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으로 응답될 씨앗을 심어야
성경: 사무엘하 21장 1-14절(구 500쪽)
찬송: 484장(내 맘의 주여 소망 되소서), 421장(내가 예수 믿고서)
설교: 20211017.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얼마 전에, 대통령 후보로 나선 한 사람이 TV 토론에 나오면서 손바닥에 왕(王)이라는 한자를 적은 일이 화제가 되고,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여러 말로 해명했지만,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또 반복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더 크고 중요한 문제는, 말도 안 되는 이런 글자를 쓴 이유입니다. 이 후보가 스승으로 믿고 따르는 도사가 알려주거나 써주었을 것으로 봅니다.
대통령 자리는, 그 어떤 자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권리가 큽니다. 나라 안에 사는 모든 사람의 수준과 방향을 좌우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합니다. 그렇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무당이나 도사처럼, 미래의 운명을 점치는 이의 말을 따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 후보의 언행이 너무 미신적이라는 질타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지난 주일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교회에 나가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기독교, 천주교, 불교 다 믿는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 후보는 두 가지 면에서 옹호받기 어렵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믿는다’와 ‘하나님도 믿는다’는 전혀 다릅니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이 두 가지를 같다거나 괜찮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믿음은, 부처도 믿고, 무당의 여러 신을 믿으면서, 하나님도 믿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를 통합과 화합을 위해 좋다며 인정하는 종교가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이를 부정하다 하시며 미워하십니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사람이 잘못 판단하고 있는 또 다른 모습은, 방향과 목적이 잘못 선택된 데에서 드러납니다. 대통령은 나라와 국민을 위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또 국민 다수의 선택을 받아야만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국민이 무엇을 하는지, 또 이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고 이에 맞게 대응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후보는 이에 대한 분석과 대처가 잘못되었습니다. 국민이 원하는 대통령은 왕처럼 군림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무당이나 도사처럼, 운명에 맡겨도 될 만큼 쉽거나 하찮은 자리가 절대 아닙니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수준도, 문제와 어려움을 대처하는 방향도 모두 기대하는 수준에 턱없이 부족해 보입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주와 같습니다만, 여기에서 드러난 다윗의 믿음과, 하나님의 응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시고, 또 어떤 믿음을 원하시는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지역을 정복해 가자, 기브온 족속은 너무 두려웠습니다. 가만히 있다가는, 다른 족속들처럼 이스라엘 민족에게 멸망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마치 멀리서 온 것처럼 꾸며서 속이고, “당신들의 종이 될 테니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조약을 맺자”고 요구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멀리서 온 줄로 속아, 결국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계약을 맺습니다.
곧 기브온 족속의 계략에 속았음을 알았지만, 이미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브온 족속을 멸망시키지 않고, 함께 살게 됩니다. 그렇게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된 사울이 내세울 만한 업적을 쌓기 위해서인지 갑자기 기브온 족속을 해쳤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하니,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고스란히 피해만 입었습니다.
그렇게 기브온 족속의 아픔만 남긴 채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에서는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셨습니다. 마지막 14절에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첫 절에서는 기근의 원인이 나오고, 마지막 절에서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신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셨다는 의미는, 3년 계속된 기근이 멈추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 수 있는 정도로 수확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엄격하게 보응하시고, 우리의 모습에 따라 응답을 달리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브온 족속을 죽인 때는, 정확한 연대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사울이 왕으로 있을 때입니다. 이 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3년 연속 기근을 내리신 때는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입니다. 두 사건 사이에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는지 알 수 없지만, 가장 짧게 잡아도 1,20년이고, 중간치로는 40년, 최대치는 이보다 더 길게 볼 수 있습니다.
이 정도의 세월이 흐르면, 대부분 기억의 뒤편으로 사라집니다. 특별히 가해자의 입장에서는 기억되지도 않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다릅니다. 응어리로 남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피해자보다 하나님은 더 깊이, 더 속속들이 기억하십니다. 힘이 없어 당할 수밖에 없던 기브온 족속의 아픔을 하나님은 그대로 끝나게 놔두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대해 철저히 보응하셨습니다. 기브온 족속이 당한 고통보다 더 크게 이스라엘에 징계하셨습니다.
이를 보면, 우리 스스로 얼마나 조심하며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하나를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기억하실 뿐만 아니라, 그에 따라 갚으십니다. 언행으로 좋은 씨앗을 뿌리면, 좋은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나쁜 씨앗을 뿌리면, 나쁜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뿌리고 거두는 시간의 길이를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수십 년 전의 역사, 앞선 왕의 시대에 있던 일을 다윗의 시대에 갚으셨음을 보면, 하나님의 저울이 얼마나 엄격하고, 또 공평한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갈 날들에 복되고 좋은 삶을 원한다면, 지금 우리 자신이 좋은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자비와 은혜의 씨앗들을 지금 뿌리고 가꾸어야 합니다. 후손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삶을 채우길 원한다면, 먼저 살고 있는 우리가 지금 사랑과 인내와 온유와 절제의 씨앗들을 뿌리고, 하나씩 가꾸어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에 따라, 우리 각자의 앞날과 더불어 후손의 삶까지 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독일의 총리가 퇴임을 앞두고, 독일이 유대인들을 학살했던 역사에 대해서 다시 사죄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1933~45년에 있던 역사입니다. 70년 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죽인 것도 아니라며, 얼마든지 발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독일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저지른 악행을 기억하며, 정치지도자들부터 이를 반성하며, 사죄합니다. 후손들에게 교육하며,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독일과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독일과 같은 시기에, 비슷한 만행을 저질렀지만, 지금까지 자기들이 저지른 역사를 반성하고, 사죄하지 않습니다. 인정하지도 않고, 역사로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그 동안 잘되었고, 잘 살고 있으니 괜찮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그러나 수십 년 전의 학살 때문에, 오히려 이스라엘 전체에 3년의 기근을 내리신 하나님의 엄격하심을 보면, 일본의 만행과, 반성하지 않는 교만을 이대로 지나치시겠습니까? 유독 끊임없이 일본에서 반복되는 재난과 재해가 자연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서도 마찬가집니다. 기억하시고 보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도 똑같이 보응하십니다. 우리가 당한 아픔을 기억하시고, 이를 풀어주신다는 약속과 소망이기도 하지만, 더불어, 우리가 가한 아픔도 기억하시고, 이를 되갚아 주신다는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과거 우리의 말과 행동에 따라, 지금 우리가 그대로 받고 있고, 지금 우리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하나에 따라, 우리의 앞날과 후손의 삶까지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살아갈 날을 두려움과 아픔이 아니라, 기쁨과 희망으로 맞이하기 위해서 지난날들을 돌아보고, 앞날에 거두고 싶은 복과 은혜와 소망의 씨앗들을 삶으로 심어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 옳고 좋은 말을 하고, 지금 선을 쌓아 올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피해자의 아픔을 기억하시고, 되갚으시는 하나님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다른 한 가지는,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바는 많은데, 이루기에는 우리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바람과 기대는 언제나 저 멀리, 높이 있어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로 아뢸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로 사사건건 아뢰지 않으면, 이루고, 받을 게 많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이 우리의 계산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내세우곤 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 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는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에 따라, 간절함을 응답의 조건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간절할수록 하나님이 응답하신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또 어떤 교회와 신앙인은, 금식과 방언기도를 통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더 빨리 응답하신다고 보기도 합니다. 모두 나름대로 일리 있는 해석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기준은, 기도의 분량도 아니고, 간절함의 크기도 아니고, 금식이나 방언도 아닙니다. 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 큰 기근이 들어, 수많은 사람이 굶주리고, 죽었는데, 이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없었겠습니까? 금식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3년 동안 이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 왕이, 하나님께 기근의 원인을 묻고, 하나님께서 원인을 다윗에게 알려주셨을 때조차도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기브온 족속의 원한을 풀어주고 나서야, 하나님은 비로소 기도에 응답하시고, 기근을 풀어주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시는 기준이 우리 삶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그 동안 짧은 역사에 비해, 세계에서 볼 수 없을 만큼 빨리 부흥하고 성장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했습니다. 우리의 삶과는 상관없이, 믿음 하나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교회는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 자신의 공로나 업적에 따라 구원을 받지 않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얻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도 된다는 면죄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렇게나 말하고, 아무렇게나 살면서,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는 말만 되풀이하면, 하나님이 무조건 응답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기근에 허덕이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3년 동안 수없이 기도하며, 믿고 구했겠지만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뼈저린 반성, 기브온 족속의 마음 속 깊이 박힌 상처가 뽑힌 후에야 비로소 응답하셨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가한 아픔 때문에,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하나님께서 귀를 막고, 외면하실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아픔과 어려움이 지난날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과 하나님의 응답이 절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막히고, 하나님의 응답이 없을 때, 고난과 아픔이 쉼 없이 닥쳐올 때, 무엇으로도 풀 수 없을 때, 나의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힘을 앞세워, 누군가에게 풀 수 없는 아픔을 준 잘못이 없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누군가의 가슴에 응어리를 지게 한 과거가 없는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낱낱이 살펴야 합니다. 기억 저편에라도 희미하게 누구를 향해 가한 상처가 있으면, 그래도 되고, 그럴 수 있는 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내가 상대를 향해 가한 상처가 내 삶으로 되돌아올 뿐만 아니라, 가시가 되어, 내 삶을 갉아먹고, 곪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삶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다지는 작업도 필요하지만, 더불어 이웃을 향한 자세를 되돌아보고, 다잡아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지금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우리의 삶이 평안과 복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 모두를 세세히 기억하십니다. 우리의 모습에 따라 갚으십니다. 선과 의와 사랑과 희생을 심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선하고 의롭고 복된 열매를 얻게 됩니다. 거짓과 폭언과 욕심을 심으면, 갈수록 힘들고 고통스러운 날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 믿음만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모습에 따라 기도에 응답하시기도 하고, 외면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과 은혜로 채우기 위해서는, 과거의 잘못을 철저히 뉘우치고, 사죄하며, 지금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와 선행을 심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고, 잘못을 철저히 반성하고, 믿음과 더불어 의로운 삶을 통해, 매일 매순간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이 땅에서는 더 복되고, 기쁘게 살고, 이후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자리에 함께 이르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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