습니다.

 

그렇게 메뉴보다 훨씬 더 많은 이유로 음식과 식당에 대한 평을 내리다 문득 내가 언제부터...’라는 생각이 떠오르면, 멈칫하게 됩니다. ‘내가 언제부터 만 원 이상의 식사를 쉽게 하게 되었나? 언제부터 몇 만원 이상 하는 음식을 사먹을 수 있게 되었지?’라는 생각에 이르면, 얼마나 복에 겨운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만의 모습은 아니겠죠. 어느새 우리 모두의 입맛은 까다로워지고, 고급스러워졌습니다. 웬만한 음식으로는 감사와 만족할 줄 모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몇 만 원 식사에도 불평을 쏟아내는데, 돈이 아주 많아 수십 만 원하는 음식을 맘껏 사먹는 사람도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런 수준을 당연하다 여기다 못 해, 불평과 불만을 더 많이 쏟아낼 수 있게 되었습니까? 언제부터 지금 우리가 누리는 생활수준에 만족과 감사보다, 원망과 절망으로 채울 만한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러나 수십 만 원 이상의 음식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욕심은 한두 끼만 굶으면 해결될 수 있듯이, 지금 우리가 품고 있는 원망과 불평과 절망은, 욕심과 교만을 내려놓고, 각자 처지와 형편을 돌아보면 해결됩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이 이루어 놓은 수준과 분량보다, 비교할 수 없이 많이 갖고, 누리고 있습니다. 다윗처럼 옛날 사람으로 비교하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는 점차 높은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으면, 앞으로 더 나은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지키시고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시고, 자녀를 향해 복과 은혜를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난과 시련을 겪은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로 고백합니다. 원망과 불평보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윗이 겪은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이, 우리는 더 많이, 더 평탄하게 살고 있으니, 이제는 우리의 욕심의 그릇을 줄여 나아가며, 감사의 고백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큰 고난 중에도 다윗을 지키시고, 함께하시고, 복으로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겪는 고난과 아픔의 현장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약속하신 은혜와 평강으로 채워 주십니다.

 

온갖 상처와 고난을 겪었으나,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이를 잘 이겨내고, 하나님이 주신 복과 은혜로 채운 다윗의 모습을 통해, 우리 모두도 마음을 새롭게 하며, 하나님의 간섭을 기대하며, 더불어 삶을 하나님을 향함으로써, 모든 시련과 아픔을 이겨내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삶을 채우는 자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